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상실 - 좋은 일자리라는 거짓말 ㅣ 전환 시리즈 2
어밀리아 호건 지음, 박다솜 옮김 / 이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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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말이 무심코 나왔다. 이렇게 열심히 일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같은 양의 노력을 일찍 공부에 쏟아 돈 더 잘 버는 직업을 가질 것 그랬다고. 버티며 애써 일하는 게 당연하다면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길로 찾아 갔어야 한다는 후회였다. 좀 더 노력했더라도 잘 버는 직장에서 일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출근 때마다 온 몸에서 돋아나는 거부감을 참아내고 있다는 거다.

“노동해방”이라는 말은 착취와 억압받는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참 주인이 되자는 뜻이다. 그런데 이보다 “은퇴 : 노동으로부터 벗어남”이 스스로를 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미래로 느껴진다. 복리의 마법을 믿으며 꾸준하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재산도 모을 수 있다고, 여러 재테크에 기웃거린다. 그러나 금리가 오르고 경기침체에 빠지니 이런 믿음과 희망이, 회사 밖에 대한 미래도 사라진다.

일하는 게 왜 이리 싫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고 싶어 했던 일이 아니다. 취업하는 자체가 중요해서 뭐 하는 회사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그래도 몇 년은 아무 생각 없었는데 10년이 넘으니 한 번 뿐인 인생을 허비한다는 자책이 커진다. 둘째, 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일을 너무 오래 한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거에 더해서 일찍 출근하며 추가 근무하고, 일하며 생긴 피곤과 스트레스를 보듬는 시간들까지 합산하면 압도적인 지분이다. 내 시간의 실질적인 주인은 회사이다.

셋째, 직장에는 화를 돋우는 일들이 쉬지 않고 벌어진다. 직장에는 계급이 있고, 권한을 가진 상급자가 책임을 떠넘기거나 잘못된 결정을 해도 웃는 낯빛을 유지해야 한다. 상급자가 되기 위해 경쟁과 평가가 이뤄지고, 납득할 수 없는 인사에 그동안 일로 증명해왔다고 여겨온 스스로의 가치는 추락한다. 일찍부터 편한 자리 찾아 가는 요령을 욕해놓고, 이제라도 노선을 바꿔야 하나 갈등한다.

부적응자라서 힘든 걸까, 직장은 원래 적응하기 어렵고 힘든 곳일까? 스스로 부적응자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직장이 꼭 이런 곳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노동의 상실 – 좋은 일자리라는 거짓말』

 

2023년 4월에 번역 발행된 영국인 어밀리아 호건이 쓴 책이다. 원제는 『LOST IN WORK : Escaping Capitalism』이다. 이 책을 쓰도록 이끌었다는 저자의 소망이 인상 깊다.

“나는 이 책이 이론의 가능성을, 이론이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일의 가능성을 실현하기를 소망한다. 당연하고, 고정되어 있으며, 극복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꺼내어 그것이 실은 우연적이고, 변할 수 있으며, 극복 가능하다고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이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은 일을 위한 희망,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일에 대한 희망,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을.”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일”이란 임금노동을 가리킨다. 일을 폭넓게 해석하면 어떤 목적을 위해 육체적 수고와 정신적 피로를 감수하는 모든 활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행해지는 일로 서술대상을 한정짓는다. 같은 종류의 가사노동일지라도 고용되어 타인을 위해 일하게 되면 그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책은 임금노동이 처해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 늘어나고, 노동의 양극화로 격차와 차별이 늘어나며, 국가는 실업자에게 국가 재정을 좀 먹는다는 낙인을 찍으며, 최저 임금보다 못하더라도 일단 일자리를 구하라고 한다. 이처럼 일자리의 질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좋은 일자리를 되살려야 할까? 저자는 훨씬 멀리 나아간다.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의 일이 사람의 자유를 앗아가는 방식을, 일이 약간의 만족과 심지어 약간의 즐거움도 제공하긴 하지만 그건 다른 유형의 즐거움을, 다르게 살고 생산하는 방식을 없앰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숙고한다.”

임금노동에 대한 전복적인 비판이 필요한 건 임금노동이 두 가지 부자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부자유, 그리고 임금을 받는 대신 주는 사람의 통제에 따라야 하는 부자유. 이 두 부자유가 임금노동을 가능하게 하고 규정한다. 그런데 밥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지운 굴레 같은 게 아니고, 사회가 자본을 소유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로 갈라져 있으며, 다수는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고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현실을 의미한다.

한편 노동력을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매출과 이윤을 낳는 쓸모 있는 노동을 원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일하는 걸 용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생겨난 게 일터에서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통제이다. 위계질서 내에서 어떤 사람은 관리자가 되어 사장 대신 직원들을 통제하지만, 결국 이윤극대화(비용절감)와 시장경쟁이 직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결정한다.

