장송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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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다 보니 길어졌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다. input이 워낙 방대했으므로 output 역시 평소보다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1, 2권에 나누어 등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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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는 독특한 작가이다. 이십대 초반(1998년)에 문예지에 투고한 첫 소설로 무라카리 류 이후 23년 만에 대학 재학 중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으며, 그가 써 낸 소설이라는 것이 중세시대의 유럽 수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깊이 있게 천착(알라딘 책 소개)『일식』이다. 199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 『一越物語 (일월 이야기, 번역 제목 )』는 고풍스러운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예스럽고 애잔한 사랑이야기로,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일식』보다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끌어내었다. 새 천년을 앞둔 일본의 스물 서넛 젊디 젊은 대학생이 관심을 가진 소재가 중세의 종교와 사상, 메이지 시대 선인(先人)의 예술혼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다소 의아했다. 문체는 또 어떤지. 배경에 걸맞은 의고체(疑古體)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에서도 틀림없이 잘 쓰이지 않을 법한 한자 단어도 모자라 의미와 정서에 맞게 직접 조어(造語)까지 했다는 걸 보면 이 젊은 작가의 역량과 치밀함을 말하기에 앞서 그가 상당히 특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그가 4년의 준비 끝에 내 놓은 세 번째 작품이 바로 『장송(葬送)』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출판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야 번역이 되어 나왔다. 너무 젊은 작가라 다른 할 일(!)이 많아서 글을 안 쓰는 건 아닌지, 이 작가의 새 책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인지 염려하며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나에게는 엄청나게 반가운 소식이다. 게다가 원고지 5500매, 사륙판 160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쇼팽과 들라크루아, 조르주 상드를 중심으로 예술가의 삶과 고뇌, 사랑과 죽음이 장려하게 펼쳐진다(문학동네 책 소개)고 하니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또다시 의아했다. 일본인인 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가 어째서 19세기 유럽으로 눈을 돌렸는가.

 

모든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기 쓰듯 소설을 써대는 몇몇 작가들이 이 말에 강하게 동조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의미로 한정하여 폄훼할 말은 아닐 것이다. (작품 속에서 쇼팽과 들라크루아가 언급한 예술가의 태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비교 등으로 일기 쓰는 작가들을 논할 수도 있겠다.) 한 시대와 지역에 속한 개인으로서 세계와 역사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 살아가는 방법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 또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역, 시대와는 동떨어진 19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고자 함이며, 따라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확인하게 된다.

 

1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중 상당 부분은 예술론에 해당한다. 고전주의의 엄격함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한창 꽃을 피워갈 무렵,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낭만주의자로 이해되고 있던 쇼팽과 들라크루아는 오히려 그러한 호칭을 거부한다. 그들은 단순히 격렬한 영감에 의해 즉물적으로 표현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보다 예술의 이상(理想)을 추구하며, 천재(天才)에 의해 한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라 고상한 취미로 갈고 닦은 세련되고 완벽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자 한다. 고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되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근대적 기법을 추구할 것, 그것이 들라크루아가 생각하는 낭만주의의 본질이다. 이는 쇼팽의 음악과 들라크루아의 그림 뿐 아니라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일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완강한 예술론 아래로 작가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작가는 『장송』을 쓰면서 발자크와 플로베르를 비롯한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염두에 두었으며, 19세기의 정통적인 소설 스타일을 철저히 탐구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마치 음악이나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화성학과 데생 공부를 거쳐 그 전통에 맞서는 것처럼. (역자 후기의 신문 인터뷰 인용)이라고 고백한다. 기본을 중시하고 고전을 완벽히 이해한 후에 새로운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한 쇼팽과 들라크루아의 창작론에 일치하는 태도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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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1-1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젊은 작가라 다른 할 일이 많아서...ㅎㅎ
모두 블루님 같은 줄 아신다니까!
본격 심층 리뷰 되겠습니다.^^

urblue 2005-11-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만 놀러다니느라 바쁜 걸까요? -_-;
그치만 젊은 작가들은 아직도 가능성들이 많으니까 다른 길로 빠지지 않을까 진짜로 걱정된다구요. 글 쓰는 게 내 길이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봐요. 물론 좋아하는 작가에 한정된 얘기긴 합니다만. 어떤 작가들은, 제발 다른 길 좀 찾아보라고 조언해주고 싶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