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들어 30여분을 뒤척이다 일어나 앉다. 심심하니 옛 기억이나 들추련다.

여태까지 살면서 나는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부려본 일이 거의 없다. 물론 때로 탐나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잠깐 눈을 반짝인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취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책을 빌려서 돌려주지 않은 적은 간혹 있으나 어쩌다 그리 된 것일 뿐, 고의라고 하기는 무리다. 그런 내가 딱 한번, 도둑질,을 한 적이 있다.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나는 고향에 내려가 시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시청 연감인지 뭔지를 발간하기 위해, 50여 년의 기록 중 연표에 들어갈 만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해마다의 일들은 어찌나 비슷한 것들 뿐인지 딱히 주요 사건이라고 뽑기도 어려운, 뭐 대단히 무료하고 따분한 작업이었다. 게다가 근무 시간이 끝나도, 워낙 작은 도시라 영화관도 다른 놀거리도 마땅히 없었다. 그 와중에 내게 위안이라고는, 일주일에 한번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일이었다.

어느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다른 책을 찾기 위해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한 권의 책에 시선이 딱 꽂혔다. 라지시체프 <길>. 라지시체프가 쌍뜨뻬쩨르부르크에서 모스끄바까지 여행하며 본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사회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적은 여행기, 18세기 뿌가쵸프와 스쩬까 라찐의 반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에 대한 고찰, 러시아 근대 문학의 시초라 할 만한, 20세기까지 러시아에서 금서였던 바로 그 작품. 이미 절판된지 오래였고 학교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던 책이었다. 여기서 이 책을 발견할 줄이야. 우선 놀라웠다.

설마 이런 소도시에서 이 책을 볼 사람이 있을까. 뒷편의 대여카드를 보니, 역시나 대여 기록 없음이다. (당시에는 바코드도 없어서 책 뒤편에 카드를 꽂아 기록했다.) 순간, 그 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 여기 있어봐야 아무도 안 볼텐데, 나라도 열심히 봐주면 그게 더 나은 일 아니겠어. 책이야 읽히라고 있는거지. 이렇게 합리화하며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사서는 멀리 있고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겨울이라 나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들고 있던 책을 얼른 코트 안으로 밀어넣어 옆구리에 끼고 단추를 채웠다. 그때 나는 꽤 긴장했던 것 같다. 다른 책을 빌릴 생각도 못하고 총총히 도서관을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벌렁거리던 심장은 도서관 정문을 통과한 후에야 진정되었다.

그 책은 물론 열심히 읽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정독을 하지는 못했다. 영어판을 옮긴 것이라 지명이나 인명이나 모든 것이 제멋대로였고 읽기가 힘들었다. 욕심을 부리긴 했으되 스무살의 나이에 열중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거우니까. 그래도 어떻게 얻은 책인데,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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