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미디어 테러리즘" : 미디어는 우리에게 어떤 폭력을 가하는가?
[지상중계] 미디어테러리즘과 미국테러사건 보도의 문제점
"미디어 테러리즘" :
미디어는 우리에게 어떤 폭력을 가하는가?
원용진(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 미디어 폭력
"미디어가 테러를 저지른다?" 어째 맞지 않은 용어의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테러리즘이란 용어가 흔하게 사용되는 탓에 큰 고민없이 "미디어가 저지르는 폭력 일반들"을 미디어 테러리즘이라 이름지은 것이라 짐작해본다. 하지만 테러, 테러리즘을 특정 집단이 일방적으로 개념 규정짓고 퍼뜨리고 있음에 비추어 이 용어의 사용은 좀 더 엄격히 이뤄져야 할 것 같다. 그 엄격함을 적용시켜 볼 때 포럼의 제목인 "미디어 테러리즘"은 미디어의 폭력을 더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전술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글의 본문에서는 테러리즘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폭력에 주목하여 "미디어 폭력"으로 규정하고 혼용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미디어 테러리즘"에 대한 정확한 의미 규정이 없더라도 미디어가 저지르는 폭력을 유형별로 정리해 그것을 폭력으로까지 감지하지 못했음을 자성해보고, 미디어 폭력의 극복을 정리해보는 수순으로 이 글이 정리되고 있음을 이해하면 되겠다.
미디어가 저지르는 폭력을 두고 "상징적 폭력"이라는 용어로 풀이하는 시도가 있어 왔다. 상징 활용의 장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다툼. 그 장소, 그 현장에서 언제나 이기는 편에 서 있거나 기꺼이 이기는 편의 전사가 되어 직접 나서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두고 '상징적 폭력'이라고 부르고자 했다 (원래 이 용어는 부르디외가 제안하였다). 하지만 미디어가 저지르는 폭력은 상징적 폭력으로만 제한되지는 않는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도 미디어에 의해 이뤄지기도 한다. 지속된 폭력에 의해 형성된 권력을 믿고 벌이는 미디어 관행으로 인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 같은 폭력들은 이미 권력이 되어 버린 미디어 탓에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 미디어가 자신의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매우 재밌는 현상인데 미디어 자신이 행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둔감하지만, 자신에게 가해지는 제재는 '언론 압살' '언론 고사' '폭거' 등으로 공론화시키는 등 부풀려서 피해자임을 알린다). 미디어 폭력에는 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형도 존재한다. 우리가 전혀 폭력이라고 생각지 못할 것들, 심지어는 미디어가 그런 일을 행하랴며 의심하던 것들, 그와 같은 폭력들도 존재한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우리 인간 주체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이처럼 미디어가 행하는 폭력은 물리적 폭력, 상징적 폭력, 그리고 비가시적이며 비인지적 폭력 등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겠다.
폭력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이면에는 미디어 폭력을 감지해내지 못하는 혹은 미디어 폭력에 환호하기도 하는 사회의 협조가 숨겨져 있다. 닐 포스트만은 이 같은 현상을 두고 세기말의 대장장이를 예로 든다. 대장장이들은 자동차를 찬양했으며 자동차 산업이 자신들의 산업을 번창시켜 주리라 믿었다고 한다. 자동차는 대장장이의 일을 케케묵은 퇴물로 바꾸어버렸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대장장이들은 자신들의 직업이 퇴물로 변하는 과정에서 환호하고 있었다는 그 아이러니. 미디어 산업이 새로움이라며 제공하는 것에 환호하는 사이 그 새로움으로 인해 밀려난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깨닫거나 혹은 아직도 그것을 폭력적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폭력에의 사회적 동의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미디어 폭력은 재생산될 수 없는 셈이다.
