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과 인류학자들 - 영국 사회인류학의 전통과 발전 호모사피엔스
애덤 쿠퍼 지음, 박자영.박순영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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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국의 유명한 인류학자 애덤 쿠퍼의 역시 유명한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1973년에 영국에서 초판이 나와서 지금까지 두 번 판갈이(?)를 했다. 원서가 워낙 정평이 나 있는데다가 제인 구달의 번역으로 알려져 있는 박순영 교수의 번역 또한 신뢰할 만 하다. 그래서 일단 별 네 개는 준다. 그렇지만 역자도 쓰고 있듯이, 인류학을 컴팩트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문외한이 이 책에서 커다란 앎과 깨달음의 즐거움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을까 싶다.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책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류학'이라는 분과학문이 성립한 이래 그 이름으로 답파된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는 책(그런 책이 있다면 초인적으로 글을 조직해 내는 능력을 가진 저자를 만나지 않는 한 십중팔구 정말 따분할 것이다)이 아니라,  영국 인류학의 역사에 국한하여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애덤 쿠퍼의 문장이 재치있는 편이고, 전기적인 자료를 풍부하게 끌어오고 있어, 정말 읽을 '만'하다. 결론적으로 번역서가 나와서 기쁘다.

하지만 한길사의 기획력을 별 숫자로 평가하자면 두 개 이상은 주고 싶지 않다. 한길사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책을 낸 것이 이것으로 네 권 째인데, 물론 시리즈가 완결된 것은 아니겠지만 제2권 <금기의 수수께끼>를 제외하고는 세 권 모두가 이런 부류의 인류학사 개설서의 번역이다. 순수히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세 권 중에 제일 좋은 것 한 권만 골라서 번역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세 권이 '시리즈'라는 기획에 걸맞게 모두 다 인류학사 개설서로 일관되게 묶일 수는 있지만, 너무 비엔나 소시지(?)같이 변별점이 없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류학사 개설서가 아닌 <금기의 수수께끼>가 괜히 뚱금없이 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학부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이런 책들이 나와서 고맙겠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른바 인류학의 고전으로 분류되는 책들의 번역일 것이다. 또한 독서 대중과 교양인들에게는 '학사'책 보다 좀 더 톡 쏘는 매력이 있는 인류학 책을 발굴 번역하여 소개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호모 사피엔스, 이런 방향으로는 그만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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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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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사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외국문학 시장을 휩쓴 일본 현대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는 셈이고(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것은 제외하고), 그래서 자못 커다란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이름이 요시모토 '바나나'라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건 스스로 붙인 이름이건 대단하지 않은가. 젊은 감각의 작가 이름으로는. 그렇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에게는 특정한 감각이 있었고, 그녀의 소설에는 어떤 스타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다지, 그것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건 아니었다. 내가 새로운 종류의 소설을 서점 귀퉁이에서 꺼내들면서 바랐던 건 무엇이였냐면, 비록 그런 욕망은 언제나 공백을 향하기에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게 어불성설일지는 모르나, 어떤 쿤데라다운 재기가 넘치는, 그러나 쿤데라처럼 피로를 안겨주지 않는 다소 부드러운 발랄함이랄까, 그런 문체, 그런 상상력을 내심 바랬었는데. 아쉽게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그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그녀의 글은 너무나도 쉽게(혹은 다행스럽게) 이미지로 환원되었고, 줄거리로, 드라마 플롯으로 전치되는 것 같았다. 말마따나, 요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아서 보곤 하는 일본 TV 드라마의 감수성과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연애드라마, 라고 말하면 또 어떤 스테레오타입을 갖고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여하간, 내가 최근에 느끼는 바의,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들은 분명 한국산 드라마들보다는 여러 면에서 한 수 위라 여겨지지만, 그것들이 건드리는 감성으로부터는, 난 좀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것이다. 아니면 정말 거리가 있거나. 그러나 그것을 여기서 또 섣불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난 그 정체를 모르겠다. 분명 어떤 '소녀적 감성'이 손에 잡히는 이 책 한 권을 감싸고 있는데, 그냥 마음편하게 그렇게 치부하면 되려나.

조그만 판형에, 200페이지가 될까말까한 얇은 분량에, 표지 디자인은 흑백의 장미 꽃 문양이 여러 개 그려진 것으로 들고다니는 것 자체가 하나의 멋진 악세서리인데, 한 이틀 들고 바깥을 나다니고 나서야 알았지만 나부터가 그런 악세서리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물며 어느 중년 남자가 찻간에서 스포츠신문 대신 이런 책을 들고 읽고있을까.

결국 이 책의 타겟은 약간의 애잔함과 알콩달콩함으로 버무린, 조금 세련되다 싶은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는 소녀들이라, 그렇게 간단히 얘기해 두면 되는 것일까. 조금 찜찜하지만 달리 말할 도리도 없다. 썩 예쁘다고 할 수 없는, 그래서 되려 친한 말동무가 되어줄 것만 같은 사진 속, 바나나 언니가 이야기를 들려준댄다. 그리 부담스러운 길이도 아니고 말이다.

