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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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모든 면에서 가장 겁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쓴다는 거,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감히 절대 엄두를 낼 수 없는 것까지.”

- 녹색광선 출판, 장소미 역,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중에서, p.140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설레는 이유는 실제로는 갈 수 없으나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영원한 동경으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상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기대감으로 가고 싶은 곳을 담아둔 마음도 행복하다. 그곳을 다녀온 직후의 기분이라면 기뻤거나 그저 그랬거나 아쉬운 마음으로 갈라지겠지만 그때의 그 마음은 추억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을 것이다. 추억의 공간이 된 마음은 만족도가 높아서 혹은 아쉬웠던 마음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그곳을 들를 수도 있겠지만 첫 만남과 도착의 경험과 그 기분은 변하지 않고 추억의 박제로 남는다. 이런 추억을 지속하거나 멈추게 하는 것은 어떤 마음으로부터 비롯될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타키니아에 존재하는 작은 말들을 구경하러 가고 싶다는 자그마한 에피소드를 제목으로 두 쌍의 부부와 한 명의 싱글이 이탈리아의 휴가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뒤라스의 이 작품 제목은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나 하일지 감독의 영화 <경마장 가는 길>처럼 제목의 대상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다. 가고 싶지만 아직은 가지 않은 곳 혹은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은 만나지 못한 그 무엇의 이야기와도 같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마도 나른함과 권태 그리고 약간의 모험이다. 나는 이 분위기에 약간 휩쓸렸는지 전반부의 어느 정도를 읽을 때까지 독서의 집중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마치 잔잔하기 그지없는 특유의 일본영화를 볼 때와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 점은 작품이 느슨해서가 아니라 작품에서 흐르는 공기임을 서서히 알아차렸다. 마치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의 3악장인 들의 풍경이 나올 때쯤에는 졸음이 몰려오는데 이는 그 작품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꿈과 환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작품의 공기에 이성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한 셈이었다. 뒤라스 하면 예전 영화인 <연인>과 <히로시마 내 사랑>만을 간신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작품으로 뒤라스의 문학이 주는 매력에 새로 빠졌다.

작품에서 소개된 대로 (아마도) 프랑스인 다섯 명(아이와 가정부를 포함하면 7명)이 휴가를 떠난 곳은 이탈리아의 폐쇄적인 바닷가 마을, 앞으론 바다가 뒤로는 산이 코앞에 버티고 있고, 이곳과 세상을 잇는 곳은 포장도 되지 않은 7킬로미터 남짓의 흙길뿐이며 해변으로 향하는 길엔 그늘이 되어줄 나무 한 그루 없고 그나마 서 있는 유일한 플라타너스 한 그루는 가지가 전부 잘린 채 죽어버렸다. 이곳으로 휴가를 온 자크와 사라 부부, 루디와 지나 부부, 싱글인 다이아나는 서로 오래된 친구들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휴가는 짧게 주어진 특별한 체험이라기 보다는 2~3주 혹은 한달 가까이 지내는 조금 다른 공간에서 누리는 연례행사에 가깝다. 이는 지금의 한국에서 휴가가 주어졌을 때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동안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말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전투(!) 치르듯이 많은 곳을 들르고 추억에 담는 그것과는 대척점의 지점에 있다. 1950년대의 아날로그적인 환경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유럽의 휴가는 한달에 가까운 넉넉한 기간에 집과는 다른 공간에 가서 쉬다 오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유럽인들이 그러하긴 하지만 이로 인한 배경과 에피소드는 여기 지금의 한국과는 다른 색깔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명히 휴가를 오긴 왔는데 고립된 공간으로 온 듯한 곳에서 나른함과 권태가 지배하는 이 분위기는 부부와 친구들과의 밀접한 시간공유로 인해 일상성은 늘어가고 무자비한 더위는 이를 부추긴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서로의 개성을 유감없이 뽐내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이 개성들의 표현에 덧붙여 산속 지뢰제거를 하다 죽은 청년의 에피소드와 멋진 보트를 소유한 남자의 등장은 이 나른함과 권태의 수면에 조그만 파문을 일으킨다. 지뢰제거로 목숨을 잃은 청년의 노부모는 육신의 파편이 덜 수거되었다는 이유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망신고서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작품의 주인공격인 사라는 남편인 자크가 아는지 모르는지 근사한 모터보트를 소유한 남자와 바람이 나려던 차이다. 이런 배경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은 여러 희노애락의 감정을 대화로 이어간다. 이런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소재 그 자체로는 여지없는 통속드라마이다. 통속드라마가 주는 일상성과 인물들의 대사들은 한국드라마도 그에 못지 않지만 뒤라스가 던지는 이야기는 통속성의 수평선에 머물지 않고 유머와 통찰과 여백 사이에 번득이는 삶의 교훈, 지혜의 편린이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지뢰로 인한 청년의 죽음이나 근사한 모터보트를 소유한 남자와의 불륜은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한국이라면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없을 정도로 묘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뒤라스는 전체의 작품기조를 전혀 흔들지 않는다. 매우 특별해 보이는 사건들도 이 소설에서는 나른하고도 권태롭고 지겹기까지 한 삶에서 서로가 금방이라도 헤어질 듯 서로에게 상처가 될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에게 느리지만 조금씩 성찰할 계기마저 준다. 일상과 모험 사이에서, 일종의 의도된 폐쇄된 듯한 휴가지에서 무더위를 견뎌가며 매우 가까운 이들끼리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도시에서 치열한 일상을 겪는 이들의 어쩌면 또다른 단면일 것이다.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통속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반짝이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울다가 웃다가 생각하다가 번뜩이는 빛같은 교훈도 얻는 이런 전개는 뒤라스와 적지 않은 여성작가들이 지니는 강점일 것이다. 젠 체하고 무겁고 거대하고 더 나아가 마초적이기까지 한 일부 남성작가들에게서는 이런 통속성의 소재로 삶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무지하다고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쓰여진 이 작품의 매력을 바로 느끼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점점 더 자극적이고 반전적이고 서스펜스와 스릴을 요구하는 현대의 이야기 수요에서 아마도 이런 경향은 더할 것이다. 더군다나 유럽 특유의 장기적인 휴가와 우정과 사랑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그들의 문화는 아직까지 낯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속적 소재이든 그것을 넘어서든 문학을 통해 삶과 인간의 탐구를 놓치지 않는 작가와 작품을 독자들은 알아보기 마련이다.

