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란 무엇인가
바츨라프 스밀 지음, 윤순진 옮김 / 삼천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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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의 모든 것, 모든 것으로서 에너지

[서평]에너지란 무엇인가

 

 

어느 나라 이름인지도 짐작인 안 가는 바츨라프 스밀이라는 사람이 쓴 <에너지란 무엇인가>를 읽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물론 검색으로 가장 먼저 찾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내 의문에 가장 부합하는 제목을 가진 책을 딱히 피할 도리는 없었다.

 

최근의 관심사가 바로 에너지인데,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생태위기에 대해 부쩍 관심이 일었고, 겨울철 에너지 빈곤 이슈를 가까이 접하면서 특히 에너지 위기와 대안에 관한 관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런데 호기심은 많고 아는 건 없으니,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듯 에너지의 말뜻부터 알아보기 위해 <에너지란 무엇인가>를 사서 출퇴근길에 틈틈이 읽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 읽고 나도 머릿속에 들어간 건 별로 없는 듯하다. 책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내가 모자라서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책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먼저는 에너지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할 방대한 내용들을 너무 짤막짤막하게들 다룬 것 같다. 그러니 아는 게 없는 독자 입장에서는 무엇을 말하든 수긍하거나 더 알아보기 위해 다른 책을 뒤져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의 문장이 그렇다.

 

결과적으로, 미래 에너지 공급의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전환 효율의 향상과 전체적인 에너지 수요의 비율(증가율?) 감소를 결합시키고, 혁신적인 원자로(핵융합?)를 개발하는 동안 원자력을 선택지로 열어 두며 비화석연료원의 기여를 경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고 환경적으로 수용 가능할 정도로 빨리 증가시키는 것이다.” (가로 안은 문맥 상 의미...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 아니다.)

 

말인즉, 화석연료에서 비화석연료로 에너지 생산 기반을 이행시키는 동안 원자력 발전을 상당 부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 주장을 논박하는 데 책 여러 권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위의 주장과는 다르게 원자력을 일시적이라도 화석연료 감축의 대체수단으로 고려하지 않는 실제 계획도 세워졌다. 독일은 새로운 에너지 콘센트에서 전체 전력 소비량 중 재생에너지 비율을 2020년까지 35%, 2050년까지 85%로 늘리고, 대신 원자력은 2030년까지 17% 정도를 유지하다 2050년이면 완전 폐쇄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와는 반대로 이명박 정부는 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비중을 40%대로 늘리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바츨라프 스밀이 제안하는 길을 걷는 셈인데, 저자가 이와 관련한 몇 페이지의 짧은 글 가운데서 내세우는 핵심 근거는 다음과 같다.

 

에너지 불평등이 존재하고 사회하층이나 발전이 필요한 국가에서의 수요 증가 등으로 에너지 총소비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가격 상승과 기후문제로 인해 대체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이다.

현재 기술수준에서 풍력이나 태양을 이용한 신재생에너지 공급은 날씨로 인한 변동성으로 기저발전에는 부적합한 면이 있는 등 화석에너지를 충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근래 원자력의 안전성이 많이 제고됐다.

결론적으로, 대중이 수용만 한다면 원자력은 대체 가능한 유력한 에너지이다.

 

그런데 에 대해서 탈핵 환경단체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기술적 개량으로도 근본적인 위험성을 줄일 수 없다는 게 바로 원자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 관련해서는 두 세대 안에 신재생에너지로 화석에너지를 대체하겠다는 독일의 에너지계획이 반박하고 있다. 한편, 과 관련해서는 현재의 에너지 불평등, 에너지 빈곤이나 저발전의 문제를 에너지 총투입을 계속 증가시켜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불평등한 사회구조 가운데서 에너지 투입 증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반대로 평등한 사회는 에너지 불평등의 해결과 에너지 소비 감소를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원자력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섣부르게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번역자도 후기에서 역시 지적하는 책의 문제이다.

