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dohyosae >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락크의 공통점
베트남 전쟁은 몇 가지 특수성 때문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어느 전쟁보다도 컸다. 그 특수성의 첫번째 요인은 전쟁의 동기에서 발생하였다. 베트남전쟁은 사회주의혁명과 반외세운동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한 북베트남과 베트민의 해방전쟁노선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전쟁을 미국의 제국주의와 베트남의 민족주의의 충돌로 몰고감으로서 영토의 확장과 점령보다는 점령지 주민의 지지획득에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이다. 이런 전쟁의 전략 때문에 전쟁은 군인들 간의 전투가 아니라 민간인들의 사상을 검증하는 절차로 전도되므로서 베트남 전역에서 비전투원인 민간인의 대량 살해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두번째는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기술적인 측면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세계 제일의 공업대국인 미국과 농업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던 북베트남간에 벌어짐으로서 한쪽의 일방적인 대량파괴가 필연적임을 시초부터 예고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민간인의 피해가 대량으로 벌어진 이유이다.
미국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퇴패하면서 베트남에 개입하게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투입한 신무기의 양은 엄청났다. 미국이 베트남에 사용한 신무기로는 정글과 농토를 다같이 황폐화시키는 고엽제, 동굴속의 적군을 몰아내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사용된 최류탄, 1분 이내에 축구장 크기의 면적에 1평방피트마다 총알을 한발씩 뿌려댈수 있는 발칸포, 사람이 밟아야만 터지게 되어있는 플라스틱 대인지뢰, 한발로 축구장 크기의 면적에 있는 동식물과 땅속의 지렁이까지 몰살시키는 1만5천파운드짜리 데이지커터 폭탄, 순전히 화재를 유발하기 위해 투하되는 5백파운드짜리 네이팜탄과 백린탄...
군부와 산업재벌로 결합된 <군산복합체>는 베트남 전장터를 군사적 강대국을 지향하는 미국의 신형무기 시험장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미국의 무기성능은 60년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신속한 개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미국은 1961년 베트남전에 개입하여 1972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비한 탄약의 량이 7백만톤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베트남에서 베트남 국민 일인당 5백파운드 폭탄이 한발꼴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탄약을 소비함으로서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래 보유해왔던 구식의 모든 포탄과 탄약을 모두 소비함으로서 새로운 무기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이렇게 많은 양의 탄약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집약적전술>에 기인한 것이었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면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그 지역을 초토화시킨 다음 근접지원공격과 적이 이용하는 일정지역 혹은 통로 및 총체적인 보급망에 대한 선택적인 공격을 가하는 교란작전을 병행하였다. 이런 작전의 의도는 미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였지만 효과는 거의 미약했다. 하지만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 작전을 고집하였고 이 결과 베트남은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전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교란작전을 시행할 때 화력개방지역, 보복공격, 피난유도폭격 등 세가지 작전 개념 아래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작전개념은 의심나는 지역은 민간인지역이라도 폭격할 수 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이런 전술이 비난을 받게되자 미군은 1965년부터 화력개방지역을 확정공격지역으로 고쳐 불렀다. 이 방법의 효과는 어떤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베트남 농촌의 인구가 위험을 피해 도시로 유입됨으로서 <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촉진되었다. 미군이 개입하기 전인 60년대 초 베트남 인구의 80-85%가 농촌에 거주하였지만 68년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인구의 40%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이런 도시집중율은 당시 선진국이었던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 캐나다, 그리고 당시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보다 높은 수치였다. 이것은 전쟁이 농업사회인 베트남을 어떻게 기형적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근대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베트남에서 인구의 도시집중은 농촌의 젊은이들을 특별한 기술이 없는 3차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도록 함으로서 도시의 슬럼화를 가속시켰다. 이렇게 슬럼화된 도시는 범죄와 게릴라들의 은신처로 활용됨으로서 베트남 전쟁은 전선이 없는 전장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미국은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전략촌>개념을 세워 농촌지역을 하나의 군사단위로 묶는 작업을 시행하였지만, 농촌지역에 고립된 전략촌은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손쉬운 공격목표가 됨으로서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결국 베트남전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은 도시와 도시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반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농촌을 장악하므로서 자유롭게 점령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전쟁에서 공중폭격과 포격을 받은 지역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과 밀림지대였다. 이는 미군이 도시공격을 자제한 것이 아니라 베트남 전역에서 도시다운 도시는 북의 하노이와 남의 사이공을 제외하면 전무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베트남에서 미군이 사용한 포탄의 반이 5백파운드급이었다. 그리고 이 포탄의 60%를 공군이 폭격용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포병에 의한 포사격이었다. 이 결과 베트남 전역에는 직경 9미터에 깊이 4.5미터가량되는 간이 수영장만한 구덩이들이 2천6백만개 이상이 생겨났다. 이는 베트남 전국토의 10%의 면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포탄이 터져 형성된 포탄구멍은 강력한 폭발로 인해 지표 아래 있던 토양을 끌어올리고 농업에 적합한 토양을 지표에 분산시킴으로서 농토의 자연스런 배수구조를 교란시키게 된다. 이런 인공 구조물은 제거될 때까지 농토를 개간할 수 없게한다. 결국 미군의 폭격으로 베트남 국토의 10%가 불모지로 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탄 구멍에 물이 고임으로서 각종 열대전염병의 온상이되어 베트남 국민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실제로 1972년 4월 26일 AFP통신은 하노이발 기사에서 북위 17도선 부근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살인모기가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미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은신처가 밀림지대인 까닭에 전쟁초기부터 오렌지 에이전트라고 불리운 고엽제를 대량으로 사용하였다. 미군은 고엽제를 적들이 은거하고 있는 베트남 정글에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고산족이 살고있는 북부와 서부의 농작물지대에도 무차별 살포하였다. 이는 적이 식량자원을 이용할 수 없도록한다는 취지에서 시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염된 농작물을 먹게된 고산족들은 60년대 후반부터 기형아 출산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기간동안 고엽제가 대략 1억파운드 이상이 6만제곱킬로미터-남한의 3분의 2-이상의 지역에 살포되었다고 보고있다. 이는 베트남 삼림의 35%가 한번 또는 그 이상 고엽제의 세례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결과 베트남은 30년간 사용할 수 있는 국내용 목재소비량을 충족시킬 수있는 산림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농토 역시 5천 6백 제곱킬로미터가 고엽제에 노출되었다. 특히 고엽제의 살포가 집중되었던 타이닌성에서는 기형아의 출산과 태아의 사산율이 높았다는 보고가 있으나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에 고엽제의 피해가 보고되자 미군은 고엽제 대신 대형 불도저를 동원하여 정글을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대략 7천 5백제곱킬로미터의 삼림이 파괴되었다. 미국은 전쟁을 빙자하여 한 국가의 경제하부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 결과 전쟁이 종식된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베트남의 자연피해는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늦게 베트남 전쟁을 거론하는 것은 미국이 지금 개입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 양상이 점점 월남전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무대가 밀림이 아니라 사막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지만 미국의 핵심 전략은 60년대에 베트남에서 기초한 개념에서 조금도 바뀐 것이 없음을 현실의 진행과정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인명의 살상에서 오는 피해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또 다른 이유에 의해 그 휴유증이 더 크게 증폭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전쟁의 가공함이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