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브람스 : 피아노 협주곡 1번 & 여섯곡의 피아노 소품 Op.118 [디지팩]
브람스 (Johannes Brahms) 작곡, 정명훈 (Myung-Whun Chung) 지 / Accentus Music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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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말하자면 피아노가 가미된 관현악 혹은 교향곡이라 불리어도 무방할 곡이다. 특히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주고 받는 치열한 변증법적인 전개는 브람스의 무게감과 진중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2악장과 3악장의 평이함(!)에 비해 1악장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인해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매번 큰 숙제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김선욱의 피아노와 정명훈의 지휘로 이루어진 드레스덴 스타츠카펠의 연주는 이 곡이 지닌 여러 매력중에서 감성과 자연스러움을 돋보이게 만든다. 감성은 김선욱의 몫이고 자연스러움은 정명훈의 몫일 것이다. 정통적이면서도 독일적인 사운드를 내는 북구의 자랑인 드레스덴 스타츠카펠은 특유의 무게감을 내려놓고 피아니스트와 지휘자의 흐름에 소리를 내어준다. 금관의 화려함과 현악의 날카로움을 뒤로 한 채 장중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매력은 적지 않은 시간 정명훈 지휘자와의 호흡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명반을 꼽자면 에밀 길레스와 오이겐 요훔의 베를린 필하모닉의 강렬함과 무게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연주와 클리포드 커즌과 조지 셀의 런던 심포니가 함께 했던 다채롭고 밝은 해석이 돋보이는 음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선욱, 정명훈, 드레스덴의 조합은 길렐스의 무게감과 커즌의 밝은 표현 중간에 위치한 감성적인 해석으로 봐도 좋을 듯 하다.

팀파니의 끊이지 않는 트레몰로로 시작되는 1악장의 첫 부분은 대부분의 관객을 압도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 지휘자의 드레스덴은 진중한 무게감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관현악의 다채로운 소리를 이어간다. 이는 3분 43초(91마디)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김선욱의 피아노가 감성적이기에 조화로운 구성이라 할 것이다. 이후의 10분 51초에 먼저 치고 나가는 피아노 파트에서도 김선욱은 브람스 특유의 마초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감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20분 55초의 코다를 지나 악장 끝까지 가는 부분은 템포가 빨라지며 관현악과의 리듬을 절묘한 호흡과 명징함으로 브람스 특유의 내밀한 화려함을 보여준 부분일 것이다.

2악장에서 드러나는, 고독하지만 감성적이고 우울하지만 아름다운 멜로디는 김선욱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파트일 것이다. 김선욱은 베토벤같은 정통 표현에 능한 연주자이지만 브람스에서는 악보를 따라가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곡을 숙지한 상태에서 자신이 이해하는 브람스의 감성을 자연스럽게 펼쳐놓는다. 다소 무뚝뚝한 브람스의 베일을 벗어던지고 가슴이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브람스는 교향곡도 그러하지만 협주곡의 경우에도 – 바이올린 협주곡과 이중협주곡에서 드러나듯이 –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진을 빼놓을 정도로 1악장에서 치열한 변증법적인 전개를 하곤 하지만 3악장에서는 모든 것이 잘 정리된 주제가 뚜렷히 제시되는 표현을 제시했다. 3악장은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조화스런 협업이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악장일 것이다. 김선욱과 정 지휘자의 드레스덴은 이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돋보이는 점은 피아노의 중저음과 현악의 – 첼로와 더블베이스 – 저음 소리를 잘 살려줌으로써 든든한 배경음이 드러나도록 했다.

김선욱은 피아노 협주곡 1번 외에 6개의 피아노 소품을 실음으로써 그가 지닌 브람스 해석의 매력을 추가했다. 익히 알려진 A장조 인터메조의 멜로디는 물론이고 F장조 로망스의 조밀하고도 치밀한 서정성은 김선욱의 손끝을 통해 멋지게 표현되었다.