여행이 지금 나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과 같이 독서는 지금 있는 시공간을 벗어나지 않음에도 다른 곳으로 잠깐 여행을 하는 것과도 같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1950년대 몇몇 유럽인들은 이런 일상과 휴가를 즐겼구나라는 이색적인 체험을 느낌과 동시에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름없는 희노애락을 가지며 삶을 누린다는 것을 들려준다. 또한 대개의 훌륭한 작품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들려준다. 다른 대륙, 다른 시간에서 건너온 이야기이기에 이국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색다름 너머의 일상성과 가치를 들려주는 뒤라스 작품의 매력을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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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0-09-08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싶었는데요, 율리시즈님 글 읽으니 느리지만 애틋한 느낌이 드네요^^여름이 가기전에 읽어보려고 했는데요. 벌써 가을이군요 ㅎ

율리시즈 2020-09-14 18:06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는 분께서 좋은 반응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후기에서는 간단히 썼지만 실제로 보면 프랑스식 유머와 대화에 빵빵 터지는 부분들이 여러곳 나옵니다 ㅎㅎ 어려운 시국에 좋은 책과 좋은 시간 되시길요~

청공 2020-09-14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즈님. 글 넘 좋아요. ~^^
감상과 줄거리를 어쩜 이리 잘 녹여내시는지요. 앞으로도 감성적인~ 책리뷰 기다리겠습니다^^
에구~저는 한참 더 열심히 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ㅠ

율리시즈 2020-09-14 20:42   좋아요 0 | URL
에고, 청공님, 별 말씀을요...
전 바쁜 일 와중에 가끔 독서하고 후기들을 급한게 쓴것들이 대부분이라 글이 제 맘엔 좀 거칠고 덜 다듬어진 것들입니다^^
청공님을 비롯한 알라딘에 내공이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 제가 오히려 많이 배웁니다.
사실 이 세상의 책이 너무 많은데 좋은 것 찾아 읽기도 바쁜데 멋진 후기 남기는 분들도 멋지지요. 그렇지만 후기도 누구에게 보여주기보다 스스로 정리하고 만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도 정리가 잘 되면 남보기에도 좋겠지만요.
종종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