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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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은 우리의 상식 속에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지식이 얼마나 권력에 의존하며 권력의 작용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가를 알려준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으로 총칭하는 서구의 지식체계는 결코 동양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되려 서구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지리학이며, 서구와 구별되는 '동양'이라는 인위적 인식틀을 설정하고, 서양보다 열등한 이미지를 동양에 부과함으로써,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식민지인들은 서구의 지배를 위한 담론에 불과한 오리엔탈리즘, 자신에게 부과된 이미지에 동의하고 수용함으로써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고착화한다.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이 만들어내는 동양에 대한 이미지들은 서구인들에게 하나의 타자의 이미지를 제공하여, 그 타자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이미지로서 서구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 시대의, 그리고 정치적 제국이 종언을 고한 탈식민의 현시점에도 남아있는 문화적 지배의 메커니즘이다.

사이드는 서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위 제3세계의 독자들을 불러 말을 건네고 있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그들(우리들)에게 서양문화의 언설의 힘을 이해하기 위한 방책을 제공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문화적 지배의 구조를 밝히고,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 구조를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의 위험성과 유혹에 관해서 인식시키고자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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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근대 - 100년 전 영국이 평가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
박지향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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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100년 전 영국이 평가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인데, 실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 세 나라가 서로를 바라보았던 시선의 차이, 그리고 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일본, 한국의 근대와 그들이 서로를 보았던 시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명쾌한 분석의 영역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떤 애매한 범주만 있다. 이 책을 읽고는, 저자의 요점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제국주의>가 '신화화 현실'이라는 부제로 몇몇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했다면, 이 책은 <일그러진 근대>라는 제목 자체가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한다. 자못 도발적인 이 제목을 걸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책의 서문을 읽어보면 저자의 지향이 어느 정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지향은 (페미니즘을 포괄하는)탈식민주의, 탈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이 책을 쓰고 있으며, 지난 연구와 후속 연구를 통할하는 문제의식 또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그는 그가 의도했던 식민주의/근대화담론의 균열내기를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주장하듯 식민지의 광범한 회색지대를 조명하고, 민족과 반민족의 고착적인 이분법을 깨는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열어젖힐 수 있을까. 난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어느 부분에서 포커스가 놓여지는지, 어느 지점에서 문제가 제기되는지가 다소 애매하다.

동시대 담론의 분석, 정세의 분석이라는 차원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분석적이라기보다는 나열적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별로 생산적인 비평은 못되지만 하여튼 박지향의 글은 좀 그렇다. 역사적 사실의 배열 자체가 첨예한 문제의식을 통해 조직되어야 글을 읽으면서 예리한 느낌을 받을텐데, 이 책은 그저 구구절절 역사 이야기를 해 놓고선 어느 부분에 가서 갑자기 민족의식의 허구성이라든가 식민지화의 근본적 원인이라든가 하는 뭉툭한 비판을 던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엉성함은 탈식민주의라는 20세기 후반(그리고 21세기로 넘어서는)의 커다란 지적 기획을 동아시아와 구미열강의 비교역사학적 차원으로 끌어오려는 힘겨운 노력에서 발생하는 옥의 티 정도로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저러나 저자에게 바라는 것은 탈식민주의 이론에 휩쓸려 성급하게 비교연구를 내놓는 것보다는, 일단 지금까지 해 온 자신의 각국사 중심의 지적 훈련에 충실히 하는 것이다. 저자가 비교의 대상으로 매번 들고 나오는 영국, 일본, 한국은 그 사이의 관계보다 더 커다란 차원에 대한 확실한 문제설정이 있지 않으면 너무나 엉성하다. 왜 굳이 세 나라를 비교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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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문화연구 10
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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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로움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연구가 주로 탐색하는 시대로 1930년대를 택했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한국, 혹은 조선의 1930년대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국사'를 배우면서 대략 1905년부터 조선이 식민지화됨으로써 우리 역사에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음을 느꼈고,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 36년'에 대해서는 무단통치, 문화통치, 병참기지화정책 등으로 대강의 시대구분이 된다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시대는 그에 걸맞는, 서로 명도만 다른 어떤 무채색으로 채색되어지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1945년 갑자기 조선반도에 찬란한 빛이 다시 비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 책은 한국의 근대성을 새로이 탐색하면서 1930년대를 다루는 걸까. 우리는 식민지 시대와 '근대'에 대한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 사이의 논쟁을 기억한다. 사실 이 논쟁은 각각의 논자가 근대라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여하에 따라 그 입론이 판이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좀처럼 논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 잔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이 땅의 '정서상' 정당화될 수 없고 수용될 수 없는 측면이 '분명'하게 존재했으며, 수탈론에서는 국민'국가'가 부재한 근대적 제요소의 발전은 '진정한' 근대가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럼 얼토당토 않은 1930년대를 들여다보면서 한국의 근대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렇다면, 또 한 번 수탈론자들을 열받게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다시 새로운 '~론자'들을 질타하고 반성시켜 순국선열을 모독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다소 스테레오 타입화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그러한 논쟁의 문제설정에서 벗어나 있다. 즉, 이 연구에서는 '근대'가 선험적인 당위로, 지향해야 할 목표로, 각 품목을 정확히 채워넣어야 할 종합선물세트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통속적으로 남발되는 말을 굳이 또 한 번 쓰자면, 이 책은 우리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는 우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이건 복잡한 인식론적, 현상학적 개념들을 끌어들이는 문제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간단한 변명이 가능하다. 일단 역사학의 방법론을 따르는 연구라는 점에서,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사료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기존에 견지했던 시선으로는 포착되지 않았던 역사의 층위, 당대 사회의 결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새로이 동원되는 사료는 기존의 정치사회사나 경제사에서 사용했던 사상사적 저작이나 주요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관편 보고, 경제 통계수치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에 발행된 문예대중잡지이다.