 

힘을 합쳐 자본주의 넘어서기

 

두 부자유로 인해 노동자는 일터 밖에서도 안에서도 일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빼앗긴 채 타인을 위한,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로부터 월급쟁이들이 겪는 고통과 번민이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일터에서 노동자가 자기 결정의 권한을 확보하고 넓혀가야 한다고 말한다. 촛불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노동자의 권한이 커질수록 우리를 옮아 매는 부자유는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힘을 갖는 유일한 수단은 노동조합으로 조직과 단결이다. 다만 노동조합의 목적이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금융치료가 부족해서 노동이 힘든 게 아니라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결정하지 못하는 부자유가 실존의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책의 원제가 『LOST IN WORK : Escaping Capitalism』이라는 걸 기억하자.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잃어버린 건 자기 결정의 자유이며,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앙상한 요약에 담지 못한 이 책의 개성과 매력, 저자의 깊이 있는 관찰과 풍요로운 언변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작은 책이라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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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와 노동의 미래 - 탈희소성 사회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아론 베나나브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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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가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성능과 활용가치에 흥미를 가지고 놀라워한다. 체스와 바둑 같은 특정한 분야에 한해서만 인간을 뛰어넘었던 인공지능이 이제는 스스로 학습하여 모든 방면에서 인간의 권능을 복제하고 뛰어넘어서고 있다. 좀 더 멀리 있을 것이라 여겨온 변곡점이 눈앞에 와 있는 듯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기 시작하는 변곡점이 가시화되면서 이에 대한 두려움도 일어나고 있다. 가장 큰 두려움의 이름은 실업이다. 골드만삭스는 10년 후 인공지능이 전 세계의 정규직 일자리 3억 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이러한 예측이 맞아 떨어진다면,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3억 명은 무슨 일로 먹고 살아야 할까?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이 그 사용자에게는 풍요를 안겨주겠지만, 대체되는 노동자들은 빈곤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이러한 ‘기술발전의 역설’하면 거의 반드시 함께 언급되는 게 러다이트 운동이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증기기관이 뿜어내는 동력으로 지치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가 보급되면서,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분노하여 기계를 파괴했다. 이 사건들은 기술발전을 가로막아 일자리를 지키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한 교훈을 담은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도입되어 구조조정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러다이트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21세기 러다이트로 조롱받고 싶지 않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독서가 답을 주지는 않지만, 두 책에 대해 논하며 고민을 더해보고자 한다.

 

「제2의 기계 시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슬론경영대학원의 두 교수가 공저하여 2014년에 출간됐고, 상당한 유명세를 얻은 책이다. 아마도 메시지가 대담하고 명확해서인 듯하다. 18~19세기 산업혁명이 제1의 기계 시대였다면, 1960년대 이후 집적회로와 인터넷, 소프트웨어 등의 디지털 기술로 인해 인류는 제2의 기계 시대로 들어섰다. 산업혁명이 세상의 풍경을 농촌과 방앗간, 마차에서 도시와 공장, 철도로 바꾼 크기의 변화만큼 엄청난 도약이 다시 한 번 인류에게 다가왔다. 제1의 기계가 인간의 몸을 대체했다면, 제2의 기계는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여 일할 것이다. 가령 앞으로는 엑셀에서 복잡한 표와 함수를 입력하거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작성하는 일을 직접 하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만 입력하면 된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은 경제에 풍요와 동시에 격차를 주입하고 있다. 책에서 다루는 격차의 몇 가지 현상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1인당 실질 GDP(즉 평균소득)와 중간소득(총 분포의 50 백분위수에 있는 사람의 소득)의 격차가 1975년 이후로 가위처럼 계속 벌어지고 있다. 중간소득은 늘어나지 않는데 반해 상위 계층의 소득은 빠르게 증가해서이다. 이러한 계층 간 소득 격차를 설명하는 게 ‘숙련 편향적 기술 변화’라는 말이다. 대학 졸업자 이상의 노동자들은 소득이 늘어난데 반해 저학력 노동자들은 소득이 오히려 줄어든 현상이 덜 숙련된 노동의 수요를 감소시키는 기술발전 때문이라는 설명을 의미한다. 소득 격차의 확대에 관한 설명으로 GDP에서 자본이 아닌 노동으로 분배되는 소득을 의미하는 노동분배율의 감소도 있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이래로 세계의 노동분배율은 크게 감소했다. 그리고 저자들은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실업의 장기화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제2의 기계 시대가 가져온, 앞으로 본격화될 풍요와 격차의 이중성에 대해 책은 “기계와 함께 달리는 법”을 제안한다. 기계로 대체될 노동에 매달리기보다 기계를 보완할 노동, 여전히 기계가 할 수 없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등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격차를 완화하고 풍요를 촉진하기 위해 더 많은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들을 제안한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정책 중에 눈길을 끄는 건 일정 소득 이하의 사람들에게 국가가 소득을 보조해주는 역소득세이다. 적은 소득일지라도 일을 하면 보조금이 나오니 사람들의 근로 의욕이 향상될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근로세는 폐지하여 기계 대비 노동의 가격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