 

책의 가장 앞장에 쓰인 저자의 이력이라면 보다 전문적인 견지에서 자기 주장을 풀어나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책에서 이를 기대할 수는 없다. 교양서적이라는 책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방대한 내용을 통째로 다룬 게 장점도 있다. 에너지의 수많은 다양한 형태들을 조금씩이더라도 한 책에서 보고 배울 있다는 건 좋은 점이다. 특히 지구에서부터 인류의 역사, 현대문명, 일상생활로 옮겨가며 각 차원에 해당하는 에너지 형태와 전환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서술구조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고도의 추상적 개념인 에너지에 대해 핵심적인 뭔가를 알려주는 듯하다. 그래서 에너지란 무엇일까?

 

책을 읽고 나서 나름대로 내린 답은, “에너지란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에너지는 만물에 편재하고 만물을 생성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는 만물 속의 거대한 에너지 흐름 속에 살고 있는 셈이고, 이 에너지 흐름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전환시킬 줄 아는 게 바로 문명이다. 그리고 에너지 전환에 대한 지식과 기술의 축적이 문명의 단계를 나눈다.

 

현재 중요한 건 우리 화석연료 문명이 지속가능하지 않고 길어봐야 두 세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그 끝을 가까이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태적으로 올바르고 합리적인 대안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책은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한다. 저자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과 기술이 마법이지는 않는데 말이다. 설령 과학과 기술에 마법같은 힘이 생기더라도, 누가 지팡이를 휘두르는지가 결정적이지 않을까? 사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집단이 통제되지 않는 지식으로 환경과 지구, 미래를 망치는 과학소설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서사이다. 문제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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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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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끼가 있는 반란

 

 

1.

  스스로는 읽지 않았을 책인데 읽게 되었다. 역시 첫 느낌은 실망스러웠다. 1장에 가난뱅이 생활 기술이라고 몇 가지 써났던데, 형편없는 자취생활을 해본 적이 있어, “이게 뭐시라고...”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읽어 내려갔다. 나도 길바닥에서 자봤단 말이야!

 

  책을 읽기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이 책이 그저 그런 탈노동운동적 저항담론중의 하나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가난뱅이의 역습이 출간된 2009년에 누군가 쓴 소개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비호감을 형성했다. 책을 끝까지 읽어 보니, 그 소개글이 딱히 잘못 전달한 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읽고 나서 비호감이 호감으로 바뀌었다. 2장 이후부터 저자인 마쓰모토 하지메가 본격적으로 말하는 연대반란이 틀린 말이 아니고, 유쾌해 보이고, 무엇보다 끼가 넘쳐 보여, 내가 하고 싶은 운동과는 차이는 있지만 감탄했다.

 

 

2.

  “말하자면정사원으로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집도 사고해서 이제는 우등반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자네! 우쭐거릴 일이 아닐세! 안된 애기지만, 자네도 이미 각 잡힌 가난뱅이란 말씀이야. 진짜 우등반이란 말이지, 잠깐 일을 쉬거나 몇 년쯤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놈들이라구. 이런 놈들은 무지무지 노력하고 무지무지 재수가 좋아야 해. 그리고 남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릴 용기가 있어야 한단 말이지.” (11p)

 

  마쓰모토에게 부자란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놈이고, 가난뱅이란 그 나머지이다. 가난뱅이도 다 같은 가난뱅이는 아니다. 스스로를 우등반이라고 착각하며 시스템의 부품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다. 물론 마쓰모토는 강제노동 수용소를 탈출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사는 가난뱅이가 되자고 한다. 다만 문제는 시스템 밖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3.

  1장에서는 다소 궁상스럽게 보이는, 이끼고 살아가는 노하우들을 적어 놓았는데, 정말 들어줄만한 건 2장부터이다. 마쓰모토가 제안하는 자활의 방법들을 압축해보면 자율협력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는 부자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밖에서 살아가야 하니, 무에서 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것을 자기 힘으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이 농촌에서의 자급자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요는 기업과 정부가 구축해놓은 타율적 영역을 벗어나 물자가 보다 자유로운 원칙에 따라 흐를 수 있도록, 자율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마쓰모토가 생각해낸 건 재활용 가게였다.

