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를 처음 읽은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뉴욕 삼부작>이 처음이었던 건 확실하다. 갖고 있는 책은 96년 5월 발행된 초판 1쇄, 그렇다면 아마 96년이나 97년일 것이다. 어쨌거나 거의 7~8년 전 일이다. 그 때 당시 <뉴욕 삼부작>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역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폴 오스터가 상당히 지적인 작가라고 생각했다는 것과, 그 이후로 그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주저없이 꼽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리바이어던> <미스터 버티고>부터 최근의 <환상의 책>까지, 그의 대부분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와 폴 오스터에 관해 얘기하다 문득, <뉴욕 삼부작>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책을 읽으면 자세한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처럼 까마득히 잊을 수 있는지.

어제 <뉴욕 삼부작>을 다시 꺼내어 첫번째 작품 <유리의 도시>를 읽었다. 첫 페이지를 읽자 벌써 예전에 읽은 내용이 새록새록 머리 속을 떠돌기 시작한다. 아, 그래, 갇혀 있던 아이, 탐정 노릇을 하는 작가, 바벨탑 이야기. 

폴 오스터는 한 작품 속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여러가지 변주를 들려준다는 걸 <유리의 도시>를 보면서 다시금 확인한다. 피터 스틸맨이 쓴 논문 속에 등장하는 헨리 다크,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 폴 오스터가 얘기하는 돈키호테의 저자, 그리고 그 글을 쓰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까지. 무언가를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필요한데, 이들 이야기속에서 그 증거는 다른 사람이 이미 써놓은 글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혹은 허구인지, 소설 속에서도, 그걸 내가 읽고 있는 현재에서도, 경계가 모호하다. 게다가 각각의 이야기들은 다른 이야기들과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그 의미를 확장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 사람, 보통 영리한게 아닐 뿐더러, 굉장한 사색가일 듯하다.

사실 폴 오스터는, 글 뿐만 아니라 얼굴도 마음에 든다. 책에 실린 그의 사진을 한참 동안씩 들여다보곤 했었다. 깊은 눈매와 시원스런 콧날, 단단해보이는 이마. 무척이나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얼굴이다. 이 사람은, 실제로 사는 모습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거의 유일한 작가다.

오늘은 <유령들>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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