이 책은 미국의 좌파 학자가 쓰고 2020년에 나온 책이다(한국 출판은 2022년). 좌파 학자답게 주류 담론 중 하나인 ‘자동화 이론’에 대한 비판이 목적이다. 자동화 이론이란 ‘제2의 기계 시대’를 말하는 것처럼 기술 발전으로 인해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되어왔고, 앞으로도 더 빠르게 향상되어 노동에 대한 수요가 감소되어 결국에는 현재 형태의 노동은 대부분 사라진 (연구와 탐험, 예술 같은 진실로 인간적인 행위만이 남아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고, 이러한 대전환에서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말한다. 기본소득은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인기 있는 정책인데, 대체로 우파는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복지정책에 들어가는 재원을 대신 기본소득으로 돌려 시장을 통해 필요한 서비스를 직접 구입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이러한 자동화 이론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 지점에서 비판한다.

첫째, 기술발전으로 인해 생산성 향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건 거짓이다. 오히려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감소하고 있다. 이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솔로 교수가 1987년에 지적한 이래로 경제학에서 ‘생산성 역설’로 불리는 현상인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도입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개선의 속도가 1950~60년대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특히 고용의 다수를 차지하는 서비스업에서의 노동생산성 향상이 지지부진하며, 그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해온 제조업에서도 생산성 개선은 점차 느려지고 있다.

둘째, 노동저수요, 특히 전체 고용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탈공업화의 주된 원인은 노동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생산성 증가율보다도 산출량 증가율이 더 줄어든 데에 있다. 생산성이 증가하여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해도 모두 팔아치울 수 없으니 고용을 줄여 저성장에 적응했고, 그 결과가 탈공업화였다(이를 증명하는 통계와 그래프가 함께 제시돼 있다). 그리고 제조업에서 산출량 증가율이 1970년대 이래로 줄어든 건 1950~60년대 일본과 독일에서 제조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과잉 생산능력 때문이다. 생산능력 과잉으로 비용이 상승해도 가격을 올려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못하는 경쟁압력이 강해져 결국 이윤율이 떨어졌다. 이윤율 저하로 투자가 줄어들어 생산성과 산출량 증가율도 함께 줄어드는 악순환이 굳어졌다. 7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수출 주도 성장은 선진국 자본이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력이 저렴하고 규제받지 않는 공간으로 재배치된 덕분이며, 또한 그 결과로 제조업에서의 과잉 생산능력과 경쟁압력은 해소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셋째, 자동화 이론이 그리는, 노동이 현저히 줄어들거나 사라진 사회는 기술발전에 의해 저절로 오지 않으며, 기본소득이 촉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기술발전과 생산성 향상이 일자리 감소로 귀결되는 건 기술이 단순히 노동을 대체하기 때문이 아니다. 제 가격에 팔리지 않을지 모르는 상품의 생산을 무작정 늘리거나 고용을 유지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여주는 게 경영자와 자본에게는 매우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윤 추구가 지배하는 경제구조 하에서 생산성 증가는 노동시간 대신 일자리를 줄이고, 쫓겨난 이들을 싼 임금에도 무엇이든 하려는 처지로 몰아넣고, 값싼 노동력으로 돈 가진 이들의 새로운 욕망을 자극하는 신규 산업(주로 서비스업)과 비공식 부문의 증가로 이어진다. ‘오징어 게임’과 같은 이야기가 단순히 허구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현실이다. 따라서 저자는 자본에 대항하는 사회운동만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입장 사이에서

두 책을 비교했을 때 「제2의 기계 시대」는 기술결정론과 신자유주의에 가깝다. 1970년대 이후 경제적 격차의 확대가 디지털 기술의 발전 때문이며, 앞으로도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는 건 불가피하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이다. 또한 이러한 기술결정론을 앞세워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앞으로도 팔릴 만한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거나 기계보다 싼) 노동력 상품이 될 것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이다. 이처럼 사회 주류를 대변하는 입장이 아마도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은 배경일 것이다.

