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다시 책이다 - 미셸 투르니에와의 대화
<문화일보-다시책이다>
세계지성과의 대화-‘나와 책’(1)미셸 투르니에
전영선 기자 azulida@munhwa.co.kr
문화일보와 출판 6개 단체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독서캠페인‘다시 책이다’의 일환으로 인터뷰시리즈 ‘세계 지성과의 대화, 나와 책’을 격주로 게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 ▲독서를 통해 투옥생활을 지적자산 축적의 시기로 승화시킨 김대중 대통령, ▲일본의 세계적인 독서가저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로 큰 반향을 일으킨이자 저술가인 다치바나 다카시, ▲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세스 회원이며 공쿠르상 심사위원인 소설가 장 도르므송, ▲근대 일본 지식사회의 자랑으로 불리는 출판사 이와나미의 편집책임자 야마구치 아키오 순으로 진행된다.
이어서 구미 석학들의 책 이야기를 계속 게재할 예정이다. ‘세계 지성과의 대화, 나와 책’은 책과 함께 평생을 보내며, 책으로부터 삶을 보다 잘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책을 통해 역경을 헤쳐가는 지혜를 쌓은 세계적 지성인들의 생생한 체험을 직접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프랑스 파리 외곽, 생 레미 슈브뢰즈 역에서 내려 차로 15분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조그만 마을 슈와즐. 인구 100명 남짓한 이 마을에는 프랑스 문학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77)가 살고 있다. 지난달 19일 이곳을 찾았을 때 검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손수 운전해 역으로 마중나온 투르니에의 첫 인상은 ‘대문호’라기보다는 천진한 미소가 인상적인 이웃집 노인 같았다. 그는 이 조용한 시골마을에 있는 성당 사제관을 구입, 45년째 살고 있다. 전세계 수십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들, 독자가 보내준 아이를 안고 있는 성인상과 그림들로 꾸며진 집안을 보여주며 그는 자신의 집이 ‘슈와즐 1번지’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직접 내온 밀크티를 앞에 두고 책과 문학에 대해 약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투르니에는 문화일보에서 3월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출판 관련 6개 단체와 공동으로 전개하는 독서캠페인 ‘다시 책이다’에 대해 깊은 흥미를 보이며, 책과 관련된 자신의 추억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투르니에:책?…내겐 책과 관련된 아주 아름다운 경험이 하나 있다. 1981년 12월 어느날 편지를 하나 받았다. 파리의 국립시각장애인학교에서 온 편지였다. 글자를 자동인식해 점자로 인쇄하는 기계를 마련했는데, 첫 책으로 내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교장은 내가 직접 가서 책을 아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다. 난 기꺼이 학교를 방문해 점자책을 직접 나눠줬다. 그런데 보통 책을 주면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면서 받는데, 이 아이들은 점자로 된 내 책을 받아들고 하늘을 보며 손으로 책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책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아이들에게 책은 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책은 하늘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최근엔 어떤 책을 보고 계시는지.
투르니에:지난 며칠간 어린이 책을 자세하게 읽고 있었다. 알퐁스 도데의 고향, 퐁 빌(Pont Ville)에서 매년 열리는 어린이 도서전의 심사를 맡아 동화책들을 보고 있었다. 요즘 어린이 책은 한마디로, 슬프고 끔찍하다. 지금 보는 책은 ‘제쥐 베츠’(Jesus Betz)라는 책인데 팔·다리 없이 태어난 아이가 여러 어려움 끝에 노래하는 법을 배운 후 서커스에서 곡예를 하는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어휴, 너무 슬프지만 또 아름답기도 하다.
이건 늑대에 먹혀버린 아이들 이야기다. 고민 끝에 5권을 골랐다. 하나같이 슬픈 얘기들 뿐이다.
―어린이 책에 특별히 애착이 많은 것 같다.
투르니에: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조건은 단순·명확·간결함이다. 원래 내 작품들은 어린이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단순·명확·간결을 추구하다 보니 어린이들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됐다. 어린이를 위한 책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해저 2만마일’의 작가 쥘 베른, ‘푸른 수염’의 작가 찰스 페로가 어린이를 겨냥해 이야기를 썼겠는가. 그들의 문체가 단순하고 간결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된 것이다. 내 작품도 그랬으면 좋겠다.