미디어 폭력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그 재생산 과정에 사회의 동의가 수반되어 있음을 문제 로 설정하고 있는 본 셈이다. 이 같은 문제 설정(problematics)은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미디어 폭력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 하나. 그리고 그 재생산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사회의 동의를 단절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 미디어 폭력의 심연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미디어 폭력의 기반은 무엇일까를 논의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글은 거기에까지 손을 뻗치지는 않을 작정이다. 논의의 폭이 한없이 커지고 감당해낼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탓이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을 회피하고 미디어 폭력 현상을 논의하고 그것의 단절을 위해 사회적 동의의 중지를 논의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기술적인(descriptive) 논의에 지나지 않는다. 미디어 폭력을 근원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한 글인 셈이다.
굳이 변명을 한다면 미디어 폭력의 근원에 대한 설명이 아예 회피되지는 않을 것임을 밝힐 수는 있겠다. 미디어 폭력 유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미디어 폭력의 근원을 잠깐씩 언급하면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과의 관계나, 오랜 작업 과정에서 형성된 관행(rituals), 그리고 미디어 문화 그리고 그것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폭력의 근원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여전히 여기에도 포함되지 않은 미디어 폭력, 미디어 테러리즘의 근원에 대한 논의는 포럼의 패널들에게 부탁드리고자 한다).
2. 미디어 폭력의 유형들
미디어 폭력의 유형들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이미 미디어 관련 연구들에서 논의해왔던 것들을 종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같은 연구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밝혀 둘 필요가 있겠다. 미디어 폭력을 좁게 파악하거나 미디어가 낼 가시적 사회 효과를 폭력적인 면으로 파악한 연구들이 많았다. 이 글에서는 가시적인 면, 비 가시적인 면, 누적되어 효력을 드러내기에 감지하기 어려운 면, 전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면 등을 드러내고 분류하고 있다. 폭력적이지 않은 부분까지 부풀려서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여 '폭력적 글쓰기'를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겠다. 특히 미디어 종사자들은 그같은 볼멘 목소리를 낼 공산이 크다. 도대체 미디어 폭력이라는 그 큰 범주를 비켜가기 위해서 미디어는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현재로서는 그에 대해 뚜렷한 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미디어 폭력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폭을 넓히는 비평작업, 그리고 미디어 내부의 종사자들이 자신의 장(champ)이 폭력을 휘두르게끔 구조화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내부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비판의 날을 세우는 작업, 미디어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는 시민적 인프라의 구축 등등이 미디어 폭력을 줄이거나 제어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잠정적 결론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미디어 폭력이라는 존재가 가시적, 비가시적, 비인지적 형태로 펼쳐져 있기에 그에 대한 대응 또한 "온 사회가 다 요청된다(It takes a whole society)"는 총체적 전략이 필요하다. 미디어 내부는 미디어 내부에서 행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노력을 경주해야 함은 물론이다. 더 나아가 미디어 외부와의 연계도 구상해둘 필요가 있다.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노력만으로 이루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사안이기 때문이다.
1) 진리에의 폭력
미디어는 매우 한정되고 왜곡된 장(champ)을 형성하고 있다. 자본과 정치권력 그리고 제국(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이 상호 교차되어 형성된 장안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TC 사건을 보도하고 해석하는 방식도 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폭력을 수반한 테러를 보도한 것을 두고 미디어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닐까 하고 갸웃할 수도 있다. 한정되고 왜곡된 장인 미디어는 그 자신이 만들어내는 내용을 사회가 고스란히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자신의 해석이 곧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임에 틀림없고, 그에 대한 이의가 없음을 강조한다. 간혹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은 채 빌린 지식인의 말도 진리로 접수할 것을 권유한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진리는 자신이 특정한 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진리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터무니없이 왜곡된 진리일 수도 있다. 자신의 장에 맞추어 선택된 진리의 전도사나 지식인들도 부족함과 왜곡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 진리는 진리의 다양한 측면들을 제어하는 효과를 갖게 된다. 미디어 바깥, 바깥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셈이다. 반복되는 미디어 구성 진리의 설파는 미디어 진리만이 진리로 등극하게 만든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행위들은 그것이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임을 강조해내고 이상(ideals)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미디어를 통한 토론이 그 정확한 예다. 우리는 토론이 어떤 형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토론을 행하길 요청받으면 어김없이 미디어가 수행해내는 토론을 흉내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이상적 토론의 기준이 되는 셈이다. 과연 토론은 그런 식으로만 이뤄져야 하는 것일까. 민주주의에 대한 진리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미디어 정치가 항상 중심이 된다. 대통령 후보들을 앉혀놓고 이러저러한 질문을 하며 자질을 검증하는 것. 미디어는 그것을 가장 효율적인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유사 토론, 유사 민주주의가 진리로 등극할 확률은 매우 높다. 미디어의 반복, 재반복 전술에 힘입기 때문이다. 그 외의 대안들은 미디어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진리의 영역에서 토론의 대상으로 대접받지도 못한다. 서너 시간을 잡아서 개념 규정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입장을 말하고, 그에 기반해 질문, 응답하자는 토론 후보자는 미디어에 의해 결코 선택될 수 없다. 미디어의 입장으로서는 비효율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오던 관행을 깨뜨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미디어의 관행에 익숙해 있던 수용자들도 새로운 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미디어 읽기라는 문화자본을 쉽게 수정하거나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혹은 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공산이 크다. 미디어 진리가 진리의 황제로 등극할 이유는 이래저래 흩어져 있는 셈이다.
