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잘 그리스의 신들을 생각하곤 해. 제우스를 필두로 그의 형제들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크로노스를 해치웠잖아? 그리스의 저 찬란한, 권태 따위는 끝끝내 알지도 못할 찬란한 세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행동이 필요했던 거야. 시간의 지배를 받는 한 신들도 우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것이 얼마나 먼 옛날의 일인지는 나도 몰라. 그러나 분명 그때 이후로 크로노스는 줄곧 은밀히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거야. 천천히 착실하게, 또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야. 우리는 그 복수가 이윽고 결실을 맺은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것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것이 바로 대혁명이지. 대혁명으로 인해 인간은 물질적인 쾌락이라는 지평에 완전히 고정되어버렸어. 그것도 거의 자발적으로. 공허한 쾌락에 길들여지는 동안 머리 위로는 완전히 덮개가 씌워져서 어느새 크로노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어. 대혁명이 수많은 자유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그 자유와 맞바꾸어 인간은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잃고 말았어. 그리고 수많은 자유를 손에 넣은 만큼 더욱 그것을 견디기 힘들게 된 거지. 생각해보면 낭만주의라는 운동은 이러한 시대의 필연이었는지도 몰라. 그것은 분명 혁명 후의 다양한 자유를, 특히 창작에 있어서 기법상, 형식상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표방했지만, 한편에서 그것이 진실로 의도했던 것은 사실은 그러한 크로노스의 승리로부터의 자유였을 거야…… 나는 아까 말했던 창작 전의 초조함이라는 문제에 대해 지금껏 수없이 생각을 해 왔어. 얼마 전까지도 궁리를 해봤지만 역시 잘 알 수 없더군. 그런데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느낌이 들어. 우리는 크로노스의 승리의 와중에 있어. 창작으로 향하는 것은 말하자면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야. 우리가 작업에 임하려고 할 때 크로노스는 손을 뻗어 우리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지.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한 저항감인지도 몰라. 창작 쪽에서의 저항이 아니라 지금 있는 이 시간 쪽에서 나를 막으려고 하는 거야. 뒤마를 읽으려고 할 때는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고 다 읽은 뒤에는 도리어 불쾌감이 든다는 건, 결국은 그것이 모두 크로노스의 승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일 게야……

 

 


크로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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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31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31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10-3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나리아 번역자군요.
그 책은 정말 멋지게 번역한 것 같던데......
장송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한쪽 손에 든 건 모래시계인가요?^^

urblue 2005-10-3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크로노스는 시간, 세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양윤옥씨군요. <달>도 그 분이 번역했는데.

2005-10-31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1-01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11-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따라?) 비공개 s님, 뭐 대세라기보다 그냥 일이 좀 있던거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