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평범한 이들을 위한 변명"

"발레냐 유전이냐"란 글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두 가지 생존방식에 대해 몇 마디 한바 있는데, 오늘자 한겨레의 한 기고칼럼을 읽으면서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었다. 김형태 변호사는 "평범한 이들을 위한 변명"이란 기고문에서 <지식인의 두 얼굴>(폴 존슨의 이 책에 대해서는 나도 언급한 적이 있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전제하고("이 책은 우리가 떠받드는 위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중 톨스토이의 사례를 들어서 지식인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행복론을 펼친다.

먼저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교훈소설"을 썼지만, 그 자신이 "평생을 성욕, 물욕, 명예욕에 시달렸다. 저 자신이 여자들에게 욕심을 내놓고는 거꾸로 여자들을 음탕과 방종의 원흉이라며 사람 취급을 안 했다."(이런 위선이!) "톨스토이 자신의 지나친 욕심에 대해 그저 '내 탓이오'라고 조용히 혼자 되뇌었으면 될 것을 성욕 자체를, 나아가 애꿎게 여자들을 마귀 대하듯 했던 그는 세상 그리고 존재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미숙아이지 싶다." 차라리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는 아마 그 이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폴 존슨의 (이전 번역본인) <지식인들>을 읽은 지 자못 오래 되었으므로, 그의 신랄한 지식인 비판의 내용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었다. 나 또한 이후에는 브레히트의 수사적인 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에 대해서만 그가 유난히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 것은 아니고, 또한 톨스토이 자신이 그런 비판으로부터 면제될 이유가 없다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을 가능하게 한 '전거들'이 대부분 러시아문학의 이 '거인'에게서 나왔다는 점도 고려해볼 필요는 있다. 우리가 그의 '성욕, 물욕, 명예욕'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참회록> 등을 필두로 한 톨스토이 자신의 '반성문' 덕분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더라도) 톨스토이에게는 '반성하는 자아'와 '반성되는 자아' 사이의 자기분열이 있었던 셈. '반성되는 자아'에만 초점을 맞추어 ('도덕의 달인'이라 할 만한)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좀 과한 일이지 싶다.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는 아마 그 이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란 대목도 (존슨의 생각인지 김 변호사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정작 톨스토이 자신이 강조해마지 않은 것이 그 농민들의 미덕이다(1861년에 러시아에서는 농노해방이 단행되었으므로, 1828년생인 톨스토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주로 '농노'가 아니라 '농민'이다. 그러니까 지주-농노 관계가 아니라 지주-소작농 관계이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가르치려 들었던 것은 그 농민들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배계급, 즉 귀족과 지주들이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농민들에겐 책이란 것 자체가 무용지물이었고. 톨스토이 자신은 '농민이 되고자 했던 (참회하는) 귀족/지주'였던 만큼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란 표현은 톨스토이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그는 농민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런 정도의 오해는 문학에 문외한인 '평범한 이들'이 가질 만한 오해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와 같은 (잘난 체하는) 지식인 비판에 이어지는, 김 변호사의 무임승차성 주장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성욕 말고 물욕도 그렇다. 사자는 저 살기 위해 영양 새끼를 갈가리 찢는다. 거기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이 피곤한 세상 겨우 살아가려면 좋은 학교 나와 좋은 직장 가지려고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다. 집 한 채 마련하려면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도 안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처세술이 지식인의 (위선적인) '두 얼굴'과는 다른 '평범한 이들'의 맨얼굴인가?

기본적인 세계관. 우리 사회는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 식의 야생적인, 혹은 양육강식적인 세계이며 서로가 먹고 먹히는 이 세계에는 선도 악도 없다. 있는 건 생존투쟁뿐이다. 이 피곤한 세상, 곧 생존투쟁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잡아야 한다(이게 사자의 발톱이고 이빨일 테다). 그리고, 더불어 '부동산 투기며 주식 투자' 해야 한다. "안 할 수가 없다"는 이중부정은 무슨 뜻인가? 안 하고 싶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왜?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야 하겠기에.

변호사인 필자는 아마도 좋은 학교를 나왔을 것이고,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도 '안 할 수가 없을 만한' 나름대로의 경제적 여유도 갖고 있을 것이다(현 주미대사의 말대로, 어쩌면 '출발'이 달랐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처지를 일컬어 그는 '평범한 이들'이라고 통칭한다(세칭 '좋은 학교'를 나왔지만,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먼 나는 졸지에 '비범한 이들'에 속하게 됐다). 하긴, 과거 한 대통령이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칭한 적도 있으니 변호사가 자신을 우리사회의 '평범한 이들'로 분류한다고 해서 흠이 될 건 아니겠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나'란 에고(ego)나 '존재'는 그 속성상 깨달음이나 성스러움과는 같이할 수가 없다. '나'란 '존재'가 깨닫고 성인 되려는 것 자체가 '나의 확대'라는 더 고차원의 욕심일 터. 깨달으려, 성인되려 안달하지 말고 그저 내 옆의 보기 싫은 인간이며 밤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며 우리를 순식간에 빈털터리로 만드는 태풍과 어찌 화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필부필부인 내 주제에 맞는 일이지 싶다. 삼시 세 때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도 참 즐겁고 암수가 서로 어울려 구름과 비처럼 정을 나눔도 참 즐거운 일이다."