 

  “신품은 돈이 남아서 쩔쩔매는 부자들이나 사라고 해. 그런 놈은 헤헤 속아서 정신없이 새것을 사고 헌것을 버리니까, 우리는 그런 바가지 씌우는 경제 시스템에서 밀려난 것, 즉 중고품을 모아서 가난뱅이의 재산으로 돌고 돌게 하면 된다구.” (75p)

 

  물자가 돌고 돌기 시작하면 경제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하지만, 또한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트고 맺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끈끈한 협력도 가능해진다. 서로 부족한 게 보이면 채워주고, 서로 의지하고, 함께 일들을 벌이기도 한다.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만큼 자율의 공간도 넓어진다. 그러면서 자율의 가치는 이제 공동체 자치와 참여로 확장된다. 2장이 끝날 때까지, 마쓰모토는 재활용 가게를 시작한 것에서부터 지역 사회의 일원이 되고, 함께 축제를 벌이고, 공방이나 인쇄소, 극장 같은 공동체 공간도 멋대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든다.

 

 

4.

  하지만, 자율과 협력, 공동체 자치가 방해받지 않고 지낼 수만은 없다. 기업과 정부는 자신들의 질서를 구석구석에까지 구축해놓고, 가난뱅이들이 조용히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숨 막혀 싫다는 불온한 기운이 아마추어의 반란’(마쓰모토의 재활용 가게) 같은 곳에서 거리로 뿜어져 나온다 싶으면 바로 경찰이 가로막는다. 그렇지만 여기에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마쓰모토는 자신이 일으킨 갖가지 반란들을 들려준다. 드디어 가난뱅이의 반란이다!

 

  이쯤에서 감탄한 건 데모의 컨셉이다. 비장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재미와 난장이다. ,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쓰모토가 메시지 없이 난리만 피우는 건 결코 아니다. 메시지는 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새로운 감성을 입히지 않으면 요즘 가난뱅이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건 새로운 감성을 자극하고 그들의 눈과 귀가 데모대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판을 벌이는 것이다. 마쓰모토가 벌인 난장을 읽고 있으니, 이 사람은 정말 끼가 넘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난장이라면 나도 맘껏 즐길 수 있겠다~

 

 

5.

  한국에도 마쓰모토 같은 가난뱅이가 천명, 만명은 있으면 좋겠다. 거리에 나가면 데모인지, 축제인지 같은 것들이 매일 벌어질 것이다. 또 동네마다 주민들이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채워주고, 함께 결정해가는 공동체가 자라날 것이다. 아마도 현재 한국 사회에 가장 부족한 게 이런 것들이 아닐까? 아마도 현재 한국 운동권에 가장 부족한 게 가 아닐까? , 우리도 이제 끼가 있는 반란을 저질러보자. 자율과 협력, 공동체, 자치의 가치들을 앞세우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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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안내서
존 벨라미 포스터 & 프레드 맥도프 지음, 황정규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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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구의 파괴를 막기 위한 평등의 길

[서평]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파멸을 말하는 생태학

 

생태학의 기본 아이디어는 생물과 생물, 그리고 생물과 환경은 분리될 수 없이 서로 의존하고 함께 진화하는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의 결과는 상보적일 수도 있고 균형을 파괴할 수도 있다. 지금 생태학은 파멸을 경고하고 있다. 바로 인류 자신에 의한 인류의, 지구의 파멸을.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저자 : 존 벨라미 포스터, 프레드 맥도프)은 만약 세계경제가 현재와 같은 속도로 계속 성장할 경우, 그리고 우리 사회가 더 많은 이윤과 경제성장을 최우선시하는 체제를 앞으로도 유지할 경우 머지않은 시기에 맞이하게 될 말 그대로의 행성파괴에 대한 경고로부터 시작한다. 기후변화는 잘 알려진, 인간이 초래한 심각한 생태위기들 중 하나이다. 지구온난화로 북극해 얼음이 1970년대 후반보다 40퍼센트가 감소했다. 극지방 얼음의 감소가 현재 추세대로라면 21세기에 해수면이 1.5미터 이상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저지대 지방에 사는 수억 명의 터전을 삼킬 것이다. 또 이대로라면 가뭄이 수십 년 내에 육지의 70퍼센트로 확대될 것이라고도 한다. 이는 평균기온의 상승으로 감소하고 있는 곡물생산, 그리고 이미 심각한 물 부족 문제에 치명적일 것이다. 이외의 기후변화의 악영향 및 생태위기의 충격적이고 기다란 목록은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저자들은 지구환경이 인류 생존을 위협하게 변화하고 있는 근본원인은 바로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인간 입장에서 환경을 수도꼭지와 싱크대에 비유하자면, 수도꼭지로서의 환경은 자원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능력이고, 싱크대로서의 환경은 폐기물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문제는 싱크대 용량을 지나치게 초과해 수도꼭지가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넘치는 오수, 즉 탄소 및 오염물질, 쓰레기 등의 과다한 배출이 온난화를 일으키고 태평양에 한반도 몇 배의 쓰레기섬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수에 빠져 죽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할 일은 수도꼭지를 서둘러 잠그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다수 사람에게는 수도꼭지를 잠글 권리가 없다. 자원과 에너지를 빨아들여 재화를 만드는 생산설비의 가동과 확장을 결정하는 이들은 자본의 소유자들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게 거의 유일한 목적인 자본이 수도꼭지를 알아서 잠그는 일을 기대하는 건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생태사회 = 평등사회

