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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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사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외국문학 시장을 휩쓴 일본 현대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는 셈이고(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것은 제외하고), 그래서 자못 커다란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이름이 요시모토 '바나나'라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건 스스로 붙인 이름이건 대단하지 않은가. 젊은 감각의 작가 이름으로는. 그렇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에게는 특정한 감각이 있었고, 그녀의 소설에는 어떤 스타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다지, 그것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건 아니었다. 내가 새로운 종류의 소설을 서점 귀퉁이에서 꺼내들면서 바랐던 건 무엇이였냐면, 비록 그런 욕망은 언제나 공백을 향하기에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게 어불성설일지는 모르나, 어떤 쿤데라다운 재기가 넘치는, 그러나 쿤데라처럼 피로를 안겨주지 않는 다소 부드러운 발랄함이랄까, 그런 문체, 그런 상상력을 내심 바랬었는데. 아쉽게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그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그녀의 글은 너무나도 쉽게(혹은 다행스럽게) 이미지로 환원되었고, 줄거리로, 드라마 플롯으로 전치되는 것 같았다. 말마따나, 요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아서 보곤 하는 일본 TV 드라마의 감수성과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연애드라마, 라고 말하면 또 어떤 스테레오타입을 갖고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여하간, 내가 최근에 느끼는 바의,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들은 분명 한국산 드라마들보다는 여러 면에서 한 수 위라 여겨지지만, 그것들이 건드리는 감성으로부터는, 난 좀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것이다. 아니면 정말 거리가 있거나. 그러나 그것을 여기서 또 섣불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난 그 정체를 모르겠다. 분명 어떤 '소녀적 감성'이 손에 잡히는 이 책 한 권을 감싸고 있는데, 그냥 마음편하게 그렇게 치부하면 되려나.

조그만 판형에, 200페이지가 될까말까한 얇은 분량에, 표지 디자인은 흑백의 장미 꽃 문양이 여러 개 그려진 것으로 들고다니는 것 자체가 하나의 멋진 악세서리인데, 한 이틀 들고 바깥을 나다니고 나서야 알았지만 나부터가 그런 악세서리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물며 어느 중년 남자가 찻간에서 스포츠신문 대신 이런 책을 들고 읽고있을까.

결국 이 책의 타겟은 약간의 애잔함과 알콩달콩함으로 버무린, 조금 세련되다 싶은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는 소녀들이라, 그렇게 간단히 얘기해 두면 되는 것일까. 조금 찜찜하지만 달리 말할 도리도 없다. 썩 예쁘다고 할 수 없는, 그래서 되려 친한 말동무가 되어줄 것만 같은 사진 속, 바나나 언니가 이야기를 들려준댄다. 그리 부담스러운 길이도 아니고 말이다.

'둘의 마음은 죽음으로 에워싸인 어둠 속에서,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커브가 지금 거의 맞닿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 지나면 서로 다른 회로를 따라 떨어지고 만다. 지금 여기를 지나면, 두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영원한 친구로 남는다.' (122-123)

<키친>과 <만월>의 '나', 사쿠라이 미카게는 어렸을 적 부모와 할아버지를 잃었고, 급기야는 마지막 남은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미카게에게 하나의 청년이, 소설에서 아무런 사심없이 다가온 것처럼 묘사되는, 다나베 유이치가 접근한다(착하고 사심없는, 또 때로는 상처받은 마음에 우수에 빠지는, 그래서 매력적이게 되는 남자, 이것만은 진정한 스테레오타입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정부와 짜고 유이치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죽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의 정부, 에리코는 그 후 여장을 하고 게이 바에서 일하며 유이치를 키운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스토커에게 살해당한다. 고아가 된 젊은이들의 절망, 철부지처럼 엉엉대며 울 수도 없는 그들에게 엄습하는 우울함, 그리고 그에 더한 야릇함. 세 편의 요시모토 소설의 주제, 모티프, 그리고 문체는 저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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