미디어의 진리 독점을 폭력이라고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분명히 있다. 미디어의 진리 독점은 진리를 둘러싼 경쟁으로 확보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배제와 위장 전술이 숨겨져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미디어가 표명할 수 있는 한계는 미디어가 어떤 장에 놓여 있는가에 따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디어는 자신의 장, 자신의 한계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위장 전술인 셈이다. 위장막을 한 미디어는 자신의 위장을 폭로할 수 있는 계기나, 발언자는 용의주도하게 배제해낸다. 이는 미디어 바깥에 대한 폭력이다. 자신의 진리를 닮지 않으면 진리로 통하지 않게 힘을 행사하는 일이다. 현택수가 텔레페서를 공격하고 그들이 곧 미디어의 힘에 업혀 폴리페서로 전환하게 된다고 본 것은 정확한 지적이며 미디어의 폭력이 사회에 미칠 부정적 영향력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2) 저항에 대한 폭력
미디어는 자신의 바깥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기운들을 사소화 혹은 왜소화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 우리는 흔히 미디어를 통하면 진지한 내용도 위축된다고들 우려하면서 미디어 하드웨어에 내재된 속성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장기 지속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하드웨어적인 측면이라기 보다는 미디어의 의도 탓인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된다. 물론 미디어는 미디어 바깥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기운을 소개하고 그것을 대중화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원치 않았던 결과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사소화 혹은 왜소화시킬 의도가 없었는데도 사회가 미디어의 의도를 잘 못 받아들여서 그런 결과를 초래하였다며 책임을 미디어 바깥으로 밀어 붙이는데 매우 익숙해 있는 미디어를 본다.
미디어가 독점하고 있는 힘에 대한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이뤄진다. 거대 미디어 조직이 행할 수 없는 부분들을 순발력 있게 찾아 나서기도 하고 그들의 제작 문법을 깨는 작업들도 이뤄진다. 90년대 중반 들어 시작된 VJ(video journalist)가 그 정확한 예가 되겠다. 애초 VJ는 거대 미디어 바깥에서 미디어가 다루지 못하던 부분을 미디어가 행할 수 없는 제작적 코드로 제작을 행하자는 일종의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디어 바깥에서 미디어를 대당으로 벌인 운동인 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의 모습으로서 VJ는 사라지고 미디어의 한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도 상당한 시청률을 자랑하는 장르로 말이다. 미디어는 자신들에 부가된 외주 제작 비율을 채우는 한편, 독립 영상 제작자가 만드는 참신한 영상을 소개한다는 공익적 명분까지 내세우며 시청률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참신하게 보이던 애초의 VJ 제작 코드도 미디어 장르가 되면서 기존의 제작 코드로 포섭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미디어가 제작하지 않은 부분을 용납하지 않으며, 미디어 제작 코드 외엔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가 발동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 미디어가 개입되어야 하고, 미디어 코드만이 허용되어야 하는 이 부분을 두고 미디어가 폭력을 행했다는 지적은 당연해 보인다. 제작 코드의 진리를 자신이 담당해야 하고, 자신의 개입이 없는 외부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일종의 문화 독점 선언이다.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구겨 넣어 버리는 일. 그러면서도 사회를 위해 기회를 열어 놓았노라며 펼치는 서비스 담론. 저항을 자신의 품안으로 바짝 끌어들여 저항력을 무화시키는 것 뿐 아니라 저항마저도 포함한다며 자신의 포용력을 과시하는 미디어는 저항에 두 번의 폭력을 가하는 셈이다.
