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정신 홍신사상신서 20
몽테스키외 지음, 이명성 옮김 / 홍신문화사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몽테스키외는 지방 귀족으로서, 보르도 고등법원장이었다. 1728년부터 1731년까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당대의 터키 지역의 정치제도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쌓았다. 그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법이란 사물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하며, '자연법에 대한 관념을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관념과는 다른 흐름인 사회체제의 자연법칙이라는 관념으로 전환'시켰다.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원리(존재?)로부터 법이나 정체(당위?)의 구조가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당위와 존재가 방법적으로 엄격히 구별된 상태에서, 인간이 그 생활 속에서 맺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제관계(사회체제의 자연법칙?)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몽테스키외가 경험적, 실증적으로 - 몽테스키외에게서는 인간의 '자연상태' 와 같은 말이 보이지 않는다. - 분류한 정체는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의 세 가지이다. 각각의 정체는 '본성'과 '원리'를 가진다. 본성이란 정체 특유의 기본 구조로서 주권의 소재, 주권행사의 양태를 말하는 것이며, 원리는 정체를 완전하게 기능하도록 하는 인간의 정념이다. 공화정은 민주정과 귀족정을 포함하는데, 전자의 본성은 '국민의 집단이 주권을 갖는' 것이고 후자의 본성은 '국민의 일부가 주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공화정의 원리는 '덕'이다. 군주정은 단 한 사람이 통치하되 제정된 법에 따르는 정치체이고 그 원리는 '명예'이다. 전제정은 단 한 사람이 규범도 없이 자기 의지와 기분에 따라 만사를 처리하는 정체이고 그 원리는 '공포'이다.

몽테스키외가 집요하게 캐묻는 것은, '어떤 정체하에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가'이다. 그것은 곧 절대왕정하에서 새로이 만들어야 할 정체의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한 몽씨의 답은 '군주정'이다. 그는 '민주 정체와 귀족 정체는 그 본성으로 볼 때 결코 자유스러운 국가는 아니'며, '정치적 자유는 제한 정체(gouvernement mod r s = 군주정)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군주정에서도 자유가 항상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남용되지 않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권력이 권력을 저지토록 해야 한다는 '권력 분립'의 원리가 도출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 일상생활의구조 -상 까치글방 97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에 '일본의 야쿠자는 에도(江戶) 시대의 소방조직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치안을 담당했던 집단이었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피식 웃었다가 이내 곰곰 생각에 잠겼다. 일본 사회를 공부하면서 저 '소방대'라는 게 왜 저렇게 자주 등장하는가, 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소방이라는 것이 왜 저렇게 사람들의 일상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지는가가 궁금했다 ― 그런데 야쿠자마저 소방조직이라니…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화재'라는 것은 가끔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일이지 일상적인 사건이 아니며, 그 화재의 위험은 상재하고 있지만 쉽사리(?)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면 일본은, 과거 촌락의 무라(村) 조직이나 현대 도시 생활집단인 조나이(町內) 등에서는 '소방'이라는 일이 우리나라 농번기의 품앗이 마냥 일상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일본이란 나라가 조산대를 따라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화산폭발과 지진이 예기치 않게 일어나고 그것은 곧 크고작은 화재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집요하게 일본사회를 구속하고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시간이란 인간이 변화를 인식하는 수단으로서의 단위이고, 초·분 혹은 년·세기와 같은 물리학적 시간의 단위는 그러한 단위 중에서 객관성을 지닌 '하나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층위는 여러 개일 수 있다. 어느 기간동안 변화가 거의 없었다면 그런 영역에서는 매우 느린 시간이 흐른 것이고 같은 기간동안 다른 영역에서 급박하게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이다. 이러한 '시간지속에 따라 역사 서술의 수준을 달리하는 것'은 '역사학과 다른 학문의 연계'와 함께 브로델의 역사 연구 방법의 큰 특징이다. 브로델은 시간지속을 세 개의 층위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개별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춘 급박한 역사인 '사건사', 20, 30년 혹은 그 이상의 주기적 운동에 의해 물결치는 인간의 삶을 기술하는 '꽁종크뛰르의 역사', 그리고 여러 세기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되는 '장기지속의 역사(구조사)' 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시간지속의 각 층위는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경계는 모호하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또한 「일상생활의 구조」, 「교환의 세계」, 「세계의 시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들이 각각 장기지속의 역사, 꽁종크뛰르의 역사, 사건사에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구획은 또 다른 기준에 의해 구획된다. 애초에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전산업화 시기, 다시 말해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를 범위로 잡고 그 기간의 유럽 경제사를 기존의 경제사 연구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쓰여질 것이었다. 하지만 브로델은 요제프 쿨리셔나 베르너 좀바르트의 고전적인 경제사 연구가 제시하는 이론이 자신이 관찰한 현실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고 기존의 경제학의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책을 쓰게 된다. 그가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쓰려 하는 까닭에 이 책에서 그는 기존 경제학의 관점이나 이론들을 종종 비판해 나간다. 브로델에게 있어 기존 경제학의 문제점은 '탈맥락주의와 단선적인 진화주의(시장에 있어서는 '자체조절적인 시장'이라는 관념: 누구에 의해서도 조정되지 않는 시장이 경제 전체의 모터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에 있다.

경제학자들의 경우 경제를 하나의 동질적인 실체로 보기 때문에 주변 배경으로부터 경제만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며, 또 수로 표현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추출해낸 경제현상을 측정할 수 있고 또 측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도식들 역시 구체적 현실들과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산업화 시기의 유럽(유럽 이외의 세계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의 발전이란 인류 역사를 둘로 갈라놓는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점진적으로 시장, 기업, 자본주의적 투자라는 합리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알베르 카뮈 전집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뫼르소는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사는 평범한 하급 샐러리맨인데,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서 여자 친구인 마리와 노닥거리다가 정사(情事)를 가진다. 며칠 지난 일요일에 우연히 불량배의 싸움에 휘말려, 동료 레이몽을 다치게 한 아라비아인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권총으로 사살한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하고 속죄의 기도도 거부하며,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도 행복하다고 공언한다. 처형되는 날 그는 많은 군중이 밀려들 것을 기대할 뿐이다.