반면에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는 오늘날 저성장과 노동저수요, 불완전고용과 같은 경제적 문제의 기원을 시장원리 그 자체에서 찾는다. 그리고 사회운동을 통한 시장원리의 극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다. 기술이 일자리를 파괴하는 건 비용 절감과 이윤 극대화의 목적으로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합의된 목적, 가령 노동시간 단축이나 무상공급 확대 등을 위해서 기술을 새롭게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를 자유의 영역이 모두에게 열리는 ‘탈희소성 사회’라고 부른다. 인류의 오래된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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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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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의 추억

 

영화 「광해」에서 가짜 광해군이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보내면서 백성만을 위한 마음으로 여의치 않으면 후금에 항복하라며, 명에 대한 사대의 명분보다 백성의 목숨이라는 실리를 우선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실리적인 태도를 내세우기 위해 호출되는 단골 메뉴인데, 그가 파견한 원정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특히 어렵게 양성한 조총부대를 잃어 조선의 국방력에 큰 구멍을 냈다는 게 반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가 큰 흥행을 하고, 현재도 여전히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회자되는 건 한반도를 둘러싼 어지러운 국제정세를 헤치고 나갈 실마리를 찾고 싶은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영화 광해가 개봉했던 2012년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12년 재정위기로 서방이 휘청이는 동안 중국은 큰 타격 없이 경제성장을 이어나가며, 2010년에는 일본을 추월하면서 G2로 위상이 달라지고 있는 해였다. 중국이 미국을 언제쯤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며, 미국과 중국 중 어느 쪽에 줄을 서야하는 지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 교체를 예상하며 이를 명청 교체기와 비교하곤 했다. 미국에게는 안보를 의지하고, 중국에게는 경제를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둘 다 내 꺼 하자는 실리외교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은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정당화되었다.

2012년 이후로 십여 년이 지난 현재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2016년 사드 배치 결정과 뒤이은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반중감정이 고양되고, 무역갈등을 시작으로 미중간의 경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미국이 가로 막으려 하면서부터는,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피크 차이나’론도 나오고 있다. 2022년에 시진핑이 집단지도체제를 허물고 1인 통치를 공고화하면서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도 중국은 위신을 잃어가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과 푸틴의 러시아가 새로운 악의 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반대편의 ‘자유민주’ 진영에게서는 과거 소련에 그랬던 것처럼 냉전적 열정을 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냉전적 열정에 한국도 달구어지고 있다. 반중정서는 더 심해진 것 같고, 정부는 중국을 조준하는 나토와 협력에 나서고, 반중 반도체 동맹 가입 여론이 높다. 멀리서는 중립과 실리를 외치다가 막상 갈등이 본격화되니까 몸과 마음이 전부 한 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 회색은 흑과 백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서일까?

 

미국인가, 중국인가?

 

현재 국제정세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서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여러 책들을 검색하다가 찾은 게 ‘훙호펑’이라는 저자였다. 훙호펑은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교집합 같은 존재이다. 한국에는 그의 저서 두 권이 번역되어 있다.

2022년 10월에 번역돼 나온 「제국의 충돌」은 근래 미중 무역갈등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다루고 있다. 미중갈등은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는 예외가 아니고 정상이다. 중국은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주의 헌법을 가진 국가이다. 같은 정치체제를 가졌던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 끝에 해체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째서 중국을 자신이 주도하는 세계경제로 깊숙이 들여놓았을까? 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본격화된 중국의 경제성장에서 분수령은 90년대였다.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와 수출 중심의 경제로 도약하고자 했지만, 1989년의 천안문사건, 그리고 미국에서 인권을 내세우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출범이 발목을 잡았다. 소련을 잡기 위해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공화당 정부와 달리 새로운 민주당 정부에는 냉전과 지정학적 고려라는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1993년 5월 18일 클린턴은 중국의 인권 향상 없이는 무역에서 최혜국 지위가 자동으로 갱신되지 않을 거라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만약 미중갈등이 시작되었더라면 중국과 세계경제의 모습은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클린턴 행정부의 대중정책을 뒤집은 건 월가와 초국적 기업들의 로비였다. 중국 당국은 초국적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의 개방을 통한 막대한 이익을 약속했고,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한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로비는 성공했다. 중국의 최혜국 지위는 갱신되었고, 2001년에는 WTO에 가입하며 자유무역과 수출에 힘입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글로벌 탑 투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무시무시하게 성장한 중국의 수출산업이 미국의 제조 기반 기업들을 위협하는데 반해, 중국 시장으로 침투는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미국이 강세인 금융시장은 거의 열리지도 않았다. 또한 서방의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중국의 태도는 많은 기업들의 분노와 줄 잇는 소송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과거 중국과의 자유무역을 위해 로비에 나섰던 기업들이 이제는 반대로 돌아서며 백악관을 중국과의 투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제국의 충돌」 은 미중갈등을 자본 간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다. 실제 정책결정을 변화시킨 구체적인 과정(로비), 중국이 자원 공급망을 조직하고 잉여 자본 수출을 위해 세력권을 형성하며 기존 미국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양상들을 뚜렷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정세는 저자가 보기에 1차 세계대전 전야 제국주의 경쟁, 특히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독일의 부상과 닮았다. 이는 사실 매우 두려운 역사적 유비이다. 영국과 독일의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으니까.