3) 현실에 대한 폭력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음을 미디어는 자랑한다. 미디어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그 자랑을 구두선에 그치지 않게 만들어준다. 야간에도 대낮같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최첨단 무기의 군인들처럼 미디어는 기술을 앞세워서 모든 것을 보고, 보여주고 있다. 나노 테크노놀러지에 기반한 공군의 폭격 장면, 명중시키는 장면, 지하 깊숙히 숨겨진 게릴라들의 몇 겹의 동굴까지 파고들어가는 폭탄의 위력. 혹 그런 장면들을 놓치기라도 하면 예외없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연해버린다. 보여주지 못할 것이 없음을 미디어는 그렇게 뻐기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미디어 기술 앞에서 노출시켜 버리는 그 힘은 전혀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낸다. 인간을 기술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눈은 미사일에 달린 렌즈가 되게 하고, 인간의 손은 조종간의 스틱과 동일시되게 만든다. 인간이 기술에 매달리고, 기술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도 마치 기술을 조절하고, 조정하는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인간 주체가 기술이 되게끔 하는 미디어 행위를 왜 폭력이라고 부르는가? 그 용어 사용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기술이나 과학은 세상의 숨겨진 차원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차원을 밝혀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심층 구조가 그것이다. 미디어는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주지시키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자 한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심층 구조는 미디어에서 항상 예외적인 존재가 되고 말뿐이다. 사회 성원의 고통은 당장 그 성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몇몇 사건들, 보여줄 수 있는 것에 국한되어 설명될 뿐, 사회가 그 성원을 고통으로 몰고 있다는 사실을 사상시킨다. 그래서 언제나 미디어 기술 앞에 걸려든 사건이나 인간은 단편적이고, 짧은 역사로만 설명된다. 뻔히 눈에 보이는 인과관계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미디어가 다루고자 하는 환경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디어에 포착되는 환경은 미디어의 환경 뉴스 가치에 입각해서만 구성된다. 환경과 관련해서 미디어가 갖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시각적인 것이다. 시각화되지 않는 환경은 결코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장기지속으로 인한 환경 위기 등은 미디어에 의해 포착될 수가 없다. 작은 미생물까지도 포착해내면서도 뻔히 보이는 환경 위기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모습. 그 모습은 개선시킬 수 있는 환경을 내버려두는 방관이란 점에서 환경에 가해지는 폭력을 거드는 격이 된다.
미디어의 즉물주의적 성격은 기술, 과학 맹신의 주체를 만들 수도 있다. WTC 사건 이후 미국의 많은 청년들이 '테러 보복'을 위해 군 입대를 자원했거나 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쟁을 혹 미디어적으로 사고하고 있지는 않을까. 미디어 속의 미국 군인들은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사이보그에 가깝게 기술, 과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하는 전쟁은 모든 것은 훤히 들여다보고 벌이는 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자신들의 목숨은 완벽할 정도로 보장받는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전쟁에서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이나, 미국에 대한 증오의 깊이 등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쟁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그들에게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하는 것일 뿐, 전쟁의 이유에 대해, 전쟁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같은 유형의 인간 주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미디어는 결코 비켜서 있지 않다.
