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 일상생활의구조 -상 ㅣ 까치글방 97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에 '일본의 야쿠자는 에도(江戶) 시대의 소방조직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치안을 담당했던 집단이었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피식 웃었다가 이내 곰곰 생각에 잠겼다. 일본 사회를 공부하면서 저 '소방대'라는 게 왜 저렇게 자주 등장하는가, 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소방이라는 것이 왜 저렇게 사람들의 일상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지는가가 궁금했다 ― 그런데 야쿠자마저 소방조직이라니…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화재'라는 것은 가끔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일이지 일상적인 사건이 아니며, 그 화재의 위험은 상재하고 있지만 쉽사리(?)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면 일본은, 과거 촌락의 무라(村) 조직이나 현대 도시 생활집단인 조나이(町內) 등에서는 '소방'이라는 일이 우리나라 농번기의 품앗이 마냥 일상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일본이란 나라가 조산대를 따라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화산폭발과 지진이 예기치 않게 일어나고 그것은 곧 크고작은 화재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집요하게 일본사회를 구속하고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시간이란 인간이 변화를 인식하는 수단으로서의 단위이고, 초·분 혹은 년·세기와 같은 물리학적 시간의 단위는 그러한 단위 중에서 객관성을 지닌 '하나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층위는 여러 개일 수 있다. 어느 기간동안 변화가 거의 없었다면 그런 영역에서는 매우 느린 시간이 흐른 것이고 같은 기간동안 다른 영역에서 급박하게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이다. 이러한 '시간지속에 따라 역사 서술의 수준을 달리하는 것'은 '역사학과 다른 학문의 연계'와 함께 브로델의 역사 연구 방법의 큰 특징이다. 브로델은 시간지속을 세 개의 층위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개별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춘 급박한 역사인 '사건사', 20, 30년 혹은 그 이상의 주기적 운동에 의해 물결치는 인간의 삶을 기술하는 '꽁종크뛰르의 역사', 그리고 여러 세기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되는 '장기지속의 역사(구조사)' 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시간지속의 각 층위는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경계는 모호하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또한 「일상생활의 구조」, 「교환의 세계」, 「세계의 시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들이 각각 장기지속의 역사, 꽁종크뛰르의 역사, 사건사에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구획은 또 다른 기준에 의해 구획된다. 애초에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전산업화 시기, 다시 말해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를 범위로 잡고 그 기간의 유럽 경제사를 기존의 경제사 연구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쓰여질 것이었다. 하지만 브로델은 요제프 쿨리셔나 베르너 좀바르트의 고전적인 경제사 연구가 제시하는 이론이 자신이 관찰한 현실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고 기존의 경제학의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책을 쓰게 된다. 그가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쓰려 하는 까닭에 이 책에서 그는 기존 경제학의 관점이나 이론들을 종종 비판해 나간다. 브로델에게 있어 기존 경제학의 문제점은 '탈맥락주의와 단선적인 진화주의(시장에 있어서는 '자체조절적인 시장'이라는 관념: 누구에 의해서도 조정되지 않는 시장이 경제 전체의 모터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에 있다.
경제학자들의 경우 경제를 하나의 동질적인 실체로 보기 때문에 주변 배경으로부터 경제만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며, 또 수로 표현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추출해낸 경제현상을 측정할 수 있고 또 측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도식들 역시 구체적 현실들과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산업화 시기의 유럽(유럽 이외의 세계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의 발전이란 인류 역사를 둘로 갈라놓는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점진적으로 시장, 기업, 자본주의적 투자라는 합리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