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 <비밀 노트>를 읽는 동안, 경악이라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괴롭고 힘든 것에 익숙해진다며 서로를, 스스로를 학대하는 쌍둥이 모습은 지극히 담담하고 건조하게 그려졌고, 그러한 작가의 메마른 시선은, 어린 그들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이해되지 않음도 아니건만, 일말의 동정심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소년들은, 좋고 싫다는 기본적인 감정마저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은 채 팍팍한 세상을 견뎌나갈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그건 세상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오로지 자신들의 내부만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편을 독살한 할머니나 수간을 하는 소녀, 변태성욕자인 장교, 자신들의 몸을 탐하는 하녀 등을 비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대할 수 있으며, 자신들만의 판단으로 타인을 벌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이 이들을 그렇게까지 내몰았다고 말하기는, 그러나 쉽지 않다. 인간에게 이들이 보여주는 원초적인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하게 된다.

. <타인의 증거>에서 루카스는 혼자다. 그는 클라우스라는 형제가 있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본 적이 없으므로, 형제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는다. 루카스가 제시하는 증거는 그가 쓴 비밀 노트 뿐이다. 루카스의 주변 인물들도, 독자도, 클라우스는 루카스의 또 다른 이름, 즉 환상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는 증거나 타인의 시선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일까. 루카스는 클라라에게, 클라라는 죽은 남편에게, 그리고 마티아스는 루카스에게 매달린다. 마치 자신의 존재 여부가 상대방에게 달려있다는 듯. 결국 삶이란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등장 인물들이 처절하게 주장하는 것 같지만, 어쩐지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 드러나는 진실, 드디어 만난 형제. 형제의 삶은 <비밀 노트>나 <타인의 증거>에서 보여진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잔혹하지는 못했고, 세상을 등질 수도 없었다. 50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지난한 삶의 흔적과 외로움이다. 형제를 찾음으로써 루카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절대적인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만, 그의 바람은 클라우스의 부정에 의해 소멸된다. 그리고 죽음. <50년 간의 고독>에서 쌍둥이 형제는 전편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건 초췌한 삶의 외양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일 뿐, 황량한 그들의 내면에서 인간미를 찾지는 못하겠다. 바람부는, 텅 비고 스산한 거리에 서 있는, 그런 기분이다.

. 한 권을 덮으면 바로 다음 권을 잡지 않을 수 없다. 엇갈리는 진술과 모순으로 가득찬 이야기에 당혹해 하면서, 점점 증폭되는 쌍둥이에 관한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는 것이다. 세 편을 연달아 읽으면서, 한참을 달린 것 마냥 숨이 가빴다. 그러나 세 편의 작품은 각각 2~3년의 시차를 두고 출판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 편을 각각의 작품대로 따로 읽어도 무방할 듯 하다. 쌍둥이 형제의 존재가 사실인가 아닌가와 관계없이 각 작품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심장하고 매력적이다.

다섯. 원제는 <커다란 노트> <증거> <세 번째 거짓말>이라고 한다. 역자가 옮긴 제목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 간의 고독>은 작품의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는 한다. 그러나 작가의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와 그로 인해 형성된 분위기에 비교하자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생각이다.

여섯. 이만큼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표지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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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렐라 2004-11-0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나머지 원본의 표지들도 찾아봤는데...그것도 좋더군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건 좀 심플한데 그쪽은 어두운 색조라고 할까...작품 전체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더라고요^^

urblue 2004-11-0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시체렐라님.
원본 표지들은 못 봤는데, 아무렴 아동용 표지로 만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