이 연주가 열렸던 2019년 9월, 예술의전당의 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악상투스 레이블은 이날의 연주를 유려한 녹음으로 음반에 잘 담아내었다. 우리에겐 이미 유려한 전개와 정제되고 성숙한 해석의 백건우, 엘리아후 인발과 체코 필하모닉의 멋진 예가 있긴 하지만 이 새로운 음반은 김선욱이라는 젊은 감성이 리즈콩쿨 우승 이래로 그 레파토리의 진화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례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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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0-09-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꺅~음악 리뷰까지♡
율리시즈님은 음반도 다양하게 들으시는가 봅니다.비교 예시까지! 음악은 글로 표현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풀어낼 수 있군요.
예당은 언제 다시 가볼수 있을까 싶네요.멀리~ 이사를 와서요. 마지막으로 갔던 공연이 엘 시스테마였던 것 같아요. 대신 라디오 클래식 fm듣는걸로 위안을~^^

율리시즈 2020-09-15 15:32   좋아요 1 | URL
음악을 오래 듣다 보니 간단한 감상 정도는 정리하기도 합니다만^^ 아. 클래식도 좋아하시는 군요. 엘 시스테마 두다멜 공연때 저도 갔었습니다. 클래식과 국악, 고전음악은 다 좋아합니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스토리인 시리즈 5
황서미 지음 / 씽크스마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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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지금 그걸 수녀님이 가져가서 드시는 건가요.”

“내 수박, 내가 맘대로 못 먹습니까?”

“큰 건 다른 분들게 양보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나도 먹을 짬 됩니다.”

“잠깐만요, 몇 축(수녀원에서 쓰는 기수용어)이시죠?”

“밥 먹다 말고, 그건 왜 묻고 난립니까?”

“대답이나 하세요.”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그리고는 손에 든 수박을 앞 사람 보란 듯이 입 쩍 벌려 베어 무는 수녀님. 그리고 열 받아서 벌떡 박차고 일어나 식당을 나가버리는 또 다른 수녀님.


- 황서미 지음, 도서출판 씽크스마트 <시나리오 쓰고 있네> 중에서, p.100.


황서미 작가가 다채찬란했던 인생수업중(?) 잠시 수녀원에 있었던 에피소드 중의 일부이다. 나름 세속에서 떨어진 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생을 순종하며 살기로 맹세한 수녀들의 고립된 일상이 오랜만에 주어진 수박 한 통에서 폭발(!)하는 장면에서 나는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먹으려는 욕망과 그 와중에 지위를 내세우려는 욕망과 서로간에 쌓였던 어떤 것들을 수박을 핑계로 충돌하는 상황은 살아있는 페이소스 그 자체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첫 장을 펼친 이후부터 최소 한 두 번은 책을 놓고 딴 짓을 하거나 완독하는 데에 2~3일 걸릴 수도 있는데 이 책은 집어들자마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대단한 재미와 흡인력이다.


다섯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이혼이라는 ‘외적 증표’가 작가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별의별 호기심과 걱정과 우려를 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본인 작가는 초연한 듯 하다. 말하자면 황서미 작가의 <시나리오 쓰고 있네>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영화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실화버전이다. 그러나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실화인, 그것도 해피엔딩의 끝이 좋은 너무너무 긍정적인 버전의 이야기이므로 영화와는 또다른 이야기의 매력을 준다. 이야기의 소재로 보자면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평범하지 않고 극적이고 비극적이기까지 한 데 이 경험들을 초연하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이겨내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거의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마인드이다. 


사회초년 시절의 광고 카피라이터부터 해서 수녀원에 들어간 얘기, 치킨회사에서의 경험, 보험설계사, 영어유치원, 야설교정편집자(!) 등등 조금은 특별하더라도 누구에게나 한두번 있을 법한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명의 남자를 사랑한 얘기와 장애를 지닌 아들과 예민한 사춘기의 딸의 이야기까지 줄줄이 이어지다보면 이 일이 한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이 책을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내 생각에 이 책의 이야기들은 한번에 끝내기엔 너무 아깝다. 드라마 시리즈로 만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이 책에서 나오는 소재 자체가 흥미롭긴 하지만 정작 이 책의 강점은 용기와 사랑이라는 두가지 삶의 주제를 제대로 체험하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이다. 더 나아가서 이 경험을 관찰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작가의 시선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각자의 이름을 지닌 역할을 하는 배우라는 것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적어도 희노애락의 감정에 빠진채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교훈도 배우지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어느새 끝날 수도 있는 인생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건 아니며 인생이 아무리 기쁘더라도 그것조차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삶이 한가지의 양식만이 주어진다면 육신은 이어지더라도 영혼은 지루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용감한 영혼은 자의반타의반 자신에게 주어진 온갖 문제들을 부딪히며 이겨 나가고 삶과 인간을 점차적으로 더 이해하고 인식의 폭을 확장해 간다. 잠재의식적으로 정신의 진화는 영혼의 기록으로 축적이 된다. 