뫼르소의 행동은 부조리(absurdite)의 표상이다. 까뮈에게 있어 '부조리'라는 것은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 앞에 놓인 것이며, 불편한 느낌이며, 모순된 감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과 그 의미와 결과를 지각하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 까뮈에게 많은 영향을 준 니체와는 달리, 그는 '신은 죽었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신, 혹은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어떤 종류의 주재자도 생각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까뮈는 신성성과 관련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을 그리워하거나 열망하지 않는다. No Thanks ― 나는 이 미로 속에서 나 스스로의 길을 찾을 것이다.

신이 없다면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예정된 규범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에 대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 세계에 던져진 것이며 그 종국은 순수하고 간단한 '죽음'이다. 그 이전에는 삶이 있을 뿐,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설명의 부재'라는 것 자체가 부조리의 사상은 아니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불합리한 감각과 인간의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 주체할 수 없는 명쾌함에 대한 희구가 대치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부조리라는 것은 목적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무의미한 탐색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결점이며 실존을 묻는 질문의 시작이다. 부조리와 화해하는 일이 까뮈가 본질적으로 관심을 가진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겪는 지독한 '무거움과 낯섦'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부조리의 감각은 '인간과 그의 삶의 분리'이며, 무대장치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해야 할 대사도 모른 채 무대를 걸어나오는 연극 배우이며, 영원한 이탈과 무소속의 감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해 한용운 한시선
서정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만해의 시도 좋아하고 미당의 시도 좋아한다. 한편 '삶'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만해의 삶은 존경스럽지만 미당의 삶은 그렇지 않다. 미당과 만해의 상이한 삶의 만남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다소 실망이었다. 만해는 한시도 짓고 소설도 썼는데, 역시 만해 문학의 백미는 산문시이다. 여기서 서정주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은 것은 만해의 한시 뿐이다. 그래서 일단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만해의 산문시에 미당이 시로 답하는 형식의 글을 시도해 봤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그렇고, 미당은 이 시들을 번역함에 있어 종종 장난스럽고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그래서 한시를 성실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어렵다. 또 역문을 번역자 나름의 미감을 살린 시적 언어로 제시했다면, 주석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쾌한 해설을 할 필요가 있는데, 서정주의 주석문은 어휘의 선택이라든가 어미의 쓰임에서 마치 시를 쓰듯, 어설픈 언어를 늘어놓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역자 후기에서, 서정주는 '이 주석은 그의 한시의 보급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했는데, 과연 이런 식의 문장이 최선이었던가는 의문이다.

번역에 있어서도 만해의 삶의 궤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시가 있는데,

獄中吟

朧山鸚鵡能言語
愧我不及彼鳥多 
雄辯銀兮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

서정주는 이 시를 이렇게 번역했다.

감옥에서

농산 앵무새는 말 잘하지만
내 제만큼 못하는 걸 부끄러하지.
雄辯은 銀이지만 침묵은 金
이 金이라야 自由의 꽃 모조리 사네.

이 '獄中吟'이라는 시의 번역과 해석이 문제되는 것은, 바로 한시의 尾聯인 '此金買盡自由花' 때문이다. 서정주는 이 부분을 '이 금이라야 자유의 꽃 모조리 사네'라고 번역하고, 한용운이 3 1운동 이후 옥중에서 '말 잘하는 앵무새와는 달리 영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지'냈다고 풀어낸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선 역문 자체에 구성적 모순이 있다. '鸚鵡能言語' - 말 잘하는 앵무새'는 분명 '웅변'의 화신이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내 제만큼 못하는 걸 부끄러하지'라는 구절에서, 시적 화자에게 있어 더욱 절실한 것은 침묵이 아닌 웅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정주의 해석은 '금'으로 은유되는 '침묵'을 시적 화자에게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어조사 兮를 '-이지만'으로 해석하여 무리한 반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서정주의 해석은 한시의 首  聯과 頸 尾聯사이에 까닭 없는 뒤틀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서 웅변을 가리키는 '은'은 시적 화자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고, 침묵을 가리키는 '금'은 자유라는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무엇이다. 즉, 침묵이라는 수단으로 자유를 얻겠다는 말이 아니라, 침묵이 비록 가치있다고는 하나 그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시의 뜻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이 정도면 제대로 된 번역이 되지 않을까 한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도 곧잘 한다는데
그 새보다 훨씬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그 금으로 자유의 꽃 모두 사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인류학 - 제 2 판
류웰린 지음 / 일조각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정치인류학(political anthropology)이라는, 인류학 내의 한 하위분야를 개설적으로 살펴본 교과서적인 책이다. 내용을 대폭 보완한 제2판이 나와있다. 인류학에서 '정치'라는 영역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정치현상을 전통적으로 어떤 식으로 설명해 왔는가가 다루어진다. 현대로 오면서 정치인류학이라는 하나의 분야 안에서도 여러가지 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전세계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인류학자가 있는가 하면, 민중의 저항을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고, 성적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각각의 분야들은 그 방향의, 인류학자 아닌 또 다른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정말 '정치인류학자'라는 아이덴티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화인류학의 기본적인 교과서들을 번역해 온 한경구 선생님의 친절한 번역이 돋보인다. 그러나 약간 윤문을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유명한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쓴 서문은 그 자신이 귀찮아서 그렇게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딱딱하게 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