 

적대적 공생관계의 균열

 

「제국의 충돌」보다 먼저 출간된 「차이나 붐」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보는데 다음과 같다. 1650~1850년의 자본주의 없는 시장. 1850~1980년의 시초 축적. 1980~2008년의 자본주의적 호황. 경제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자본축적이 가능한 안정기에 앞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이뤄지며 축적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시기를 시초 축적이라고 하는데, 저자가 마오쩌둥 통치시기를 농촌을 희생시키며 자본주의적 호황의 여건을 조성한 기간으로 파악하는 건 흥미로운 시각이다.

또한 저자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호황을 분석하며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수출 및 투자에 과다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출은 미국의 무역적자에 의존하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중국의 미재무부 채권 구입에 의존하고, 덕분에 미연방정부의 재정적자와 군사력도 유지된다. 근래의 미중갈등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관계이다. 이러한 적대적 공생이 유지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수출기업이 벌어든 달러를 거의 일정한 환율로 환전해주기 때문에, 무역흑자만큼 자동으로 통화 공급이 늘어나는 시스템이다. 이른바 양적 완화의 일상화인데 덕분에 돈은 넘치고 수익성을 따지지 않는 과잉투자(설비)와 부동산 상승이 구조화되었다. 이에 힘입어 당장은 경제가 성장해왔지만, 누구나 알든 거품은 붕괴하기 마련이다. 이 책이 쓰인 게 2015년인데 이후의 정세변화(중국의 성장률 하락, 부채위기 등)를 생각하면 신뢰가 가는 분석이다.

이제까지의 성장 모델이 중국과 세계에 불안을 더하는 불균형을 심화시켜왔기 때문에 훙호펑은 수출과 투자 대신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내부의 불평등 문제는 극심하다. 수 억 명의 농민공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권리 없는 노동을 참아내고 있다. 훙호펑은 불평등을 완화해가는 방향 선회가 위로부터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민주화가 진전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의 대외팽창적 성장 모델이 방향을 튼다면 미국과의 관계도 갈등과 충돌이 아닌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중국 관련 기사가 뉴스창을 채운다. 90년대 이후 미국이 독주하는 시기에 배우고 일하기 시작한 나에게는 중국의 부상은 무언가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정치체제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거부감도 든다. 그런데 미중갈등을 둘러싼 선택은 이제는 개인적 선호 이상의 문제이다. 대만해협에서의 긴장은 더해지고 있고, 앞으로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외교노선이 가장 주요한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냉정한 시각의 책들로 성급한 감정들을 식히는 것도 유익하겠다. 거대기업의 이익을 국가와 민족의 이익으로 포장하며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선전과 근거 없는 예측과 처방에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중국의 빼앗긴 자들이 자신들의 몫과 권리를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응원하며 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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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붐 -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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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의 추억

 

영화 「광해」에서 가짜 광해군이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보내면서 백성만을 위한 마음으로 여의치 않으면 후금에 항복하라며, 명에 대한 사대의 명분보다 백성의 목숨이라는 실리를 우선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실리적인 태도를 내세우기 위해 호출되는 단골 메뉴인데, 그가 파견한 원정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특히 어렵게 양성한 조총부대를 잃어 조선의 국방력에 큰 구멍을 냈다는 게 반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가 큰 흥행을 하고, 현재도 여전히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회자되는 건 한반도를 둘러싼 어지러운 국제정세를 헤치고 나갈 실마리를 찾고 싶은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영화 광해가 개봉했던 2012년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12년 재정위기로 서방이 휘청이는 동안 중국은 큰 타격 없이 경제성장을 이어나가며, 2010년에는 일본을 추월하면서 G2로 위상이 달라지고 있는 해였다. 중국이 미국을 언제쯤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며, 미국과 중국 중 어느 쪽에 줄을 서야하는 지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 교체를 예상하며 이를 명청 교체기와 비교하곤 했다. 미국에게는 안보를 의지하고, 중국에게는 경제를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둘 다 내 꺼 하자는 실리외교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은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정당화되었다.