적지 않은 이들은 작가의 고단하고도 다채로운 인생의 여정에 비해 보상이 적어 보이거나 보란 듯이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황서미 작가는 이미 크게 성공한 존재이다. 재물로나 권력으로나 크게 성공한 이라도 육신을 떠날 때는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육신의 내 손에 쥔 것이 아무 것이 없더라도 내 정신과 영혼에 더없는 인생의 경험을 한 존재라면 지상을 떠난 후에 자신의 삶이 더없이 귀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더없이 극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이야기의 경험과 가치를 관찰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작가의 영혼은 어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는 성숙한 존재이다. 이보다 더 큰 인간존재의 성공이 어디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보면 이보다 더한 경험과 에피소드를 지닌 사람들도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 다만 그 경험의 역할을 스스로 바라보는 시선을 지닌 영혼은 흔치 않다. 그 시선을 지닌 영혼의 기록이 예술이 되고 문학이 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어쩌면 우리 주위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해 내가 조금은 더 편하게 살았네 라는 위안을 넘어서서 작가가 스스로의 삶을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시선만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파란만장한 나의 삶도 실패가 아님을 알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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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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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모든 면에서 가장 겁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쓴다는 거,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감히 절대 엄두를 낼 수 없는 것까지.”

- 녹색광선 출판, 장소미 역,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중에서, p.140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설레는 이유는 실제로는 갈 수 없으나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영원한 동경으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상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기대감으로 가고 싶은 곳을 담아둔 마음도 행복하다. 그곳을 다녀온 직후의 기분이라면 기뻤거나 그저 그랬거나 아쉬운 마음으로 갈라지겠지만 그때의 그 마음은 추억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을 것이다. 추억의 공간이 된 마음은 만족도가 높아서 혹은 아쉬웠던 마음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그곳을 들를 수도 있겠지만 첫 만남과 도착의 경험과 그 기분은 변하지 않고 추억의 박제로 남는다. 이런 추억을 지속하거나 멈추게 하는 것은 어떤 마음으로부터 비롯될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타키니아에 존재하는 작은 말들을 구경하러 가고 싶다는 자그마한 에피소드를 제목으로 두 쌍의 부부와 한 명의 싱글이 이탈리아의 휴가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뒤라스의 이 작품 제목은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나 하일지 감독의 영화 <경마장 가는 길>처럼 제목의 대상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다. 가고 싶지만 아직은 가지 않은 곳 혹은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은 만나지 못한 그 무엇의 이야기와도 같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마도 나른함과 권태 그리고 약간의 모험이다. 나는 이 분위기에 약간 휩쓸렸는지 전반부의 어느 정도를 읽을 때까지 독서의 집중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마치 잔잔하기 그지없는 특유의 일본영화를 볼 때와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 점은 작품이 느슨해서가 아니라 작품에서 흐르는 공기임을 서서히 알아차렸다. 마치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의 3악장인 들의 풍경이 나올 때쯤에는 졸음이 몰려오는데 이는 그 작품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꿈과 환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작품의 공기에 이성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한 셈이었다. 뒤라스 하면 예전 영화인 <연인>과 <히로시마 내 사랑>만을 간신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작품으로 뒤라스의 문학이 주는 매력에 새로 빠졌다.