'둘의 마음은 죽음으로 에워싸인 어둠 속에서,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커브가 지금 거의 맞닿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 지나면 서로 다른 회로를 따라 떨어지고 만다. 지금 여기를 지나면, 두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영원한 친구로 남는다.' (122-123)

<키친>과 <만월>의 '나', 사쿠라이 미카게는 어렸을 적 부모와 할아버지를 잃었고, 급기야는 마지막 남은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미카게에게 하나의 청년이, 소설에서 아무런 사심없이 다가온 것처럼 묘사되는, 다나베 유이치가 접근한다(착하고 사심없는, 또 때로는 상처받은 마음에 우수에 빠지는, 그래서 매력적이게 되는 남자, 이것만은 진정한 스테레오타입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정부와 짜고 유이치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죽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의 정부, 에리코는 그 후 여장을 하고 게이 바에서 일하며 유이치를 키운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스토커에게 살해당한다. 고아가 된 젊은이들의 절망, 철부지처럼 엉엉대며 울 수도 없는 그들에게 엄습하는 우울함, 그리고 그에 더한 야릇함. 세 편의 요시모토 소설의 주제, 모티프, 그리고 문체는 저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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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노프스키의 문화인류학 살림지식총서 141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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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노프스키는 현대 문화인류학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핵심적인 인물이다. 통상 자기와는 다른 문화를 갖는 지역에 가서, 현지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 1-2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현지조사를 하는 것이 인류학적 지식생산의 조건으로 생각되는 것은 말리노프스키 자신이 직접 수행한 트로브리안드 제도 조사와 그의 대표적인 초기 저작인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의 선언적인 문구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는 이러한 인류학 자료조사의 기법적 차원에서는 많은 기여를 했을지는 모르나, 이론가로서는 대체로 실패했고, 특정한 학파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인류학에서 그의 주된 저서들은 축복이든 저주이든 간에 여전히 ‘고전’으로 읽힌다.

이 책은 말리노프스키와 삶과 학문을 짧은 분량으로 정리해 낸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 책을 발판으로 삼아 말리노프스키의 책을 직접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보다는, 별로 말리노프스키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만 같다. 사실 목차만 봐도 어느 정도 이 책의 서술 경향을 알 수 있다. 40쪽부터 시작되는 ‘심리학적 관심의 지속과 과잉,’ 그리고 이어지는 ‘문화 변동 연구와 실패,’ ‘비교사회학의 등장과 말리노프스키의 몰락,’ ‘문화에의 집착망상’까지, 이 책은 말리노프스키의 이론적 취약함과 학계에서의 계속되는 실패 과정을 다루고 있을 뿐, 말리노프스키를 지금 읽는 것이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지를 긍정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부분은 실상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인 ‘말리노프스키의 현대적 재조명’(사실 이 마지막 챕터는 논지 전개상 너무 무리한 전환이며, 차라리 생략하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에서도 겨우 두어 페이지 분량을 할애하여 오늘날 말리노프스키가 재조명되는 바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여기에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되어 있지 않고, 그저 그가 영국 사회인류학계에서 패러독스로 남아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저자 자신이 말리노프스키와 저서 등을 읽어나가며 스스로 해 나갔던 생각일 것이므로, 자신의 견해를 굽히고 말리노프스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써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허나 어차피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해석이 아닐 바에야, ‘말리노프스키는 현대 인류학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정도가 저자의 말리노프스키 탐구의 주된 내용일 바에야, 굳이 이런 저작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학문활동에 아무런 영감을 제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이 들면, 그냥 망각되게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

한 걸음 양보하여, 이 책을 그저 말리노프스키에 대한 숱한 평가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그것 또한 마뜩찮다. 한국은 지금 말리노프스키에 대해 ‘숱한 평가 중 하나’를 대중적 버전으로 출판할 상황이 아니다. 말리노프스키의 원저작들이 아직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에 한완상 선생의 번역으로 <미개사회의 성과 억압>과 <문화의 과학적 이론>이 나왔으나 절판된 지 오래고, 최근에 <원시신화론>이 나왔을 뿐이다. 원저작의 번역이 이러한 해설서 내지는 평가서보다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리노프스키를 지루해하는 저자가 과연 책이 재미있어도 지루할 번역작업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는 저자와 함께 말리노프스키에 대한 흥미를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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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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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자는 생각이 복잡하지 않다." 어느 친구가 되뇌었던 이 말에, 나는 적이 불편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복잡한 편이고, 나 스스로 반성해 보기에 '실천'은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을 늘상 갖고 있다. 비록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유행위 그 자체가 실천의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좁은 의미에서의 '실천'을 위해서는 생각하는 바가 단순하고 명료할수록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명료한 사유는, 복잡하고 역설을 안고 있는 사유와 마찬가지로 양면적이다. 그것은 실천을 추동하면서도, 종종 단순하게 파악되어서는 안될 것까지 단순화한다.