2012년 이후로 십여 년이 지난 현재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2016년 사드 배치 결정과 뒤이은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반중감정이 고양되고, 무역갈등을 시작으로 미중간의 경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미국이 가로 막으려 하면서부터는,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피크 차이나’론도 나오고 있다. 2022년에 시진핑이 집단지도체제를 허물고 1인 통치를 공고화하면서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도 중국은 위신을 잃어가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과 푸틴의 러시아가 새로운 악의 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반대편의 ‘자유민주’ 진영에게서는 과거 소련에 그랬던 것처럼 냉전적 열정을 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냉전적 열정에 한국도 달구어지고 있다. 반중정서는 더 심해진 것 같고, 정부는 중국을 조준하는 나토와 협력에 나서고, 반중 반도체 동맹 가입 여론이 높다. 멀리서는 중립과 실리를 외치다가 막상 갈등이 본격화되니까 몸과 마음이 전부 한 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 회색은 흑과 백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서일까?

 

미국인가, 중국인가?

 

현재 국제정세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서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여러 책들을 검색하다가 찾은 게 ‘훙호펑’이라는 저자였다. 훙호펑은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교집합 같은 존재이다. 한국에는 그의 저서 두 권이 번역되어 있다.

2022년 10월에 번역돼 나온 「제국의 충돌」은 근래 미중 무역갈등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다루고 있다. 미중갈등은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는 예외가 아니고 정상이다. 중국은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주의 헌법을 가진 국가이다. 같은 정치체제를 가졌던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 끝에 해체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째서 중국을 자신이 주도하는 세계경제로 깊숙이 들여놓았을까? 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본격화된 중국의 경제성장에서 분수령은 90년대였다.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와 수출 중심의 경제로 도약하고자 했지만, 1989년의 천안문사건, 그리고 미국에서 인권을 내세우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출범이 발목을 잡았다. 소련을 잡기 위해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공화당 정부와 달리 새로운 민주당 정부에는 냉전과 지정학적 고려라는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1993년 5월 18일 클린턴은 중국의 인권 향상 없이는 무역에서 최혜국 지위가 자동으로 갱신되지 않을 거라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만약 미중갈등이 시작되었더라면 중국과 세계경제의 모습은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클린턴 행정부의 대중정책을 뒤집은 건 월가와 초국적 기업들의 로비였다. 중국 당국은 초국적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의 개방을 통한 막대한 이익을 약속했고,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한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로비는 성공했다. 중국의 최혜국 지위는 갱신되었고, 2001년에는 WTO에 가입하며 자유무역과 수출에 힘입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글로벌 탑 투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무시무시하게 성장한 중국의 수출산업이 미국의 제조 기반 기업들을 위협하는데 반해, 중국 시장으로 침투는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미국이 강세인 금융시장은 거의 열리지도 않았다. 또한 서방의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중국의 태도는 많은 기업들의 분노와 줄 잇는 소송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과거 중국과의 자유무역을 위해 로비에 나섰던 기업들이 이제는 반대로 돌아서며 백악관을 중국과의 투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제국의 충돌」 은 미중갈등을 자본 간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다. 실제 정책결정을 변화시킨 구체적인 과정(로비), 중국이 자원 공급망을 조직하고 잉여 자본 수출을 위해 세력권을 형성하며 기존 미국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양상들을 뚜렷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정세는 저자가 보기에 1차 세계대전 전야 제국주의 경쟁, 특히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독일의 부상과 닮았다. 이는 사실 매우 두려운 역사적 유비이다. 영국과 독일의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으니까.

 

적대적 공생관계의 균열

 

「제국의 충돌」보다 먼저 출간된 「차이나 붐」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보는데 다음과 같다. 1650~1850년의 자본주의 없는 시장. 1850~1980년의 시초 축적. 1980~2008년의 자본주의적 호황. 경제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자본축적이 가능한 안정기에 앞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이뤄지며 축적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시기를 시초 축적이라고 하는데, 저자가 마오쩌둥 통치시기를 농촌을 희생시키며 자본주의적 호황의 여건을 조성한 기간으로 파악하는 건 흥미로운 시각이다.

또한 저자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호황을 분석하며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수출 및 투자에 과다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출은 미국의 무역적자에 의존하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중국의 미재무부 채권 구입에 의존하고, 덕분에 미연방정부의 재정적자와 군사력도 유지된다. 근래의 미중갈등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관계이다. 이러한 적대적 공생이 유지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수출기업이 벌어든 달러를 거의 일정한 환율로 환전해주기 때문에, 무역흑자만큼 자동으로 통화 공급이 늘어나는 시스템이다. 이른바 양적 완화의 일상화인데 덕분에 돈은 넘치고 수익성을 따지지 않는 과잉투자(설비)와 부동산 상승이 구조화되었다. 이에 힘입어 당장은 경제가 성장해왔지만, 누구나 알든 거품은 붕괴하기 마련이다. 이 책이 쓰인 게 2015년인데 이후의 정세변화(중국의 성장률 하락, 부채위기 등)를 생각하면 신뢰가 가는 분석이다.

