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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손석춘 / 개마고원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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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기사는 어느 경우에도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단지 사건만을 보도할 뿐이다.' 이것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김용옥이 한 말입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을 읽다보니 이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사실(事實)이란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 사건(事件)이란 '문제가 되거나 관심을 끌만한 일'입니다. 결국 신문은 사실 -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사건화를 통해, 다시 말해 사실들에 가치판단을 내린 그 결과물을 보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판단의 과정이 기자가 취재할 사건을 선택하고 취재해서 기사를 쓰고, 편집기자가 표제를 달고, 편집국장이 신문 전체를 검토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편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집이라는 과정 속에는 그 나름대로 보편타당성을 지향하는 언론인들의 가치판단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정치 권력의 위협, 광고주의 압력, 언론자본(신문사 모기업)의 요구 등의 외적 요인들이 개재되고 서로 착종하여, 신문 편집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의 사상(事象)을 왜곡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기사'가 아닌 '편집'을 읽어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신문 읽기의 혁명이란 지면을 분석하여 신문 편집 과정을 읽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매일매일 읽는 신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비판적인 독해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도 다소 비판적인 견지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손석춘씨는 특정한 당파적 입장에서 자유로운지. 저는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저자가 독자에게 끊임없이 특정한 신문을 '다시', 또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문 읽기에 대한 이러한 좋은 저작이 진보일간지라는 한겨레 신문 외부에서 나왔으면 했는데 아쉽습니다. 어쨌든 사서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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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
박지향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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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연히 그와 단둘이 있게 된 적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나는 그냥, '도대체 어떻게 총을 그렇게 정확하게 쏘세요?' 라고 말을 건넸다. 그 작은 하사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 나는 특별한 게 있지. 이건 양철 표적이 아니다, 이건 제국주의자다, 그렇게 속으로 말하는 거야. 그래서 분노로 부글부글 끓으며 과녁 복판을 직방으로 맞춘다니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나오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군인은 그렇게 총을 쐈다. 양철 표적이라는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추상적인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함으로써, 표적에 총알을 맞추는 행위는 더욱 분명해 졌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바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국주의라는 단어는 도덕적인 단죄의식에서 나오는 자동적인 거부감을 자아내기 쉽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쳐지는 국사는 일제의 '간악하고 교활함'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일제하에서 겪어야 했던 민족적 시련과 거기에 분노와 양심으로 저항한 '독립운동'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그 자신은 무엇이었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전지구적 현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만은 부족하다. 피지배자였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 '제국'이 어떤 시각으로 자신들의 팽창을 인식하고, 또 도덕적으로 정당화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였던 여러 나라 사람들 또한 피지배자들이 제국주의 경험을 이해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은 앞서 말한, 제국 자체가 끌어안은 제국의 의미―제국의 팽창동기와 경제적 수익성, 통치 수단이면서 현지의 엘리트인 협력자의 존재,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의 제국 경험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어느 정도 성실한 서평으로 『역사비평』2000년 가을호에 실린 유재건 교수의 「제국주의, 무엇이 신화이고 무엇이 현실인가」라는 글이 있다. 다소 '삐딱한' 문체의 글이지만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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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정옥자 외 지음 / 효형출판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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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나는 이 책이 기초했다고 하는 동아일보 연재기사 '새로 쓰는 선비론'을 읽은 바 없다. 그러나 '새로 쓰는 선비론'이나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와 같은 제목에서 그 연재기사나 이 책이 무엇을 함의하고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선비 없음을 개탄하는 한편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지식인의 모범을 조선의 선비들에게서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선비들의 삶 속을 들여다보면서 지금 여기 이 땅의 풍요로운 자양분으로 삼기 위함'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짐작은 빗나간 것이었다.

조선의 선비를 논하는 행위가 '퇴행'이 되지 아니하려면 응당 이 시대의 '선비다움'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스물 세 명의 '선비'들을 논하면서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가. 이 책을 기획한 이광표는 작금 선비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감히 이 책 속에 선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했는데, 과연 이 책 속에 선비는 있는가.

이 책 속에는 선비가 없다! 선비다움의 현재적 함의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선비론은 읽을 가치가 없다.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사적 견지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평하고 현재 우리 사회가 봉착한 상황 우리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반성에서 그들을 우러르지 않는 선비론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선비라는 어설프고 두루뭉실한 용어로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의뭉스러운 책이며, 호사가적 취미의 저널리스틱한 시도이다. 물론 이 책의 각 장을 집필한 사람들은 사계의 전문가들이며 문장가들임에 틀림없지만 그 탁월한 인물들이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논의를 위한 한 마디의 대화도 한 치의 입장 조율도 없이 '선비론'을 썼다는 것, 아니 각각의 '선비'에 대해 각자가 쓴 글을 그저 뭉뚱그린 것은 이 책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지르한 편집덕분에 심심풀이 땅콩으로 제격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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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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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다. 이 책을 고르게 된 것은 『생은 다른 곳에』를 읽고 있을 무렵 인터넷 서점에서 '밀란 쿤데라'를 검색했는데, 쿤데라 작품으로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책 이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이 '책그림책'이다. 분량을 보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아 도서관을 찾았다.