작품에서 소개된 대로 (아마도) 프랑스인 다섯 명(아이와 가정부를 포함하면 7명)이 휴가를 떠난 곳은 이탈리아의 폐쇄적인 바닷가 마을, 앞으론 바다가 뒤로는 산이 코앞에 버티고 있고, 이곳과 세상을 잇는 곳은 포장도 되지 않은 7킬로미터 남짓의 흙길뿐이며 해변으로 향하는 길엔 그늘이 되어줄 나무 한 그루 없고 그나마 서 있는 유일한 플라타너스 한 그루는 가지가 전부 잘린 채 죽어버렸다. 이곳으로 휴가를 온 자크와 사라 부부, 루디와 지나 부부, 싱글인 다이아나는 서로 오래된 친구들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휴가는 짧게 주어진 특별한 체험이라기 보다는 2~3주 혹은 한달 가까이 지내는 조금 다른 공간에서 누리는 연례행사에 가깝다. 이는 지금의 한국에서 휴가가 주어졌을 때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동안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말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전투(!) 치르듯이 많은 곳을 들르고 추억에 담는 그것과는 대척점의 지점에 있다. 1950년대의 아날로그적인 환경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유럽의 휴가는 한달에 가까운 넉넉한 기간에 집과는 다른 공간에 가서 쉬다 오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유럽인들이 그러하긴 하지만 이로 인한 배경과 에피소드는 여기 지금의 한국과는 다른 색깔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명히 휴가를 오긴 왔는데 고립된 공간으로 온 듯한 곳에서 나른함과 권태가 지배하는 이 분위기는 부부와 친구들과의 밀접한 시간공유로 인해 일상성은 늘어가고 무자비한 더위는 이를 부추긴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서로의 개성을 유감없이 뽐내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이 개성들의 표현에 덧붙여 산속 지뢰제거를 하다 죽은 청년의 에피소드와 멋진 보트를 소유한 남자의 등장은 이 나른함과 권태의 수면에 조그만 파문을 일으킨다. 지뢰제거로 목숨을 잃은 청년의 노부모는 육신의 파편이 덜 수거되었다는 이유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망신고서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작품의 주인공격인 사라는 남편인 자크가 아는지 모르는지 근사한 모터보트를 소유한 남자와 바람이 나려던 차이다. 이런 배경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은 여러 희노애락의 감정을 대화로 이어간다. 이런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소재 그 자체로는 여지없는 통속드라마이다. 통속드라마가 주는 일상성과 인물들의 대사들은 한국드라마도 그에 못지 않지만 뒤라스가 던지는 이야기는 통속성의 수평선에 머물지 않고 유머와 통찰과 여백 사이에 번득이는 삶의 교훈, 지혜의 편린이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지뢰로 인한 청년의 죽음이나 근사한 모터보트를 소유한 남자와의 불륜은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한국이라면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없을 정도로 묘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뒤라스는 전체의 작품기조를 전혀 흔들지 않는다. 매우 특별해 보이는 사건들도 이 소설에서는 나른하고도 권태롭고 지겹기까지 한 삶에서 서로가 금방이라도 헤어질 듯 서로에게 상처가 될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에게 느리지만 조금씩 성찰할 계기마저 준다. 일상과 모험 사이에서, 일종의 의도된 폐쇄된 듯한 휴가지에서 무더위를 견뎌가며 매우 가까운 이들끼리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도시에서 치열한 일상을 겪는 이들의 어쩌면 또다른 단면일 것이다.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통속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반짝이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울다가 웃다가 생각하다가 번뜩이는 빛같은 교훈도 얻는 이런 전개는 뒤라스와 적지 않은 여성작가들이 지니는 강점일 것이다. 젠 체하고 무겁고 거대하고 더 나아가 마초적이기까지 한 일부 남성작가들에게서는 이런 통속성의 소재로 삶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무지하다고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쓰여진 이 작품의 매력을 바로 느끼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점점 더 자극적이고 반전적이고 서스펜스와 스릴을 요구하는 현대의 이야기 수요에서 아마도 이런 경향은 더할 것이다. 더군다나 유럽 특유의 장기적인 휴가와 우정과 사랑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그들의 문화는 아직까지 낯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속적 소재이든 그것을 넘어서든 문학을 통해 삶과 인간의 탐구를 놓치지 않는 작가와 작품을 독자들은 알아보기 마련이다.