김규항의 2001년에서 2005년까지의 칼럼과 일기를 모은 <나는 왜 불온한가>를 읽으며, 나는 "실천하는 자는 생각이 복잡하지 않다"는 말을 김규항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그의 문장을 따라가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왜 나의 일상 속에서 저렇게 날카로운 시선을 갖지 못하고 저렇게 명료한 방식으로 써 내리지 못하는지 하며 나 스스로를 탓했다.

허나 한편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구절들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친일파?'라는 글에서 그는 "대다수 일본 민중들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였으며 한국의 지배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이해를 같이했다"라고 쓰고 있다. 물론 이러한 파악은 식민지 지배가 한국 '민족' 대 일본 '민족'의 구도로 단순히 이해되는 것에 대한 좌파적 반격으로서 의미있겠지만, 당시에 엄연히 작동하던 민족적 기준에 의한 차별을 간과하는 것을 넘어 일본의 '죄없는 민중'이라는 낭만적인 민중상을 그리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한편 '저능한 제국'이라는 글에서는 죄없는 민중이라는 상은 다시 민족이라는 구도를 통해 나타난다. 여기에선 "미국은 일단의 유럽 무뢰배들이 수천 년 이상 자연과 조화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학살함으로써 생겨났다"라고 되어 있다. '미국의 민중'을 고려하지 않고 미국 전체를 집단 유죄화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의 제국 미국이 어찌되었든 간에, 적어도 미국이라는 국가의 탄생 장면은 김규항이 기술하는 식의 과정만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어가면서, 나는 그가 복잡한 사태를 단순하게 쓰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그가 거처하는 진보의 삶의 자리를 나는 온전히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진정으로 불편했다. 또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소박한 욕망과 지극히 치졸한 욕망 사이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하는 '불편한' 생각을 줄곧 했다.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 대한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그의 혁명에 대한 정의는 그래서 백 번 옳다. 그러나 그런 혁명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국익'이란 모든 정당한 갈등들을 뒤덮어버리는 주술이라는 것, 한국의 교회란 지배계급을 위해 예수를 팔아먹는 상점이라는 것 따위의 지적에 통렬해 하거나 하지 말자. 오직 저 '불편한' 아포리아들을 간직하며 가는 것만이, 이 책을―자신의 "얼마간의 사회의식을 배출하는 통로로 삼지 않"으며―제대로 읽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제대로 읽기는 다시 세계의 온갖 모순과 역설과 복잡성을 종합해 내려는 험준한 길을 지나야 할 것이다. 나의 감상은 여기까지이다. 

한편 이 책은 '좌파'라는 말이 "친북=좌파 정권"과 같은 용례로 쓰이거나, 그래서 좌파 하면 왠지 나라를 말아먹을 것 같은 세력으로 여겨지게 하는 언어의 함정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좌파라는 것이 비록 계급의 언어를 통해서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보편적 정의감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김규항의 글을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모르는, 앞으로 이 책을 읽을지 모를 익명의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사족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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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을 쏘다니다 보면 의외의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의외의 책들 중 한 부류는, 잘 알려진 인류학자들의 저작인데 설마 그것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책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책들은 대개가 인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무슨 의미일까? 국내의 인류학자들은 그런 책들이 번역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혹은 시간이 없거나, 번역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번역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걔중에는 인류학의 고전이라 할 만한 책도 있다. 어쨌든, 다분히 주관적인 분류이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렇게 국내에 나와 있는 의외의 인류학 서적들을 모아보기로 한다.

 

 

 

 

 

 

 

 

 

사회인류학의 이해, 에반스 프리차드, 최석영 역, 서경문화사, 1996

원시사회의 구조와 기능, 래드클리프 브라운, 김용환 역, 종로서적, 1975.

누어인, E. E. 에반스 프리차드, 탐구당, 1988

원시신화론, 말리노프스키, 민속원, 1996

 

 

 

 

 

 

 

 

 

 

 

 

 

 

 

 

 

 

 

 

 

 

 

 

 

 

 

 

 

인류학과 문화비평, 조지 마커스 외, 유철인 역, 아카넷, 2005.

 

 

 

 

 

 

 

 

 

 

 

 

 

 

 

 

 

 

 

 

제의에서 연극으로, 빅터 터너, 이기우&김익두 역, 현대미학사, 1996.

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 여성, 곡창, 자본, 클로드 메이야수, 김봉률 역, 까치,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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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2-2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책들 많네요.
잭 구디 책이 다 번역되어 있고 ...

한현 2006-02-23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도 발견하고 좀 놀랬는데.. 지금 빌려서 앞부분을 좀 봤는데 왜 번역했는지 모르겠어요..ㅎㅎ 원서가 발간되자마자 그 해에 번역했던데..

비로그인 2006-04-17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학과에서는 (대학원은 당연하고) 어떤 대학들은 학부때부터 원서를 읽으니 번역의 필요성을 못느끼죠. 인류학의 문화이론도 원서 복사한거로 수업하다가 학생들의 요청으로 뒤늦게 번역된 책입니다.

포월 2006-11-01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특정학과에서 원서로 '소비'하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겠죠.^^

적린 2007-02-2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말 의외의 책들이 눈에 띄네요. ^^

루나 2011-03-2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픈 칼라하리나 문화와 진리(레나토 로살도) 등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