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나서 맥이 풀려 늘어져 있는 나를, 친구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집에 가야지, 거기서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버지가 모두 다른 명의 아이와 아직은 젊은 엄마가 세상을 살아내기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아니 전세계 어디서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싱글맘은 이웃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아이들 때문에 구하기도 쉽지 않고, 아이들은 또래들에게 왕따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먹고 사는 것도 문제다.

 

엄마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한다. “나도 행복하고 싶다 한다. 행복해야지,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런데 그런 엄마에게 ?”라고 반응하는 아이.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은, 어쩌면 하나 문젯거리의 등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싸하다. 아이는 행복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 정도?

 

아무리 일찍 철이 났다고 해도, 엄마없이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갈 있다고 해도, 아이는 아이다. 엄마없는 집에서 아키라와 동생들은 살아간다기보다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수도와 전기가 끊기면서 집안은 엉망으로 변하고, 엄마가 짧게 잘라주었던 사내 아이들의 머리는 지저분하게 자라난다. 세탁기를 돌리던 착한 교코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아키라가 입은 셔츠는 닳고 닳아 구멍이 늘어난다.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아이들은 눈물 방울 보이지 않는다. 건조한 눈동자로 세상을 보고, 엄마의 부재를 얘기하면서 실실 웃고, 수화기 너머로 다른 ()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영화는 선악을 말하지 않는다. 엄마를 마냥 욕하지도 않고 주위 어른들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다만 아이들이 와중에도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성장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셔츠의 구멍이 커질수록, 그것이 아이들의 가슴에 생긴 구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래고 해진 셔츠처럼 그들의 피가 탈색되어 희미해진 것은 아닐까, 심장이 너덜너덜해진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엄마는 행복할까. 이건 낳았으니까 책임져야 한다 라든가 엄마가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 주위 어른들이 아이들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다는 의미라고 했나. 출생신고도 하지 않고 집안에 꼭꼭 숨겨둔 아이들이 발견되지 않은 이곳이 일본이라서? ‘살아갈능력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 심지어 나는 살인이나 타살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실화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감독이 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보여주는 방식은, 다만, 관객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없는 상황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일본 사회의 이런 단면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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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4-1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정말 아이들 다 데리고 목욕탕 가서 때 벗기고 이발시키고
아래위로 옷 한벌씩 사입히고 식당 데려가 불고기 사주고 싶어
얼마나 혼났는지...영화 보면서 말이오.^^

2005-04-16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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