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근대문학의 종언 

 

 

 

 

 오늘은 '근대문학의 종언'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는 근대문학 이후 예를 들어 포스트모던 문학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 또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이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43쪽)

 '종교와 문학'이나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는 문학이 단순한 오락에서 승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와 문학'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문학'을 옹호하는 논의는, 언뜻 보면 그것이 반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제도화된)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문학은 허구이지만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보다도 더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에서도 문학의 옹호는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으로도 보이지만, (제도화된) 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허구지만 통상의 인식을 넘어선 인식을 보여준다는 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르트르가 "문학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다"라고 말했을 때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말은 칸트 이후 문학(예술)이 놓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문학의 의미부여(옹호)가 불가능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도 문학을 비난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는 가까스로 체면은 세워주고 있지만, 실은 아이들 장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전혀 그런 논의를 하지 않지만, 30년 정도 전까지는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 예를 들어 문학은 정치로부터 자립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공산당에 대해 문학가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산당의 권위가 없어진다면, 정치와 문학이라는 문제는 사라져 버립니다. 작가는 무엇을 써도 상관없지 않을까? 정치 같은 케케묵은 촌스러운 것을 말하지 말라는 분위기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나는 애당초 문학에서 무리하게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근대문학을 만든 소설이라는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어서, 이미 그 역할을 완전히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52-53쪽)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던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도 소설가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그저 직업적 직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64쪽)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가 오락작품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근대소설이 끝났다면, 일본의 역사적 문맥으로 보았을 때 '요미혼(讀本)'이나 '닌죠본(人情本)'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 그것이 가능한 작가는 미스터리계 등에 상당히 있습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됩니다. (65쪽)

 

* 어제 [근대문학의 종언] 부분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고 나서 근대문학이 역할을 다했다는 가라타니의 선언이, 충격이라기보다는 그저 사실로 느껴져서, 다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은 가라타니가 언급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문학은 허구이지만 삶의 진실, 시대의 진실을 보여준다고 믿어왔다. 실제로 90년대 초까지 나는 소설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으며, 요 몇 년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70~80년대 소설에서 보았던 것 같은 '문학의 힘'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최근 한겨레에서 이 문제에 관한 '지식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26일자 최원식 교수의 글(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6074.html)은 논점을 빗겨간 것으로 보인다. 문학, 특히 소설의 역할을 뭔가 다른 것으로 본다면 문학 종언론에 대해 달리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라타니가 말한 문학의 역할을 인정한다면, 한국에서 그와 같은 문학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현실 아닐까. 자신을 비롯한 많은 문학 평론가들이 문학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문학의 종언’이 풍문에서 부풀려진 일종의 상상에 가깝다"거나 '소동', '왜곡' 등의 표현으로 폄훼할 일이 아니다.

일전에 한 잡지에서 2000년대의 표준적인 독자상을 조사한 적이 있다.(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702230081) 그러니까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층을 말하는 것인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도, 20대 초반의 여대생이었다. "독서 시간은 잠들기 전 1시간 정도. 인터넷 이용 시간이 훨씬 많고 개봉 영화 무료 시사회를 알뜰히 챙기는 영상 세대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기꺼이 손에 잡는다"고 한다. 대개 가볍고 재미있는 일본 소설을 읽는다는 말이다. 가라타니가 말한 "그저 오락"으로서의 문학이 대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내가 하고 있으니까 한국 문학은 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한국 문학이 어째서 독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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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31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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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31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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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5 1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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