여행이 지금 나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과 같이 독서는 지금 있는 시공간을 벗어나지 않음에도 다른 곳으로 잠깐 여행을 하는 것과도 같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1950년대 몇몇 유럽인들은 이런 일상과 휴가를 즐겼구나라는 이색적인 체험을 느낌과 동시에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름없는 희노애락을 가지며 삶을 누린다는 것을 들려준다. 또한 대개의 훌륭한 작품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들려준다. 다른 대륙, 다른 시간에서 건너온 이야기이기에 이국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색다름 너머의 일상성과 가치를 들려주는 뒤라스 작품의 매력을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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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0-09-08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싶었는데요, 율리시즈님 글 읽으니 느리지만 애틋한 느낌이 드네요^^여름이 가기전에 읽어보려고 했는데요. 벌써 가을이군요 ㅎ

율리시즈 2020-09-14 18:06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는 분께서 좋은 반응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후기에서는 간단히 썼지만 실제로 보면 프랑스식 유머와 대화에 빵빵 터지는 부분들이 여러곳 나옵니다 ㅎㅎ 어려운 시국에 좋은 책과 좋은 시간 되시길요~

청공 2020-09-14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즈님. 글 넘 좋아요. ~^^
감상과 줄거리를 어쩜 이리 잘 녹여내시는지요. 앞으로도 감성적인~ 책리뷰 기다리겠습니다^^
에구~저는 한참 더 열심히 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ㅠ

율리시즈 2020-09-14 20:42   좋아요 0 | URL
에고, 청공님, 별 말씀을요...
전 바쁜 일 와중에 가끔 독서하고 후기들을 급한게 쓴것들이 대부분이라 글이 제 맘엔 좀 거칠고 덜 다듬어진 것들입니다^^
청공님을 비롯한 알라딘에 내공이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 제가 오히려 많이 배웁니다.
사실 이 세상의 책이 너무 많은데 좋은 것 찾아 읽기도 바쁜데 멋진 후기 남기는 분들도 멋지지요. 그렇지만 후기도 누구에게 보여주기보다 스스로 정리하고 만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도 정리가 잘 되면 남보기에도 좋겠지만요.
종종 뵙겠습니다~
 
뉴노멀의 철학 - 대전환의 시대를 구축할 사상적 토대 코로나 팬데믹 시리즈 2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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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를 문제로 파악하고, 그것을 정리된 형태로 제시하고, 나아가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단초를 찾아내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문제가 아닌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문제일 수 있다. 남이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 것을 예민하게 포착해서 그것이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자가 철학자다. 아니, 꼭 철학자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창조의 최전선에 있는 자들은 모두 이런 종류의 일을 행한다. ’

