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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쓰고 있네 ㅣ 스토리인 시리즈 5
황서미 지음 / 씽크스마트 / 2020년 8월
평점 :
“잠깐, 지금 그걸 수녀님이 가져가서 드시는 건가요.”
“내 수박, 내가 맘대로 못 먹습니까?”
“큰 건 다른 분들게 양보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나도 먹을 짬 됩니다.”
“잠깐만요, 몇 축(수녀원에서 쓰는 기수용어)이시죠?”
“밥 먹다 말고, 그건 왜 묻고 난립니까?”
“대답이나 하세요.”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그리고는 손에 든 수박을 앞 사람 보란 듯이 입 쩍 벌려 베어 무는 수녀님. 그리고 열 받아서 벌떡 박차고 일어나 식당을 나가버리는 또 다른 수녀님.
- 황서미 지음, 도서출판 씽크스마트 <시나리오 쓰고 있네> 중에서, p.100.
황서미 작가가 다채찬란했던 인생수업중(?) 잠시 수녀원에 있었던 에피소드 중의 일부이다. 나름 세속에서 떨어진 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생을 순종하며 살기로 맹세한 수녀들의 고립된 일상이 오랜만에 주어진 수박 한 통에서 폭발(!)하는 장면에서 나는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먹으려는 욕망과 그 와중에 지위를 내세우려는 욕망과 서로간에 쌓였던 어떤 것들을 수박을 핑계로 충돌하는 상황은 살아있는 페이소스 그 자체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첫 장을 펼친 이후부터 최소 한 두 번은 책을 놓고 딴 짓을 하거나 완독하는 데에 2~3일 걸릴 수도 있는데 이 책은 집어들자마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대단한 재미와 흡인력이다.
다섯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이혼이라는 ‘외적 증표’가 작가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별의별 호기심과 걱정과 우려를 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본인 작가는 초연한 듯 하다. 말하자면 황서미 작가의 <시나리오 쓰고 있네>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영화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실화버전이다. 그러나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실화인, 그것도 해피엔딩의 끝이 좋은 너무너무 긍정적인 버전의 이야기이므로 영화와는 또다른 이야기의 매력을 준다. 이야기의 소재로 보자면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평범하지 않고 극적이고 비극적이기까지 한 데 이 경험들을 초연하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이겨내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거의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마인드이다.
사회초년 시절의 광고 카피라이터부터 해서 수녀원에 들어간 얘기, 치킨회사에서의 경험, 보험설계사, 영어유치원, 야설교정편집자(!) 등등 조금은 특별하더라도 누구에게나 한두번 있을 법한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명의 남자를 사랑한 얘기와 장애를 지닌 아들과 예민한 사춘기의 딸의 이야기까지 줄줄이 이어지다보면 이 일이 한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이 책을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내 생각에 이 책의 이야기들은 한번에 끝내기엔 너무 아깝다. 드라마 시리즈로 만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이 책에서 나오는 소재 자체가 흥미롭긴 하지만 정작 이 책의 강점은 용기와 사랑이라는 두가지 삶의 주제를 제대로 체험하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이다. 더 나아가서 이 경험을 관찰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작가의 시선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각자의 이름을 지닌 역할을 하는 배우라는 것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적어도 희노애락의 감정에 빠진채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교훈도 배우지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어느새 끝날 수도 있는 인생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건 아니며 인생이 아무리 기쁘더라도 그것조차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삶이 한가지의 양식만이 주어진다면 육신은 이어지더라도 영혼은 지루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용감한 영혼은 자의반타의반 자신에게 주어진 온갖 문제들을 부딪히며 이겨 나가고 삶과 인간을 점차적으로 더 이해하고 인식의 폭을 확장해 간다. 잠재의식적으로 정신의 진화는 영혼의 기록으로 축적이 된다.
적지 않은 이들은 작가의 고단하고도 다채로운 인생의 여정에 비해 보상이 적어 보이거나 보란 듯이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황서미 작가는 이미 크게 성공한 존재이다. 재물로나 권력으로나 크게 성공한 이라도 육신을 떠날 때는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육신의 내 손에 쥔 것이 아무 것이 없더라도 내 정신과 영혼에 더없는 인생의 경험을 한 존재라면 지상을 떠난 후에 자신의 삶이 더없이 귀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더없이 극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이야기의 경험과 가치를 관찰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작가의 영혼은 어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는 성숙한 존재이다. 이보다 더 큰 인간존재의 성공이 어디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보면 이보다 더한 경험과 에피소드를 지닌 사람들도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 다만 그 경험의 역할을 스스로 바라보는 시선을 지닌 영혼은 흔치 않다. 그 시선을 지닌 영혼의 기록이 예술이 되고 문학이 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어쩌면 우리 주위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해 내가 조금은 더 편하게 살았네 라는 위안을 넘어서서 작가가 스스로의 삶을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시선만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파란만장한 나의 삶도 실패가 아님을 알 수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