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전쟁은 우리의 현실
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유고슬라비아의 초대 대통령 (1953∼1980)이자 소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지켜냄으로서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을 막아낸 지도자  티토(Josip Broz Tito)의 생전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 -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 는 다른 종교와 인종과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산주의라는 원칙과 유고슬라비즘(Yugoslavism)과 통합된 인간성으로 묶여져 살아가던 국가였다. 1개 국가, 2개 문자 (키릴문자와 러시아문자), 3개 종교 (그리스정교, 로마카톨릭, 이슬람교(회교)) 4개 언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5개의 민족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이아인, 마케도니아인, 몬테네그로인), 6개의 공화국, 7개의 접경국을 가진 모자이크 국가로 분쟁과 균열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나, 문제는 티토 사후 등장한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면서 분쟁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할 때 등장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는 정교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가톨릭으로 각기 다른 종교를 갖고 있었는데, 여섯 개의 공화국 가운데 보스니아의 인종 구성이 가장 복잡했다. 크게 크로아티계와 세르비아계와 무슬림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들의 언어는 남부 슬라브계 언어로 같았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종교였다. 크로아티아계는 로마가톨릭, 세르비아계는 그리스정교, 무슬림계(본래 슬라브족이 대부분이지만 오스만 터키의 500여 년간의 식민지배를 통해 이슬람교로 개종된 사람들)는 이슬람교를 믿었다.

  발칸 - '발칸'은 터키어로 '산맥'을 의미한다 - 반도는 그리스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출신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 그의 정치적 영역하(領域下)에 들어갔으나, 그 후는 로마, 비잔틴,·투르크 혹은 해안 연변 지대에 있는 베네치아 등 외부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도 오스트리아,·러시아, 영국,·이탈리아 등 여러 세력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19세기에 러시아가 터키 세력을 물리친 무렵부터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몇 개의 민족국가가 형성되었으나, 민족 간의 대립과 열강(列强)의 간섭의 격화는 발칸 반도로 하여금 유럽의 화약고(火藥庫) - 이 별명은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게 된 후 얻어졌다 - 라고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 후 소위 민족자결원칙에 따라 몇 개의 독립국이 탄생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그 대부분이 나치스 독일의 침략을 받았다. 전후에는 남쪽의 그리스를 제외한 지역에 구(舊)소련의 영향 밑에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발칸 반도는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표출되지 않았으나, 1980년대 말 이후 구소련의 사회주의가 쇠퇴하면서 국제적 관심의 초점지역으로 재등장하였다. 예를 들면,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이었으나, 1990년대 초를 지나면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이 독립함으로써 유고슬로비아연방이 축소되었다.

 

 

  '반도'가 가지고 있는 지형적인 특성과 열강들의 세력 확장의 희생양이 된 발칸 반도는 현재에도 심각한 분쟁중이며 인종분쟁과 민족분쟁으로 계속해서 희생양이 발생하고 있다. 각 공화국에 분포하는 소수 이민족 집단에 대한 다수 민족의 적대행위와 대략 학살(인종 청소 문제)가 심각한 국제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가 외면한다는 건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걸 스스로 시인하게 되는 부끄러운 오욕이 될 것이다. 발칸 반도에 찾아와야만 하는 평화는 우리 전 지구의 인간들에게,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은 가능한 것인가를 가늠하는 시금석 역할을 할 것이다.

 