이제까지의 성장 모델이 중국과 세계에 불안을 더하는 불균형을 심화시켜왔기 때문에 훙호펑은 수출과 투자 대신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내부의 불평등 문제는 극심하다. 수 억 명의 농민공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권리 없는 노동을 참아내고 있다. 훙호펑은 불평등을 완화해가는 방향 선회가 위로부터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민주화가 진전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의 대외팽창적 성장 모델이 방향을 튼다면 미국과의 관계도 갈등과 충돌이 아닌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중국 관련 기사가 뉴스창을 채운다. 90년대 이후 미국이 독주하는 시기에 배우고 일하기 시작한 나에게는 중국의 부상은 무언가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정치체제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거부감도 든다. 그런데 미중갈등을 둘러싼 선택은 이제는 개인적 선호 이상의 문제이다. 대만해협에서의 긴장은 더해지고 있고, 앞으로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외교노선이 가장 주요한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냉정한 시각의 책들로 성급한 감정들을 식히는 것도 유익하겠다. 거대기업의 이익을 국가와 민족의 이익으로 포장하며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선전과 근거 없는 예측과 처방에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중국의 빼앗긴 자들이 자신들의 몫과 권리를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응원하며 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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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
구해근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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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속적인 의미로서 남 못지않게 산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 기준을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강남, 명품, SKY.

  강남은 서울특별시의 한 지역이기도 하고, 부유층이 모여 사는 프리미엄 아파트 단지들이 위치하는 지역들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런 곳들에 산다는 표시만으로도 그 사람의 소득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주거지는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면서도 반대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기도 한다. 강남 아파트는 부동산을 통한 자산 축적이라는 한국사회 부의 공식의 상징으로서 소유자들을 부자로, 더 큰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이름 있는 아파트에 살고 싶은 열망이 지난 몇 해 동안 얼마나 강했는지는 “영끌”, “벼락거지” 같은 신조어들이 말해준다.

  성공의 상징으로서의 자동차에 관한 신조어로는 “하차감”, “카푸어”가 있다. 몇 해 전까지는 보기 쉽지 않았던 수입차 브랜드들이 이제는 상당히 흔해져서, 이 정도는 타주지 않으면 중간도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주소는 바꾸기 어려워서인지 차는 다소 무리해서라도 급을 높여 타려고 한다. 브랜드들을 여러 층의 수직으로 배열해놓은 계급도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시계, 패션 등 명품이 있는 모든 상품에 존재한다. 무엇을 소비하는 지로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건 소비사회의 변함없는 본질이지만, 소수의 부유층뿐만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까지 수입 사치재를 향유하며 구분짓기를 하는 건 2000년대 한국의 새로운 풍속인 것 같다.

  남들 못지않게 살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중 아마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의미하는 SKY이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도 자식 학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했으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한 번씩 자녀들 교육 이야기를 들으면 이만저만 놀란다. 학원은 기본이고 예체능 활동 등을 시키는 데 어느 노동자 연봉을 쓴다. 돈만 써서는 안 되고 부모는 자녀의 인생 컨설턴트가 돼주어야 한다. 남들 자식 못지않은 다양한 이력들을 설계해주고, 입시경쟁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전략도 짜주어야 한다. 같은 나이대의 자녀를 둔 부모들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인맥의 형성과 유지를 도와주는 게 좋은 학군과 아파트이다. 강남아파트, 강남스타일, SKY와 남 못지않은 삶은 삼위일체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신 상류(부유) 중산층의 등장

 

  남 못지않게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우니 그 기준이 너무 높은 건 아닐까? 바로 이 점에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주요한 변동과 모순이 담겨져 있다. 미국 하와이대학 사회학과의 구해근 명예교수의 신간(2022.11월) 「특권 중산층」이 주목하는 현상이기도 한다.