- 김재인 지음, 도서출판 동아시아, <뉴노멀의 철학> p.153에서

대한민국은 구한말의 혼란기와 혹독한 일제 강점기와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거치며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다시 생존이나 할 수 있을까 라는 극한 상황에서 산업화,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면서 어느 국가에서도 찾기 힘든 사례를 만들며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그러나 한국의 사례와 같은 빠른 성장은 여러 후유증과 문제점을 낳기 마련이다. 다만 과거였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채 세월이 흘렀을 테지만 지금은 성장의 이면에 놓여진 문제점을 인식하고 알리고 개선하는 데에도 할애하는 시대가 되었다. 저자의 언급처럼 문제를 제대로 드러내고 개선과 새로운 창조의 방안을 모색하려는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로 서구의 과학기술과 산업등을 포함한 문화를 빠르게 따라잡기 바빴던 한국은 지금 와보니 여전히 서구보다 못한 범주가 수두룩하지만 적지 않은 분야에서 선진국과 나란히 혹은 선진국보다 나은 분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닥친 코로나19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셧다운에 가까운 충격을 일으키면서 우리가 종래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는 교훈을 던진다. 코로나19 이전의 삶의 방식과 가치가 노멀(Normal)이고 코로나19 이후에 형성될 방식과 가치가 뉴 노멀(New Normal)이라고 한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현재는 노멀과 뉴노멀 사이에 놓여진 혼란기 혹은 전환기에 살고 있는 셈이다. 공교롭게도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한국은 객관적으로 세계인이 한국을 평가하는 시기를 거치면서 뉴노멀의 방식과 가치를 이루는데 주요한 역할이 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저자는 지구촌이 이제 뉴노멀의 시대로 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보며 그 세가지의 근거로 기후위기, 인공지능,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을 든다. 이 세가지의 사항은 그 하나하나가 인류가 초래하고 만든 것을 넘어서서 문명의 토대를 새로이 구축해야 하는 거대 과제일 것이다. 저자는 이것의 실용성과 현실성 너머로, 부제의 내용대로 ‘대전환의 시대를 구축할 사상적 토대’를 모색한다. 저자는 이를 위한 논의에서 영토와 새로운 거버넌스와 탈근대적인 가치, 배움과 학문에 대해,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인문학에 대해, 인문,과학,예술을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뉴리버럴아츠 등의 6가지 주제를 제시한다. 책을 통한 저자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핵심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영토에서 살며 사회를 형성하므로 자유라는 개념은 개인의 자유와 영토에서 주어지는 사회적 자유의 균형성이 필요하다. 이는 서구사회가 가끔 지나치게 강조한 프라이버시의 반성이기도 하다. 안전한 영토는 삶의 영위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인 셈이므로 방종에 가까운 자유나 타인을 침해하는 자유는 사회적이고 안전한 영토를 위한 범위 안에서 균형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혹은 지구촌의 차원에서 이상적인 체제(거버넌스)를 향한 노력과 개선은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데 한국은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나듯이 다른 나라들에게 유일하거나 최고는 아닐지언정 매우 유용하고 모범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여태까지 한국에게 있어서 서구화와 근대화는 관념적인 것보다는 생존을 위해 따라잡기 위한 필수항목에 가까웠지만 저자가 언급한 대로 ‘탈근대는 탈식민주의를 함축한다 (p.70)’. 이는 서구의 근대국가가 타국에 대한 전쟁과 식민지라는 댓가를 주된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더군다나 코로나19로 인해 이제는 다른 지역의 재난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임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제 ‘공동주의’를 정립하자고 역설한다.

모두가 공감할 테지만 한국은 암기위주의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재인식’은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배움’은 처음으로 알아가는 것으로 본다. 또한 ‘분석’은 기존의 것들로 환원하는 설명이고 ‘종합’은 새로운 것의 출현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후진국적 앎은 재인식과 분석이고 선진국적 앎은 배움과 종합이다. 그렇기에 전자의 입장에서 후자의 입장으로 가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의 인문학은 혹은 인문학자는 인문학의 성격이 다소 그러하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점에서 비과학적이다. 이의 극복은 ‘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정성적 사고에 비해 ‘양’의 측면을 도외시하지 않는 정량적 사고를 높이는 것에서 가능하다. 한편 이 점은 한국의 발전단계에서 시기적인 문제로 보여지기도 한다. 저자의 언급처럼 과학기술의 발전 이후에는 역사가, 역사 이후에는 철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덧붙여 이를 위해서는 서구의 인문학 뿐만 아니라 동양의 그것에서도 큰 각성이 요구된다. 저자가 책에서도 잠깐 언급하는 것이지만 동양의 인문학이 시대와의 접점을 찾지 못하는 고인 물(!)이 된 것은 장구한 유산의 축적에 비해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다. 공자가 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서울대의 규장각, 성균관대의 고서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많은 자료들을 주로 보관만 하는 세태를 깨고 적극적으로 한글로 알리고 시대의 철학과의 융합을 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젊은 학생들과 소장인문학자들에게는 도전이지만 큰 기회가 놓여 있기도 하다.

저자는 한국의 초중등에서 비롯된 분과학문의 지나친 기능구분 짓기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성을 방해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 분야의 발전과는 별도로 구분짓기 이전의 통합적인 시선으로 생기는 창의성을 위해 인문,과학,예술을 하나로 바라보는 ‘뉴리버럴아츠’를 중시하고 장려하는 교육과 환경이 중요하다. 더해서 인문과 역사, 문학같은 것은 스스로도 배울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수학, 과학같은 것은 제도적으로 일찍이 배우지 않으면 기회를 상실할 가능성이 크므로 더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위의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 본다면 기후위기, 인공지능, 전지구적 감염병의 시대 위에서 우리가 잘한 것, 못한 것, 그리고 이를 통한 지구적 가치의 새로운 구축을 위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는 의미로 들린다.