보이는 것에의 집착은 보이진 않지만 인간을 병들게 만들 여러 요소들을 망각케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기술에 동일시 하게금 만들기도 한다. 인간 고통의 책임을 개개인에 전가하고, 인간이 빠진 전쟁을 구성해내고, 장기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생태 위기를 외면하는 미디어를 두고 폭력적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뻔히 존재함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자신이 정한 시각에 포착되는 것만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미디어는 현실 자체에 폭력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4) 소수자(minority)에 대한 폭력
미디어 폭력 중에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는 상징적 폭력이 소수자 재현과 관련된 것이다. 여성, 동성애자, 소수 인종, 소수 민족, 노인 등에 대한 재현이 왜곡되거나 정형화된 형태로 드러난다는 지적이다. 소수자에 대한 미디어 재현을 폭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재현으로 그치지 않고 미디어 바깥에서의 생활에서의 불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재현된 이미지는 미디어 사건으로 마감되지 않고 일상 생활로 옮겨져 미디어 안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대접이 발생하게 된다.
미디어는 자신들의 폭력을 두고 사회의 반영일 뿐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소수자들이 생활에서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를 그릴 뿐 특별히 왜곡시키는 작업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셈이다. 이 같은 변명과 강변 속에는 현 사회는 옳으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사회의 변화나, 소수자-다수자 관계 변화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권력 지형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 입장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반영만을 주장한다면 미디어가 늘 내세우는 사회의 발전, 계몽 등의 역할을 행하지 않음을 자인하고 만 꼴이 된다. 재현을 통한 미디어 폭력은 미디어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바로미터가 되는 사안임에 틀림없다. 재현을 통한 미디어 폭력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지금의 미디어 상황은 곧 미디어가 폭력을 행하는 사회적 역할에만 몰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소수자에 대한 폭력은 재현으로만 그치진 않는다. 소수자가 의미 있는 구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며 미디어는 그들을 자신들의 담론 장에서 소외시킨다. 그들을 위한 미디어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는 계급, 연령, 인종, 민족, 성별, 거주지역 등을 나누어 서비스를 차별하는 폭력을 행하고 있다. 소수자들로 보아서는 자신들이 즐길 수 있지 않은 미디어 서비스 속에서 자신들이 왜곡조차 되고 있는 셈이니 이 또한 이중적 질곡일 수밖에 없다. 만약 소수자들이 다수자들을 위한 미디어를 보고 환호하고 동의를 보내고 있다면 미디어를 통해서 소수자들은 3번의 고통을 맛보는 셈이다. 그들을 왜곡시킴으로써 생기는 고통, 미디어로부터 소외되는 고통, 그리고 소수자를 위한 새로운 전망이 전혀 수립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고통. 어쩌면 지금 미디어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소수자 서비스가 그 같은 3중적 고통을 선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5) 물리적 폭력
미디어의 물리적 폭력은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된다.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 등이 그것이다. 법적 대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미디어가 누리는 권리 탓에 많은 부분 미디어는 관행으로 행하는 경우가 잦다. 자신의 권력을 과신하는 탓이다. 미디어의 법적 책임은 - 예방 메카니즘이 충분치 않은 탓에 - 항상 사후에 묻게 되어 있다. 이른바 경보 체제가 느슨하게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미디어에 의해 포착된 사건은 법적 책임으로도 되물리기 힘든 상처를 입는다. 얼마 전에 있었던 포르말린 사건이 그 적확한 예다. 미디어가 과학적 검증도 그치지 않은 채 - 검찰의 발표만을 믿은 채 - 한 식품회사를 공격했지만 이후 유해식품이 아니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미 식품회사는 결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받아 문을 닫았다. 미디어에 법적 책임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미디어 폭력에 의해 입은 상처는 원상복구되기 힘들다.