 

그럼에도 좋은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을까? 정부규제나 환경기술, 윤리적 소비 같이.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는 실업이나 빈곤 같은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경제성장을 줄일 정도의 환경규제를 실시할 수가 없다. 반성장적 환경규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즉 경제성장이 아니고도 사회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일자리 나누기나 재분배 정책은 자본의 저항과 명령 때문에 대체로 배제되고, 정부는 성장주의에 스스로를 가둘 수밖에 없다. 환경기술 역시 믿을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면서 자원의 고갈을 막고 폐기물의 발생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환경기술이란 물리법칙의 피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공짜 점심은 없다! 한편, 친환경제품을 쓰고 적게 소비하자는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왜곡한다. 2007년 미국에서는 겨우 400명이 이 나라 하위 50퍼센트인 15,000만 명의 부를 모두 합한 만큼 소유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괜찮은 생활조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다.” 엄청난 부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투자에 투자를 더하는, 한계를 모르는 자본축적이 환경파괴의 진정한 원인이다.

 

저자들의 결론은 단호하다. 생산력이 생태위기와 사회불평등을 함께 해결하는 방향으로 조절되고, 자본축적이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인간적 필요의 충족이 경제의 목적이 되며, 자본을 소유한 소수가 아니라 노동하는 다수가 사회를 운영하는 생태혁명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이처럼 환경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전의 양면으로 파악한다는 데서 책은 빛이 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존 관계에 일어나고 있는 균열의 뿌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이다. 다수가 노동으로 일궈낸 부를 소수가 재산으로 도둑질하고, 자연을 소유하고 남용하는 게 이러한 도둑질의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간착취와 자연착취가 나란히 불가분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파괴를 멈추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착취와 불평등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도 싸울 줄 알아야 한다. 부는 모두를 위해 쓰이고, 자연은 누구의 것도 되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부가 더 큰 부를 위해서만 이용되는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기본적 필요의 충족을 위해 이용되는, 그래서 모두가 함께 발전하는 평등사회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열도 치유할 것이다. 경제성장의 강박에서 벗어나 인간성이 만개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사회에서는 인간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는 생태위기의 해결을 우선할 것이다. 때문에 평등사회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사회는 서로 다르지 않다.

 

사실 생태위기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근래 유난히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바로 전지국적 기후변화의 일부이며, 에너지 요금 상승이 재생불가능한 자원 고갈의 징후이다.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이런 문제들을 보다 깊이,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돼줄 것이다.

 

 

- 붉은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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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왜 사회주의인가?
앨런 마스 & 하워드 진 지음, 유정.이원웅 옮김 / 책갈피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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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 왜 사회주의인가?