철학자 김재인의 <뉴노멀의 철학 : 대전환의 시대를 구축할 사상적 토대>는 시기성에 맞춰 쓰여진 책이고 분량이 200페이지를 조금 넘기므로 책의 양과 깊이를 가볍게 볼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함축적이면서 본질적이라는 면에 있어서 매우 흥미롭고 유익하다. 뉴노멀의 철학을 위해서 요구되는 범주는 핵심적인 것만 추리더라도 적지 않게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다루지 않은 범주도 무수히 많다고 본다. 그러나 살아 있는 철학은 시대와 함께 하는 것이므로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을 다루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뉴노멀을 새로이 정립했다기 보다는 뉴노멀을 위해 우리는 어떤 범주와 영역에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가치를 구축할 수 있느냐는 발제를 한 셈이라고 본다.

니체,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에도 유효한 철학을 번역하고 알리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과 관련되는 주제들의 저작을 내놓고 있으며 인공지능을 비롯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의 논의를 전개해 가는 철학자 김재인은 여러모로 지성인의 살아있는 모범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이런 지성인이 아직까지 너무 드물다. 기능주의와 과거자체에 머물러 시대와 호흡하지 못하는 지식인은 스스로 살아 있는 학문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이런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책을 계기로 기존의 학자 뿐만 아니라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뉴노멀의 가치를 위한 최전선에 있고자 하는 이들이, 특히 미래한국과 지구의 안녕을 염려하는 열정 넘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책을 접하길 바란다. 새로운 시대의 철학에 어울리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영감과 힌트를 얻어 이를 토대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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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 윤보인 장편소설
윤보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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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뱀>과 장편소설 <밤의 고아>로 인상적인 문학세계를 선보인 윤보인 작가가 장편소설 <재령>으로 오랜만에 문학으로 돌아왔다.


작품 첫 구절의 언급대로 <재령>은 서울에서 뉴욕으로 그리고 재령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재령’이라는 단어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화자인 ‘나’의 할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을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갈 것이지만 아직은 갈 수 없는 곳이라는 황해도 재령이라는 공간은, 당신을 알고 싶고 언젠가는 더 많이 알 수 있을 테지만 아직까지는 잘 모르는 재령이라는 남자와 탐구의 대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두가지 대상은 작가의 페르소나인 화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역사성과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 탐구는 문학이라는 문을 통과한다는 점에서는 트로이 전쟁 후 긴 시간 방랑의 여정을 지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율리시즈의 귀환문학과도 통할 것이다.


<재령>에서 작가는 두가지의 서술방식을 취하는데 첫 번째는 사주명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서술하는 씨줄의 부분이고 또 하나는 재령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인 날줄의 이야기이다.


<재령>은 오랜 시간 점을 치는 기능적인 기복의 한 형태로 폄하되거나 음지의 학문으로 취급되어온 사주명리학을 새롭게 보여주는 시선을 제공한다. 모든 학문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양면성이 있다. 과학도 그러하고 종교도 그러하다. 이것들의 긍정성을 잘 살리면 인류에 보탬이 될 것이고 부정성이 드러난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많은 이들이 괴로울 것이다. 과학기술 물질문명이 주도하는 시대에서 사주명리, 토정비결, 풍수, 역학 등은 그것의 본질적인 가치와 상관없이 공식적인 사회 속에서 숨어들거나 길흉화복의 기능적인 면을 부각하고 이용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대의 운세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는 영역에 있었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와중에도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존재감의 본질과 가치를 찾는 눈은 외적 성공이나 지위에 기대는 것이 아닌 내용 자체를 파악하는 인격의 시선에 달려 있다. 이 인격의 시선은 작가의 시선이기도 하다. 사주명리학이 음지의 학문이면서도 오랜 기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은 작품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통찰력과 신뢰, 겸허함을 잃지 않는 소수의 지혜자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통찰의 내면적 인격을 지닌 작가의 시선은 화자를 통해서 재령이라는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구체화한다. 박재령이라는 인물은 나라는 화자가 서울에서 몇 분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오빠가 젊음을 꽃피우기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나고 부모님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가게 돼서 만나게 된 남자이다. 박재령은 큰아버지로 이어지고 큰아버지는 할아버지로 이어진다. 이들 직업은 모두 다를 것이나 내면적으로는 모두 운명과 삶을 이해하고 공부하고자는 하는 존재들이다. 나라는 화자는 공통적으로 이 세 존재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넓히려는 존재인 셈이다. 즉 이 이해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구체성을 지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 삶에 대한 인문적 탐구이기도 하다. 박재령이라는 ‘재령’과 할아버지의 고향인 ‘재령’은 겉으로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라는 화자는 쌍둥이 오빠의 죽음과 아버지 형제들의 각기 다른 삶과 운명을 통해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사색한다. 그녀가 이 이해를 넓히기 위해 사주명리를 도구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사주명리는 결코 완성된 학문이 아니고 한 인간의 이해를 통해 단순한 길흉이나 성공의 여부를 기대는 기능적인 도구로 머물 수도 있지만 소수에게는 운명과 삶에 대한 상관관계를 극복하는 지혜의 도구일 수 있다.