미디어는 이 같은 물리적 폭력을 두고 결코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강변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공적 기관에서 발표한 내용을 옮기는 것은 사회적 공기로서 해야할 일을 할 뿐, 결코 법적 책임을 질 행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디어의 그 같은 강변은 설득력이 없다. 검찰 등과 같은 공적 기관의 발표를 검증하고, 확인해야 하는 책임이 면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대변인을 내세워 '설(說)'을 흘림에도 확인하지 않은 채 사회에 펼쳐낸다면 그것은 언어를 통한 정치적 폭력에 가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권력의 폭력, 정치적 폭력에 편승할 여지가 언제든 있다는 사실조차 무시하고 질주해대는 미디어를 두고 어찌 물리적 폭력의 가담자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6) 폭력의 도구
미디어는 이 같은 폭력들을 이미 공학화된(engineered) 도구들로 수행해낸다. 주어진 주제를 말끔하게 정지 작업하는 도구(priming), 정지 작업된 것들을 기반으로 옆으로 샐 수 있는 빈틈을 전혀 주지 않는 도구(framing), 짧은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stcok character), 이미 배양된 수용 틀에 맞추는 도구(schemata), 결코 의문 품지 않거나 놀라게 하지 않는 도구 (narrative), 도구를 사용법 (convention) 등등을 동원해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이 직시해야 할 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realism). 그 안에서 미디어가 행하는 폭력을 쉽게 감지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미디어 폭력에 동참하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호하고 박수를 보낸다.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노 테크놀러지로 미사일이 날아가는 순간 우리의 눈은 미사일 머리에 붙에 렌즈가 되고, 우리의 손은 조이스틱 놀리듯 조종사의 손이 된다. 그리고 미디어가 외치는 'bingo' 'bingo' 'touch down'의 환호 속에 자랑스러운 테크놀러지의 몸, 제국의 몸이 되고 만다. 내 몸에 들어온 제국, 테크놀러지. 미디어가 행한 폭력 탓에 만들어진 예상치 못했던 우리의 몸이다. 원치 않은 몸이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게끔 몸 만들기는 누적되어 왔다. 미디어는 다양한 폭력의 도구, 테크닉으로 우리의 몸을 그렇게 구성해냈다. 미디어와 한 몸이 되기를 꿈꾸며 우리를 몰아왔던 셈이다.
아직 우리 몸 속에 미디어 폭력 이전의 기억들이 남아 있었던 탓일까? 어떤 몸들은 피곤 혹은 전율을 느끼며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몸을 다시 추스릴 시기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무차별 폭력당한 몸을 추스리고 새로운 몸만들기로 돌입하지 않는 한 다시 우리의 몸은 폭력의 대상이 되어 어떤 몸으로 바뀔 지 모르는 운명이다. 위기의 몸을 인식해내야 하는 시기. 지금 우리는 그 시기를 맞고 있다. 어떻게 가능할까? 나노 테크놀러지까지 동원된 미디어 폭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이론적 낙망 보다 의지에 찬 실천이 더 앞서야 할 시기인 것 같다. 몸 속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기억들을 추스려 낼 방식들을 조금씩 시도해보는 일이 필요한 때다.
3. 근절을 위한 노력들
미디어 폭력의 근원을 보는 관점들은 여러 가지다. 미디어의 실수에 의한 것이라고 보며 그 실수를 줄일 수 있는 법제의 개선을 주장하는 논의도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미디어는 그 속성상 미디어 폭력을 저지를 수밖에 없으므로 사회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개선은 어렵다고 보는 관점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 조직 관행으로부터 비롯되는 미디어 폭력이 많으므로 미디어 조직 문화를 바꾸어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어느 편도 자신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들의 개선으로 일괴암적으로 미디어 폭력이 현격하게 줄어들거나 사라지게 될 거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따로 또 같이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데 동의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따로 또 같이 변화가 이뤄지게 하는데는 어떤 자극이 필요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일이 당연히 요청된다. 미디어 자체가 개과천선하리라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내부적 자극은 논외로 해두자.