서가에 꽂힌 이 얇고 길쭉한 책은 사실 쿤데라의 책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마흔 여섯 명의 작가들이 각자 한 페이지 정도의 글을 쓴 것이었고 밀란 쿤데라도 그 중의 한 사람(책 속에서 두드러진다고도 말할 수 없는 한 사람)이었다. 쿤데라가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지명도가 높은 작가니까 판촉 목적으로 지은이 항목에 '밀란 쿤데라 외'라고 써 놓은 것 같다.

여하간 유쾌한 책이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크빈트 부흐홀츠가 그린 그림들 46장을 유럽 전역의 작가들에게 보내 한 마디씩 써 달라고 했다. 이 책은 그 그림들과 작가들이 보낸 답장이다. 그의 그림들은 자연스런 장면, 자연스런 풍경들을 그린 것이 아니다. 약간 심오하고도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 하고 비현실적이고 기묘한 장면들 투성이다. 하지만 파스텔톤에 하늘이 은은한 색상으로 넓게 펼쳐진 모습 때문에 포근한 느낌도 준다.

번역한 사람의 해설은 그림들의 가지고 있을 법한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의 해석과 작가들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 대한 논평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이 책읽기가 유쾌했던 것은 그러한 의미의 우러남이 아닌 다른 것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가 그려주는 심상을 떠올린다. 그 이미지들은 잡힐 듯 말 듯, 캔버스에 고정될 듯 형체없이 사라져 버릴 듯 위태로우면서도 그 아른거림 때문에 또한 아름답다. 삽화가는 역시 독자의 상상력으로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 삽화들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든 이미지들과 유사하다.

글을 읽고 삽화 그리기. 그렇다면 그런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글'은, '이야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머릿속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래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핵심적인 모티프, 어떤 은유적 의미를 드러내는 풍경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발동한다. 그래, 이것은 삽화를 보고 글쓰기, 간단히 말하면 글쓰기이다. 이렇게 쓰인 글이 다시 심상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런 점에서 역시 그만의 재치를 한껏 발휘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워했던 건 그것, 이미지와 글쓰기가 무한히 연결되는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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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
리햐르트 반 뒬멘 지음, 최용찬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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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학계와 대중을 불문하고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문화'라는 용어가 우리 삶의 총체적 제 영역들을 새로이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대두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학에서도 기존의 역사학에서의 지향과 방법을 비판하며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문화'를 다루고자 하는 문화사가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 수십 년 간 뚜렷한 성과를 남긴 새로운 경향의 역사연구들, 즉 미국의 신문화사나 이탈리아의 미시사, 프랑스의 심성사, 독일의 일상사와 역사인류학 등을 고정적인 하나의 범주로 묶어 동질적인 단위로 사고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는 일이겠지만, 이들 사이에는 분명 몇 가지 공유하는 속성이 있다.

기존의 정치·경제사와 사회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보통 사람의 행위와 가치 그리고 그들이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와 같은 지금까지 그러한 역사학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영역에 주목한다는 것, 문화인류학의 이론과 연구 성과들을 직·간접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개 방법론적으로 미시적인 단위에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경향의 역사학이 갖는 이러한 속성은 곧 근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반성에서 시작한다.

즉,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기술 혹은 해석한 바대로 과거(혹은 '전통')가 오늘날의 근대를 목적론적으로 지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근대 때문에 역사에서 배제된 다양한 지향의 과거를 고찰하는 것이 새로운 역사학의 과제이다. 이 책은 역사학계 내에서의 그러한 새로운 움직임 중 하나로 독일의 역사인류학의 발전과정과 시각, 연구주제와 과제들을 개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따져 볼 것은, 새로운 역사학에 대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보다도 이러한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말로 굳이 번역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신문화사로 통칭되는 새로운 경향의 역사학이, 다른 부문에서의 혁신적인 시도들과 결합하여 인간과 그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서구 지성사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역사학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기도 전에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문제의식을 떠안게 될 우려가 있지만, 방법론적인 면에서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봤을 때, 이것이 그러한 자극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학문적 논의에도 민족주의적 동기는 있다. 프랑스의 사료를 다루는 것만이 프랑스의 역사학인 것은 아니다. 역사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프랑스만의 독특한 방법과 이론이 있다면 그것도 '남의 나라'의 역사와 구별되는 프랑스의 역사학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 책은 독일 역사학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일의 지식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뿐,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시사점을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인다. 특히 저자가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새로운 역사학에서 독일의 역사학계는 다소 주변적이고 미국과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와 같은 독일 이외의 국가들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우리는 주변국의 문제의식까지 수입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책에서의 언급이 주요 연구 성과와 학자 이름의 나열에 그치고 있고, 독일에서의 시도들에 치중하여 독일 바깥에서 나온 굵직굵직한 연구 서적에 대해서는 어떤 심도 있는 해석이나 평가도 없는 대신, 새로운 경향의 역사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기어츠나 부르디외 혹은 살린즈 같은 학자들의 사진을 여러 장 실어 놓은 것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한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지금 물밀 듯이 국내에 소개되고 또 그럭저럭 팔려나가고 있는 '문화' 또는 '문화사' 관련 서적들에 '묻어서' 같이 휩쓸려 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새로운 역사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해당 분야의 고전적인 저작들을 직접 읽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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