<재령>은 사주명리라는 작가의 통찰을 이야기로 씨줄을 형성하고 ‘재령’이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줄을 형성하는데 이는 원리와 실제라는 측면으로 볼 때 흥미롭다. 원리는 실제를 통해서 구현되고 실제의 경험은 원리의 철학을 넓혀주는 역할을 할 것이므로 결국 원리와 실제는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고 성장을 시키는 교학상장과도 같을 것이다.


작품에도 등장하듯이 작은아버지와 사촌언니의 남자는 외적 성공을 지향하는 존재들이지만 이들에게 나라는 화자는 별로 경도되지도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님을 안다. 이미 나라는 화자는 그 속물성을 넘어선 뒤 내면의 성장과 운명과 삶의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성숙한 영혼이다. 이는 작가의 페르소나라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이기도 할 것이다. 100년도 채 못되는 한정된 시간속의 육신보다 무한성의 성격을 지닌 영혼을 더 중시하는 존재라면 내면을 살피는 일에 더 집중할 수 밖에 없다. 영혼이 존재하냐 아니냐는 것과는 별개로 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행복에 더 가까워지는 길임은 외적 성공과는 관계없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혜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작가는 나라는 화자를 통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의 정도는 드러낼 지언정 모든 존재들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차별없이 모든 존재들을 바라보되 그들의 외양에 평가나 중점을 내리지 않고 그들의 내면에 관심을 둔다. 이는 오랜 시간 외적 성공의 경험을 보내고 내면적 성장의 시기에 다다른 성숙한 영혼의 공통점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존재들은 운명적인 길을 걷되 그것을 스스로 더 인식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연민으로 바라볼 뿐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사주명리를 바라보는 시선과 통찰력도 훌륭하지만 문학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격을 유지하는 것도 훌륭하다. 적지 않은 호사가들에게는 사주명리라는 소재가 길흉화복의 기능적 측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지엽적인 소재로 들려주고 싶은 유혹과 함정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그러나 작가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삶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와 방편임을 안다. 단순한 흥미위주의 이야기거리인 문집(文集)이 아니라 삶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문학(文學)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문학적 시선의 격(格)이 존재함을 이 작품을 통해 느끼게 된다.


흥미롭게도 <재령>은 '나'라는 존재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작가는 '나'를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시선을 마음이 일으키고 흐르는 방식대로 서술한다. 또한 ‘나’는 나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지만 나보다는 주로 다른 이들을 통해 나를 성찰하는 기회로 삼는다. 바깥의 세계를 지우개로 점점 지우다보면 나의 중심으로 더욱 가까이 나의 시선이 머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나란 무엇인가와도 연결되는 것이어서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향성이 다음 작품의 기대를 갖게 한다.


윤보인 작가의 <재령>은 단순한 외적 성공만이 모든 행복의 조건의 필수조건이 아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이들의 외적 평가와 상관없이 운명을 거스르지 않되 인간적인 삶을 살려는 이들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다양하고도 극심한 경험들이 그저 실패이기만 한 실패가 아니라 영혼의 성숙과 진화를 위한 운명의 예비였음을 짐작하는 이들에게 한줄기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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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강아지 2020-05-16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