지금으로선 미약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자극으로는 미디어 바깥에서 미디어를 수용해왔던 이들의 변화를 들 수 있겠다. 이는 계몽적인 논지에 의해서 수용했던 이들이 작심을 하게 되는 급진적인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디어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기회, 경험들이 늘어나게 하는 작업, 스스로 미디어가 되게 하는 작업 등 장기적이고 매우 느린 작업을 의미한다. 이미 미디어를 수용하는 이들은 수동적이지 않다는 논의가 백방으로 펼쳐져 있고, 심지어는 수용자가 능동적이니 미디어에 대해 너무 지나친 걱정을 하지 말라는 '엉뚱한' 일들도 목도된다. 수용자의 능동성은 일종의 잠재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주체가 그 잠재태를 가능태로 바꾸는가 하는 일에 논의의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들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밝히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잠재된 능동성을 동원할 수 있는 테크닉이 고민되어야 하고, 그 정합성이 모색되어야 하며,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정책적 개입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이미 밝혀진 능동성을 부추기는 일이 될 것이고, 미디어 폭력에 대해 깨닫게 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미디어 스스로가 폭력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하는 자극이 된다.
미디어 폭력 근절, 미디어 개혁의 과제를 수용자에게 밀어 버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제는 단순히 수용자에게만 주어지진 않는다. 미디어 폭력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전하고, 그것이 체화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제도를 만드는 일은 온 사회가 다 필요한 일이다. 특히 사회 운동,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운동은 미디어 폭력이 파생시킬 수 있는 사회적 효과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미디어는 미디어 운동을 벌이는 단체들만의 몫이 될 수는 없다. 미디어를 활용하겠다며 미디어 폭력을 외면하는 환경 운동 단체가 있다고 하자. 미디어는 일시적인 환경 위기적 사건을 다룰 지언정 환경 운동 단체가 그렇게 갈구하는 생태인 주체를 만들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economy)를 먼저 앞세워 환경(ecology)을 뒤로 할 경향이 짙다.
잠재태인 수용자들이 아직까지 공적 영역으로 나서지 않은 채 여전히 잠재태에만 머무는 이유는 많다. 공적 영역이 결코 공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조차 여전히 사적 관계가 가장 큰 힘을 작동하는 것을 목도한 이상, 공적 영역으로 나설 이유가 없다. 잠재태를 가능태로 바꾸는 일은 이 같은 공적 영역을 합리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수행되지 않으면 수용자들의 능동성은 언제나 이론적 능동성으로 머물고 말 것이다. 미디어를 개혁하는 일, 그것이 바로 공적 영역을 합리화하는 일이 되겠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공적 영역의 장(champ)이 어떤 영향력 안에 놓여 있는지를 아는 한 그에 많은 기대를 할 수는 없다. 공적 영역을 합리화하는 일에 앞선 조금 더 쉬운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이미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 한 예를 들어보자. 1999년 신자유주의의 확장에 반대하는 전지구적 연대의 상징으로 시애틀에서 전세계 NGO와 민중들의 연대 시위가 있었다. 세계 각 국에서 모여든 85,000명 이상의 활동가들이 초국적 기업과 WTO 각료회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애틀 시위에서 400명 이상의 미디어 활동가들과 비디오 저널리스트들이 활약을 벌였고 이들이 제공한 컨텐츠들은 곧 바로 각종 지역 주민자치 매체들(텔리비젼, 라디오, 인터넷 방송)에 의해서 전국으로 전 세계적으로 송출되었다, 이미 시애틀 시위가 있기 몇 달 전부터 시애틀 지역의 주민자치 매체들과 미디어 활동가들은 '독립 미디어 센터(Independent Media Center)'를 구축하여 그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막상 시위가 시작되자 시드니에 근거를 둔 미디어 센터의 웹사이트는 엄청난 속도로 업데이트되면서 주중에는 100만명 이상이 홈페이지를 방문해 시애틀의 소식들을 접했다. 지역 주민자치 매체, 비디오 활동가, 인터넷 등이 혼효되어 시시각각 시위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른바 비디오와 인터넷을 통한 세계적 네트웍 형성의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 같은 매체적 상황을 접한 지역 운동가와 영상 운동가들은 지역 미디어 운동을 새로운 전기로 삼을 수 있는 중요한 기제로 파악하고 지역 미디어 센터 설립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지역 미디어 센터는 대중들이 이미 영상 매체들에 친숙해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 매체를 통한 표현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영상 매체를 통한 지역 문화의 형성을 꾀하기 위해 구상한 것이다. 