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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한시선
서정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만해의 시도 좋아하고 미당의 시도 좋아한다. 한편 '삶'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만해의 삶은 존경스럽지만 미당의 삶은 그렇지 않다. 미당과 만해의 상이한 삶의 만남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다소 실망이었다. 만해는 한시도 짓고 소설도 썼는데, 역시 만해 문학의 백미는 산문시이다. 여기서 서정주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은 것은 만해의 한시 뿐이다. 그래서 일단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만해의 산문시에 미당이 시로 답하는 형식의 글을 시도해 봤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그렇고, 미당은 이 시들을 번역함에 있어 종종 장난스럽고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그래서 한시를 성실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어렵다. 또 역문을 번역자 나름의 미감을 살린 시적 언어로 제시했다면, 주석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쾌한 해설을 할 필요가 있는데, 서정주의 주석문은 어휘의 선택이라든가 어미의 쓰임에서 마치 시를 쓰듯, 어설픈 언어를 늘어놓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역자 후기에서, 서정주는 '이 주석은 그의 한시의 보급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했는데, 과연 이런 식의 문장이 최선이었던가는 의문이다.
번역에 있어서도 만해의 삶의 궤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시가 있는데,
獄中吟
朧山鸚鵡能言語
愧我不及彼鳥多
雄辯銀兮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
서정주는 이 시를 이렇게 번역했다.
감옥에서
농산 앵무새는 말 잘하지만
내 제만큼 못하는 걸 부끄러하지.
雄辯은 銀이지만 침묵은 金
이 金이라야 自由의 꽃 모조리 사네.
이 '獄中吟'이라는 시의 번역과 해석이 문제되는 것은, 바로 한시의 尾聯인 '此金買盡自由花' 때문이다. 서정주는 이 부분을 '이 금이라야 자유의 꽃 모조리 사네'라고 번역하고, 한용운이 3 1운동 이후 옥중에서 '말 잘하는 앵무새와는 달리 영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지'냈다고 풀어낸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선 역문 자체에 구성적 모순이 있다. '鸚鵡能言語' - 말 잘하는 앵무새'는 분명 '웅변'의 화신이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내 제만큼 못하는 걸 부끄러하지'라는 구절에서, 시적 화자에게 있어 더욱 절실한 것은 침묵이 아닌 웅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정주의 해석은 '금'으로 은유되는 '침묵'을 시적 화자에게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어조사 兮를 '-이지만'으로 해석하여 무리한 반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서정주의 해석은 한시의 首 聯과 頸 尾聯사이에 까닭 없는 뒤틀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서 웅변을 가리키는 '은'은 시적 화자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고, 침묵을 가리키는 '금'은 자유라는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무엇이다. 즉, 침묵이라는 수단으로 자유를 얻겠다는 말이 아니라, 침묵이 비록 가치있다고는 하나 그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시의 뜻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이 정도면 제대로 된 번역이 되지 않을까 한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도 곧잘 한다는데
그 새보다 훨씬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그 금으로 자유의 꽃 모두 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