―현재 어떤 작품을 쓰고 있는지.
투르니에:‘팜피르’. 뱀파이어의 이야기다. 난 ‘방드르디…’처럼 이미 작가들이 수없이 써온 주제를 다시 다루는 것을 좋아한다. 이 소설이 마지막 흡혈귀 소설이 됐으면 좋겠다. 수년 전부터 흡혈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는데 요즘은 힘들다. 난 상상력이 아닌 ‘다리로 쓰는 작가’다. 흡혈귀에 대해 쓰기 위해서는 유명한 묘지도 다녀야 하고, 성당도 여러군데 돌아다녀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다리에 문제가 많아서 못다니고 있다.
투르니에는 “흡혈귀 이야기가 좀처럼 진행이 안돼서 그동안 다른 작품을 써버렸다”고 전했다. 젊었을 때 여행하면서 쓴 노트 30여권 중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골라 정리했다는 것. ‘주르날 엑스티므’ (Journal Extime, 일기 Journal Intime의 반대말로 말장난)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에세이집은 내년 1월에 출판될 예정이다. 투르니에는 타자로 깔끔하게 친 원고를 읽어줬다. 노작가는 낭독중 점점 흥이 나는듯 목소리는 조용한 사제관에 쩌렁 쩌렁 울려퍼질만큼 커졌다.
―책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투르니에: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교수 자격증을 따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소설로라도 철학을 하고 싶었다. 나는 ‘테이블 밑의 철학자’ ‘밀수 철학자’이다. 문학을 통해, 밀수하듯 철학을 하는 것이다. 내 작품에 신화와 철학적 사색이 들어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내 문학의 원천은 철학이다. 그래서 내게 책은 곧 철학이다. 철학이 없는 책은 흥미가 없다.
―한국의 한 유명작가는 “난 곧 글쓰기 무형 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될 것 같다”라는 자조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문인들의 위기감을 반영하는 것인데, 프랑스에는 문학의 위기, 혹은 책의 종말에 대한 위기감이 덜한 것 같다. 이유가 뭔가.
투르니에:프랑스는 작가가 대단히 존경받는 사회다. 미테랑 대통령은 나를 세 번 찾아왔는데, 내가 훌륭해서라기보다는 작가와 교류하는 수준있는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왔을 것이다. 정치인도 소설을 한편 정도 써야 좀 수준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작가가 존경받는 사회이기 때문에 위기감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독자가 감소하지 않았는가.
투르니에:그런가. 난 잘 모르겠다. 내 소설은 여전히 잘 팔린다 (웃음). 소설출판량도 굉장히 증가했다. 대체 왜 위기라는 것인지.
―인터넷·영상미디어의 발전으로 책이 사라지리라는 전망도 나오는데….
투르니에:영향이 전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책 한권보다 간결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더군다나 50여년 전에는 굉장히 비쌌던 책이 인쇄술의 발달로 이제는 아주 저렴해졌다.
투르니에는 인터뷰를 마친 후 기자에게 어린이용으로 개작된 ‘방드르디…’한권을 건넸다. 다시 생 레미 슈브뢰즈 역까지 태워다 주며그는 매년 근처 호수로 찾아온다는 오리 이야기에서 근처에 사는 아들(그는 독신이지만 양자가 있다) 부부 이야기까지 쉬지 않고 들려줬다. 책의 미래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그는 “책보다 간단한 것은 없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단순·명확·간결함을 최고로 꼽는 작가다운 ‘위로’였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미셸 투르니에는 43세 되던 67년 첫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민음사)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적지않은 나이에 소설가로 나선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했으며, 두번째 소설 ‘마왕’(지학사)으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만 400만부 넘게 팔렸으며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읽어야 하는 고전이라고 말해지는 ‘방드르디…’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작품. 현대사상의 붕괴,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은 책이다.
투르니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교수자격 시험에서 실패, 철학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소설가가 됐다고 인터뷰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소설로 못다한 철학공부를 풀어내고 있다고 한다. 작고한 철학자 질 들뢰즈와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현재 프랑스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출판사 갈리마르의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위의 두 작품 외에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북라인) ‘짧은 이야기, 긴 침묵’(현대문학), ‘예찬’(현대문학북스) 등의 투르니에의 산문집이 번역 출간됐다.
<출처 : 문화일보, 200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