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 박노자, 허동현의 지상격론
박노자, 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 2005년 5월
평점 :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는 출판사에 의해 기획된 일종의 대담집이다. 아마 <우리역사 최전선>의 속편으로 기획한 것일 텐데, 전체적으로 대담집이라기 보다는 서한집이 오히려 그럴듯한 표현일 것 같다. 출판사가 먼저 특정한 주제에 대해 간단히 발제와 질의를 하면 저자들이 각각 편지형식으로 의견을 밝힌다. 여기다가 출판사가 몇 가지 추가질문을 보내 답글을 받는다. 말 그대로 “지상격론”. 하지만 좀 번거롭다. 이건 아무래도 박노자 선생이 노르웨이에 있는 탓이지 싶다. 그래선가. 몇몇 부분에서는 생동감의 득보다 어긋남의 실이 크다. 얼굴을 마주한 자리였다면 논쟁이 좀더 분명했을 것이다.
책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마 ‘구한말 조선 지식인과 정치 엘리트의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에 대한 인식의 의의와 한계를 검토하여 그 현재적 교훈을 끌어내 보자’ 정도일 것이다. 이에 따라 책의 목차도 조선인의 미국관(“무지와 선망이 대미 맹종을 불렀다”는 박노자의 비판에 대해 허동현은 “개화파의 대미의존은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이었다”고 반론한다), 조선인의 러시아관(정보부재의 구한말 엘리트가 러시아를 과대평가했다는 박노자의 비판에 허동현은 러시아는 나름대로 강국이었으며 당시 구한말 엘리트의 대응 또한 나름대로 타당한 계책이었다고 답한다), 조선인의 중국관(우리가 “모방적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중국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박노자의 비판에 대해 허동현은 박노자가 중국의 패권주의적 성격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응수한다), 조선인의 일본관(박노자는 한국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공통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으며, 근대화의 부정적인 측면 또한 일본의 영향이 컸음을 지적한 데 대해 허동현은 이러한 해석은 일종의 식민지 근대화론 일 수 있으며, 우리 나름의 주체적 근대화 기획이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예전 창비에서 주장한 것처럼 ‘근대완성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읽다 보니 몇 해전 주간조선 지면을 통해 소개된 하영선 교수의 기획기사가 떠올랐다. 구한말 조선의 대응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한국이 처한 상황이 이와 같으니 일종의 신 부국강병이라 할만한 국가발전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울러 외국자본의 성격을 두고 벌어진 ‘개화와 척사의 딜레마’ 논쟁이며,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동맹과 자주의 딜레마’ 논쟁 따위가 어른거린다. 그렇다고 역사가 반복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현재의 입장에서 교훈을 얻는 것일 테다. 구한말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대립을 이해하려면 현상 이면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처럼,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이해 또한 몇 가지 수사로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과연 책 자체의 무게보다 책이 던지는 질문이 훨씬 묵직하다. 내용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단순히 과거의 역사로 그치는 것도 아니니 더 공부해 보라고 권하고 있는 책이랄까. 내용과 구성에 조금씩 아쉬움은 남지만, 책이 다른 책을 부르는 권유와 유혹의 미덕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