사료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근대를 설명하는 관점에 있어서도 '있는 그대로'라는 밑도끝도 없는 말에 대한 변명이 가능하다. 이 책은 '근대'를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시점과 동질적인 무엇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삶을 살아가는 모습, 우리가 가진 심성 등이 지금같은 모양이 된 게 언제쯤이냐를 찾아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탐구를 위해서 가장 적절한 사료는 그야말로 기존 역사학을 위해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 노출된 모습의 당시의 신문과 잡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놀라울 정도로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과 비슷한 시대를 발견한 것이 바로 1930년대였다.

광복 후 지난 5,60년의 현대사를 점철한 숱한 사건들을 겪어오며, 이제는 한참이나 멀어져 낯설기 그지 없는 식민지 암흑시대 1930년대에서, 우리는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지금 그러는 것처럼 '근대'를 당위적 목표로 설정한 인간들이, 식민지라는 모순적인 질곡의 상황에서 고뇌하며 꿈틀거리는 모습을, 그 누더기같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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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의 역사
가바리노 / 일조각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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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머윈 가바리노라는 미국 여성 인류학자가 쓴 책이다. 원제는 Sociocultural Theory in Anthropology: A Short History로, 직역하면 '인류학에서의 사회문화이론: 간략한 역사'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말마따가 설명의 간결성에 있다. 다루는 범위는 15,6세기 지리상의 발견에서부터 계몽주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현대(1970년대 전반까지)의 인류학까지 자못 광범하면서도, 꼭 짚어야 할 사건, 이론적 흐름, 학자 등을 핵심적으로, 또 깔끔하게 짚어 주는 매력이 있다.

또 '인류학'이라는 독립적인 분과제도 안에서의 역사만 다룬 것이 아니라 인류학 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회사상의 조류를 설명하고 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어느 정도 사회과학, 서구현대지성사 등에 익숙하나 인류학에 대해서는 그다지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문화인류학 개론서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량도 150여 페이지 정도밖에 안된다.

하나 불만이 있다면 번역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해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좋은 번역이지만, 독자에 대한 지나친 배려 때문인지 불필요한 역주가 과잉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왜 하나의 영어 단어가 여려가지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번역이론서가 아닌 문화인류학 교과서에 실어야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번역을 함에 있어서 굳이 한자를 노출시킬 필요가 있는가? 인류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을 위해서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한다면 가독성도 배려를 해 줘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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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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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는 일견 비합리하고 광신적인 것으로 보이는 관습이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 사회의 토지, 노동력, 기술 등의 경제적 조건과 생태적 토대 등의 조건에 의해 엄격히 제한받는 문화적 산물임을 해명하고 있다. 그는 이런 현상을 기술함에 있어, 일면적인 현상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설명이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가 처한 경제적 조건과 생태적 균형론으로 귀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조금은 풍부한 느낌이 떨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의 문화 관습에 대한 입론은 다른 인류학적 해석들도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포틀라치는 그 자체로 경제적 소비 행위임과 동시에, 그 소비가 과시적임으로써 위신을 얻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할 수 있는 정치적 기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포틀라치를 주고받는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를 상정함으로써 집단간의 교역이라는 측면에서도 해석하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인류학은 문화 현상을 두고 한가지 측면만을 살피지 않는다. 거기에는 정치·경제·생태, 그리고 성의 문제까지 다양한 측면들이 고려되어야만 하나의 문화 현상을 그 사회의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해리스의 문화와 수수께끼는 이러한 인류학적 접근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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