  그저 그런 중산층이 무슨 특권을 갖고 있다는 건지 책 제목이 이상하다. 먼저 중산층의 의미에 대해 말해보면, 중산층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는 계급구조 내에서의 정의이다. 노동력을 팔아 임금으로 생활하는 노동자계급과 임금노동을 사용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가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계급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며 기업조직이 커가고 판매·서비스 직종이 다양해지면서 관리직과 전문직, 기술직, 판매·서비스 자영업자 등이 포함된 중간계급이 성장해왔다. 공무원, 군인, 교사와 같은 구중간계급과 함께 이들이 상류층인 자본가계급과 하류층인 노동자계급과 구분되는 중류층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처럼 사회를 계급구조로 바라보는 건 체제전복적이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순전히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150%에 속하는 소득자들을 중산층으로 정의하는 게 주류의 방식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간주되는 게 경제적 양극화와 이로 인한 중산층의 감소이다. 중위소득 기준으로 중산층은 1980년대에는 75% 정도였지만 2010년대에는 60% 중반으로 떨어졌다. 스스로 중산층에 속하는지 답하는 비율로 따지는 체감 중산층은 40%대로 더 떨어졌다. 경제적 양극화의 주요 원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소득격차 증가이다. 고용형태보다 회사규모에 따른 소득격차가 더 크다고 한다. 즉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개혁, 세계화의 성과가 임금소득자들 가운데서는 주로 대기업과 공공기관 정규직에게 분배되었고,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노동자와 같이 소외된 계층의 소득은 별로 늘지 않거나 감소하면서 중산층이 얇아지고 있다.

  그런데 「특권 중산층」의 저자는 중산층 전체가 감소하는 것보다 중산층 내부의 분화를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최상류층만 이익을 본 게 아니라 중산층 상부에서도 이익을 향유했으며, 1대 99가 아니라 10대 90의 구도로 사회갈등을 이해하는 게 현재의 사회동학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관점이다. 실제로 1999년부터 2016년 사이에 상위 1%가 차지한 소득은 전체 소득의 8.5%에서 14.4%로 늘어났지만,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도 32.8%에서 49.2%로 상승했다. 글로벌기업으로 변신한 재벌 대기업과 급속하게 성장한 IT산업과 금융업 등 가운데서 새로운 고소득자 집단이 나왔으며, 몇 차례의 부동산 급등으로부터 자산을 불린 이들도 많았다.

 

구분짓기와 재생산

 

  경제적 양극화와 신 상류 중산층의 등장에 따른 한국사회의 사회, 문화적 변화에 대해 ‘구분짓기’와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구분짓기는 말 그대로 상류 중산층이 자신들을 다른 사회계층, 특히 일반 중산층과 구분 지으려는 집단적 행위이다. 값비싼 아파트 단지들이 즐비한 지역에 모여 살고 명품을 소비하며,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상당한 교육비와 노력을 쏟는다. 이러한 부유 중산층의 구분짓기는 강남스타일이라는 말처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중산층에 대한 훨씬 높아진 기준을 만들어냈다. 소득기준에 따른 중산층 비율보다 체감 중산층 비율이 더 크게 떨어진 이유이다.

  대주주, 건물주 같은 자산소유자들이 많은 상위 0.1~1%에는 아예 올라갈 수 없지만, 그 이하의 고소득 직업군으로 이루어진 상위 10%는 아파트를 통한 자산증식이든, 교육을 통한 지위획득이든 진입 가능한 열려 있는 계층이다. 따라서 그 이하의 계층에게 상류 중산층은 준거집단으로 기능하며 따라잡기와 모방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중산층 내에서도 강하게 진행되고 있는 양극화에 의해 계층상승과 따라잡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일반 중산층의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류 중산층으로의 사다리가 열려 있다는 건 내부적으로는 사다리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낳는다. 이들의 지위가 자산 소유보다는 고소득 직업 또는 입시나 취업, 승진에서의 경쟁력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자녀로의 지위 승계에 있어 교육이 중요시된다. 자녀가 학벌과 전문자격증을 얻고, 영어실력과 해외경험, 인턴쉽 같은 문화자본 축적을 쌓을 수 있도록 많은 교육비와 노력을 쏟는다. 그런데 구해근 교수가 주목하는 건 상류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교육 기회가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부유 중산층이 더 많은 기회를 가져가면서 계층 재생산에 있어 폐쇄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회를 독점하면서 계층 재생산이 공고화되는 과정에는 재력과 문화자본 소유뿐만 아니라 최순실, 조국 사태에서 드러나듯이 그들끼리의 내부거래와 편법 동원, 제도 악용도 역할하고 있다. 상류 중산층의 폐쇄적 재생산은 상속이 아니라 능력으로 획득한 지위라는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며 불공정과 정의라는 문제를 사회에 던지고 있다. 상류라는 위치가 우월한 기회, 즉 특권으로 변화하고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다수가 좇는 평범한 삶, 그래서 그렇게 살지 못하면 좌절감이 더 깊어지는 생활양식은 사실 평범하지 않다. 90년대 이후 계속된 불평등 증가로 경제성장의 과실이 상위 10%에게 집중된 결과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몰고 온 기회를 잡은 상류 중산층은 자신들의 부를 그들만의 주거공간과 명품, 학벌 만들기로 체현했고, 이것들은 계층 상승을 좇는 이들의 열망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삼위일체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듯하지만 모두에게 닿을 수는 없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잔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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