필자의 논리에 따르면, '평범한 이들'이란 '나'라는 '에고'를 포기하지 않는,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깨달음/성스러움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평범한 이들'이란 실상 고차원의 욕심에 들려 있는 위선적인 지식인들이니 성인들이니 하는 부류가 아니라 솔직담백하게 그저 저차원의 욕심이나 충족시켜가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위 (일반적으론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지도층'에 속하는 변호사께서 모기 걱정, 태풍 걱정 하시는 게 대국적인 견지에서인지(이 경우는 나름대로 '고차원' 아닌가?) 직접적인 생존과 관련하여서인지 의문스럽지만, 하여간에 '필부필부'의 소망은 가족들과 같이 식사하고 때로는 ('내 옆의 보기 싫은 인간'은 아닐) 여자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이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요지는 잘난 지식인들/성인들에 주눅들지 말고 우리는 그저 저차원적 욕심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자라는 것이겠다. 저들이 '욕심 내지 말고 살자'라고 꼬드기지만, 다 '고차원적 욕심'에 지나지 않는바, 괜히 도덕적인 자괴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다는 얘기. 어차피 인생은 생존투쟁이고 거기엔 선도 악도 없지 않은가. 그저 자식들 공부 잘하고 암수 서로 정다우면 장땡이다, 등등. '평범함 이들'에 대해서 좀 특이한 정의를 내리는 걸 제외하면(지식인/성자가 아니면 다 '평범한 이들'이다? 재벌이나 변호사나 노숙자나 노가다나?) 새삼스러운 건 아니므로 그러라고 해두자.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자. 교황이나 성철 스님 같은 성인들도 못 말릴 일을 어찌 말리겠는가?

게다가 고차원적인 걸 기대하지도 않으므로, 문학작품에 대한 '평범한 이'의 사소한 오독 또한 그냥 넘어갈 만한 문제이다. 하지만, '비범한 이'인 나로선 좀스럽게도 그런 거나 지적하고자 한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교훈소설을 썼다. 죽을 둥 살 둥 뛰어다녀 봤자 죽을 때는 제 관이 묻힐 한 평 땅밖에 못 가지니 욕심 부리지 마라. 이 이야기를 읽고는 '맞아, 욕심내지 말고 살아보자'고 다짐해 보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그 다짐은 하루도 못 간다." 일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교훈소설'이 아니다. 그냥 '우화적인 이야기'이다(그리고 초등학생들에게 적합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해가면서). '소설'이란 용어를 오지랖 넓게 사용한다는 점은 물론 필부필부다운 일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아니라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내용이다. 다 비슷비슷한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필부필부다운 태도이겠다.

아마도 필자는 톨스토이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을 듯하며, 그저 <지식인들의 두 얼굴>에서 얻은 귀동냥을 밑천삼아 (지난달에 국내에서 대규모 전시회까지 열렸던) 잘난 '톨스토이'도 별거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에 스스로 흡족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친 김에 ‘평범한 이들’의 저차원적 욕심을 적극적으로 옹호해보자는 발상이 들었는지도. 하지만, 심리학 개론에 나오는 기본적인 얘기지만, ‘평범한 이들’도 저차원의 욕심이 충족되면 곧 고차원의 욕심까지 품게 되는바, 그런 욕심의 확대 또한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영양 새끼를 갈가리 찢어먹는 사자 노릇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내가 굳이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란 ‘사자답지 않은’ 고민도 떠안게 되는 것이다(그런 고민을 무시하는 태도는 ‘평범한 이들’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에서 나온다).

성욕, 물욕, 명예욕에 평생 시달렸던 톨스토이이지만, 누구보다도 그러한 욕망과 절연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이도 톨스토이이다. 1910년 82세의 나이로 가출까지 감행하는(그래서 결국엔 객사하는) ‘노익장’은 그러한 자기부정의 안간힘에서 나왔을 법하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서 ‘위선’만을 읽는 건 자유이다(그걸 ‘평범한 이들’의 자유라고 옹호하는 것까지도). 그리고 그 자유는 그냥 다 톨스토이가 쓴 것인 만큼 대충 작품의 제목과 줄거리를 바꿔치기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자유와 상통한다. ‘농노’에 대한 계급주의적이고 차별적인 시각을 가졌던 위선적인 지주로 톨스토이를 이해하는 태도와도.

하지만,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로 아등바등할 시간을 조금만 쪼개서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나 <인생론>이라도 제대로 읽어보는 것은 어떨는지. 자기 자신의 에고를 넘어서 자신의 이웃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이 경우에는 사회적 기득권)에 한번쯤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 그토록 ‘비범한 일’이며 ‘성자(만)의 일’일까? 호랑이나 사자는 죽어 가죽을 남기겠지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 또한 (톨스토이의 말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예지이다. 해서, ‘평범한 동물’로서의 실존을 선택한 이들의 자기변호를 ‘평범한 인간들’의 그것으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건 보기에 흉하다(‘평범한 인간들’의 ‘상식’은 한 변호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귀하며 존엄하다).

05. 04. 25.

P.S. 이 기고문은 한겨레의 여론란에 실렸는데, ‘입바른 소리’들을 주로 해대는, 혹은 그런다고 자부하는 한겨레는 2000년 벽두부터 재테크에 관한(그 실내용이란 게 결국은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 등의 돈 굴리기인데) 특집기사를 실어 한 애독자를 등 돌리게 하더니(재테크와 자본주의 비판은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이젠 ‘평범한 인간들’과 ‘평범한 동물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젠 ‘평범한’이란 형용사마저도 조심스레 가려서 써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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