지역 미디어 센터를 설립해 영상을 제작해낼 수 있는 리터러시를 개발하고, 지역 미디어 센터에 설치될 서버를 통해 인터넷으로 영상을 송출해 명실상부한 지역의 문화적 포럼 역할을 해내게 한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구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이들은 지역 미디어 센터 설치법을 입법 청원한 바 있는데 그 근간이 되는 권리를 문화권(right to culture)으로 내세웠다. 문화권이란 수혜적 의미인 문화복지권과는 차이가 있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권리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커뮤니케이션 권리는 기존 매체를 차별없이 수용할 수 있는, 누구나 보편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보편적 서비스(common service)권과 기존 매체를 통해 자신을 알릴 수 있는 퍼블릭 액세스(public access)권으로 나뉘어 설명되어 왔다. 제 3세대 인권으로 불리우는 커뮤니케이션권은 보편적 서비스권과 퍼블릭 액세권을 포괄하며 시민이 스스로 매체를 운용하며 자신을 표현할 권리로 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이는 적극적인 참여권이며 스스로 지역문화와 대중문화를 만들어가는 권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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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미디어를 접하고 문화적 내용을 접한 대중들은 수동적으로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대중문화적 내용들을 제작할 욕망을 지녀왔다. 전혀 새로운 감수성을 키워온 것이다. 하지만 이 감수성들은 문화상품의 생산을 위한 제도들과 접목되기는 했지만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 국가 등에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내는 것에 접목되지는 못했다. 디지털 기술의 진전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감수성이 전혀 새로운 프로젝트에 접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지역 미디어 센터 설립을 위한 운동은 새로운 감수성을 지역 내 소통의 장으로 연결짓자는 움직임이며 문화정책적 개입이다. 이를 통해 팬클럽이 원하는 라이브 공연장의 역할을 해낼 수도 있을 것이고, 무한정 빠르기만 한 대중음악에 '딴지'를 거는 전혀 새로운 장르의 공유도 가능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참여 민주주의를 실천해보는 경험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 예는 미디어 폭력을 감지한 사람들이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제시하고 있다. 인프라 구축을 위한 법 제정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그를 위한 여론의 형성이 필요하다. 캠페인 덕에 그 같은 인프라가 만들어지고 난 후엔 그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프로그램들이 짜여져야 한다. 미디어의 폭력을 인식할 수 있는 학습이 이뤄지고, 미디어의 바깥의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연습이 행해지고, 미디어 폭력에 대항하는 코드들이 실험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작업이 아닌 조직적 작업으로 이행해야 하고 그를 통해 운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프로그램은 미디어 폭력의 정체를 폭로해왔고, 비판해왔던 지식인들에 의해 고안되고, 일반 수용자와 공유되어야 한다. 일반 수용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지역 사회와 일상의 변화를 위해 활용할 것이고, 미디어 폭력에 대항하는 운동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소중한 프로그램인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폭력을 당하던 이들에게도 한 번쯤은 폭력없는 날, 폭력에 욕지거리하는 날은 주어지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그 날 폭력당하던 이들은 폭력에 대해 큰 소리로 '다시는 너에게 당하지 않겠다' 고 선언도 하고, 폭력을 조롱하고, 폭력을 흉내내기도 한다.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 축제의 한 가운데 있다. 미디어 폭력을 드러내고, 야유하고, 서로 이야기 하는 축제의 한 복판에 있다. 비록 하루, 이틀, 사흘만에 그치고 말지만 그 축제는 우리 몸속에 기억될 것이다. 그 기억을 기반으로 새로운 축제가 올 때까지 폭력을 온 몸을 맞으면서도 버텨내리라.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축제에서 폭력의 강도가 예전에 비해 약해졌음을 노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작년과 다르고, 재작년과는 많이 다르며 내년에는 훨씬 더 나아져 있을 거라고 희망할 수 있도록 힘 기울여야 한다. <대화영화제>는 그것을 위해 마련된 축제의 장이며 새로운 희망의 발판인 셈이다.
<출처 : http://www.jabo.co.kr/68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