  내가 보스니아 내전이니 인종 청소니 발칸 반도의 백정 슬로브단 밀로셰비치니 하는 말을 듣게 된 것은 보스니아 내전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된 이후부터다. 보스니아로 불리는 이 나라의 공식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다. 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다시 두 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어 각각의 대통령과 총리, 의회를 두고 있다. 보스니안 회교도와 크로아티안들이 합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인들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있는데, 이 두공화국 연합을 통칭해서 보스니아라고 부른다. 명칭의 혼란을 막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가 차원의 BH', 이에 속한 두 공화국의 하나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은 그저 '연방'으로 부른다. 보스니안 회교도와 크로아티안들의 연방은 두 사람의 대통령을 두고 있고, 세르비아인들의 스르프스카 공화국도 한 명의 대통령이 있다. 그래서 총 3명의 대통령이 있는데 이들 세 명의 대통령은 8개월마다 한 번씩 돌아가며 의장직을 맡아 '국가차원의 BH' 대통령직을 맡아 수행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1992년 3월 3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립의 선포는 곧 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립 을 주도한 세력은 회교도가 중심을 이룬 보스니아 이슬람 정부와 이들 세력에 협조하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유고연방에서 독립의 가부를 묻는 선거에 불참하면서 보스니아 독립선언 다음날인 3월 4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슬로브단 밀로셰비치는 89년 세르비아의 실권을 잡았는데 '위대한 세르비아' 건설을 깃발로 내걸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자극해 대중적 인기를 통합했기 때문이다.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이곳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정서가 맞아떨어졌고, 밀로셰비치는 대포와 무기를 보내 지역 세르비아인들의 무장과 투쟁을 유도했다. 1992년 4월 6일 EU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자 보스니아는 본격적인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유고연방군이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는 내전 초기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일거에 장악하는 기세를 올렸다. 보스니아 사태가 위험 수위를 넘자 UN은 동년 5월 신유고연방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조치, 항공봉쇄, 자산동결을 주내용으로 하는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이 책 <안전지대 고라즈데>는 우리가 알고 있던 보스니아 내전과 인종 청소와 전쟁의 참상으로 고통받던 사라예보의 모습 이면에 소외되었던,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의 학살과 참상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소수 민족이었던 무슬림들은 세르비아계나 보스니아계 양쪽으로부터 끔찍한 보복과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어느 곳으로도 보호받지 못했다. UN이 간섭하면서 무슬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안전지대(Safe Area)가 만들어졌으나 이는 빌 클린턴의 말대로 ‘실내 사격 연습장’처럼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늑대의 무리에 던져진 이민족이자 이교도 표적들이 모여 사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안전지대’에 거주하고 있던 무슬림들은 가장 안전하지 못한 ‘안전지대’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또 다른 안전지대인 ‘제빠’에서는 7천 명 이상의 무슬림계 남성들이 학살되었다. UN 난민 위원회는 94년 고라즈데에서 7백여 명이 죽임을 당하고 2천여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정확한 진실을 누가 알겠는가! -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인종청소 차원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많은 부녀자들, 특히 세르비아인들의 계획적인 성폭행 희생자가 돼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곳이 보스니아다. 인구 40%가 피난을 떠나야 했다.

  보스니아 내전 중 세르비아계가 소위 '인종청소'라 불리는 만행을 저지르자 UN도 1992년 8월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러시아는 1995년 3월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세르비아계를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러시아는 세르비아공화국이 보스니아 회교정부와 크로아티아정부를 승인하는 대가로 세르비아에 대한 UN의 제재를 해제하자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내전 당사자들과 미국, EU, 러시아 등 중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5년 11월 21일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보스니아에 평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마련하였다. 이로써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23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내가 조 사코의 만화 <안전지대 고라즈데>를 읽으면서 느꼈던 분노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이러한 전쟁이나 분쟁이 시작되는 원인의 많은 부분이 민족주의와 종교가 된다는 사실이다. 가장 성스럽고 거룩해야 할 이름이 드높아지면 되려 갈등과 분쟁과 비극이 시작되는 아이러니 앞에서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일단 지옥의 문이 열린 다음에는 인간으로 죽느냐, 인간임을 포기하고 오로지 살기 위해서 죽이고 도망하고 상처입으면서 연명하느냐만 남는다. 이때부터는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잘못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둘째는 국제사회나 열강의 개입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좇을 뿐 인간의 존엄성과 박애와 평화를 목적으로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알았을 뿐이다. 어찌하여 UN과 NATO와 강대국들은 보스니아 내전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조금만 더 기본적인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했더라면 피해는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셋째는 이런 사태를 모르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자괴감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내가 전쟁을 겪은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때마다 도대체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기괴하고 괴이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 만화를 읽어나가면서 내가 느꼈던 분노란 결국은 내 삶이 이토록 안락하고 행복하기에 느끼는 안도감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치욕, 이게 내가 이 책을 통해 확인한 내 깜냥이다. 내 삶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갖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이기적이고 오만한 생각이라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어찌하여 나만 행복할 수 있겠나. 전쟁은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늘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러니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는 누군가가 겪고 있는 공포와 슬픔과 비극과 고통의 다른 이름. 나만 행복하길 바라지 말자. 환상처럼 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런 희망을 가지는 것은 망상일까. 전쟁은 지금 나의 현실이다.


 

 

  - 코소보 사태


  코소보는 1974년부터 유고연방의 하나의 자치주였는데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자치 권을 박탈하고 알바니아어의 사용도 금지하는 등 탄압조치를 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총파업을 계속하고 자치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강경주의자들은 코소보의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인구 57만 명의 몬테네그로들이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데 1백80만 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자치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하여 무자비한 무력진압을 시작하였다.


  자치권의 역사는 가까이는 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등 다양한 공화국을 유고라는 하나의 연방으로 묶은 티토는 코소보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지위는 독립 공화국이 아니었지만 사실상 공화국의 지위를 누렸던 것이다. 이런 어설픈 봉합은 80년 티토가 사망하고 이후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89년에 와서 깨지고 만다.


  지난 3월24일 미국이 주도하는 NATO는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세르비아인들의 학살행위를 저지하고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평화안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하여 유고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NATO의 유고폭격은 미국과 유럽의 나토회원국들이 유고의 ‘인종청소’를 심판한다는 명분으로 감행되었다. - 70일 가까이 지속된 이 폭격으로 세르비아에서는 1500명이 목숨을 잃고 수만명이 부상당했다.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중요한 건물들이 파괴되어 폭격 전 수준으로의 경제회복에 30년 이상이 걸린다는 진단이 나올 정도로 파괴를 경험해야만 했다. 이어 미국이 원하던 대로 세르비아에서는 새로운 정부가 혁명적으로 들어섰고 밀로셰비치는 권좌에서 밀려나 현재 헤이그 전범재판소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날만 기다리는 처지로 전락했다. 코소보는 미국을 비롯한 17개국의 수중에 떨어졌고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한 처지에 놓여 있다. - 이 공습으로 또다시 대량의 난민이 발생하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방향을 잃은 정의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NATO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결사항쟁의 의지를 천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알바니아인들을 코소보에서 완전히 몰아내려 하고 있다. 이미 50만 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추방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엘 까다레의 작품을 읽어보시라! - 세르비아는 1998년 5월 3일 대규모 소탕작 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알바니아계 반군을 사살하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른 바 인종청소작전을 펼쳤다. 나토공습 후 마침내 1999년 6월 3일 세르비아 의회가 유엔의 평화계획을 승인하였다. 6월 5일부터 나토와 유고연방 간에 군사회담이 열렸고, 9일에는 군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나토의 유고공습이 시작된 이래 11주간 계속된 코소보 사태는 수습되고 평화안 이행에 들어갔다.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장악에 집착하는 것은 코소보가 세르비아인들이 14세기에 건설하였던 세르비아왕국의 중심지였고, 유서깊은 종교유적이 남아 있는 지역이면서 동시에 1389년에 오스만 터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10여만의 세르비아인들이 사망하였던 세르비아인들의 한이 서려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오스만 터키에 패한 세르비아인들은 북쪽으로 쫓겨났고 이곳에 회교로 개종한 알바니아인들이 정착하였다. 현재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전체인 구2백만의 90%에 달한다.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이 독립하면 본국인 알바니아 공화국에 귀속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와 세르비아가 같은 슬라브 민족이고 같은 동방정교를 신봉하고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고, 또한 러시아와 중국 역시 독립을 요구하는 심각한 소수민족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NATO의 군사개입에 반발하고 있는 것도 NATO 국가들의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 인터넷에서 떠도는 출처 미상의 자료를 많이 인용했다. 아울러 코소보 사태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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