: 대선패배의 힐링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이틀 전, 18대 대통령으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다. 문재인 후보에게 표를 던진 지지자들은 멘붕 상태에 빠져있다. 이번 대선의 프레임은 보수 대 진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보후보는 왜 패했을까? 그리고 비록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왜 진보후보를 지지했을까? 진보의 사전적 의미 중 하나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이다. 이 의미를 따르면, 문재인 후보와 그 지지자들은 사회 발전을 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 왜 사회주의인가?(책갈피, 2012)투쟁 없이 진보 없다.”고 단언한다. 누군가가 선출되는 것만으로는 어림없다는 말이다. 책의 저자인 앨런 마스(Alan Maass)는 미국의 사회주의 조직 중 하나인 국제사회주의자단체(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의 활동가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했다. 한국정치가 점차 미국과 같이 양당정치로 수렴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현실은 우리에게 꽤 참고가 될 듯하다. 사실 미국과 같은 양당정치는 서구민주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경우인데, 공화당과 민주당 말고는 전국적 규모의 정당이 부재하고, 또한 같은 말이지만 사회(민주)주의정당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미국의 급진주의, 진보주의자들은 항상 선택을 강요받는데, 소극적이게는 보수적인 공화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적극적이게는 민주당을 통해서 개혁을 추구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한국에서도 전자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건재했을 때는 선거 시 사표 논란으로, 후자의 문제는 진보 인사들의 민주당 입당이나 야권연대 논란으로 비슷하게 재현된 바 있다. 이런 선택, 문제들과 관련해 앨런 마스의 입장은 단호하다.

 

공화당과 그들의 추악한 말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우파를 저지하고자 하는 심정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민주당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민주당이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는 것은 상식인 듯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잘못된 방법이다. 사람들은 공화당이 발의한, 희생자를 비난하는 잔인한 법안들이 싫어서 클린턴에게 투표했지만 민주당 대통령은 공화당과 똑같은 조처를 취했다. 사람들은 조지 W 부시가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전쟁에 신물 나서 버락 오바마에게 투표했지만, 똑같은 전쟁 정책을 더 조리 있게 설명하는 말만 듣게 됐을 뿐이다.” (128p)

 

,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은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째서일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바로 악을 잉태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공화당도, 민주당도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이다.

 

1자본주의는 왜 고장났는가?”2그리 자유롭지 않은 땅”, 3전쟁의 참상에서 저자는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인 제프 패럴, 애디 포크, 바버라 하비 등과 그리고 이라크의 파라 파드힐 등이 겪은 잔인한 삶을 전하며 어쩔 수 없는 빈곤과 억압,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는 빈곤과 억압, 전쟁을 이야기한다. 이어서 4사회주의란 무엇인가?”는 아래의 문장들로 시작하며, 대안을 설득한다.

 

사회주의의 기본 사상은 간단하다. 사회의 자원이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룩한 엄청난 성과는 소수의 사람들을 부자와 권력자로 만드는 데 쓰일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빈곤과 억압, 폭력에서 벗어나 풍요롭고 보람찬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는 데 쓰여야 한다.” (95p)

 

그렇다면 체제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질문과 같은 제목의 5장에서 저자는 개혁을 추구하겠다던 오바마의 말 따로 행동 따로행각, 그리고 공화당과 다르지 않은 민주당을 폭로하고, 이어서 선거로 체제를 고쳐 쓸 수 없는 까닭을 밝힌다. 20세기 초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당신이 워싱턴에 가서 정부 관리를 만났다고 치자. 당신 이야기를 공손히 듣고 있는 그 관리가 실제로 받아들이는 조언은 금융계·제조업계·상업계 거물들의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미국 정부의 주인은 미국 자본가와 제조업자 전체다.” (132p)

 

20세기 초의 미국정부와 21세기의 미국정부, 그리고 현재의 한국정부가 얼마나 다를까? 다르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런데 진정 달라진 게 있다면, 이는 투쟁에 의해서만 그렇게 됐다. 6장의 제목은 바로 투쟁 없이 진보 없다이다.

 

"학교에서는 정치적·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평화롭고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불의에 대한 반감을 조직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조급하게 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 체제가 작동해서 문제가 해결될 테니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의 역사 전체를 돌아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전반기에 미국 남부와 북부의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 남부 노예제를 가만 놔두더라도 결국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틀렸다. 면화 생산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노예제는 점점 더 강력해졌다. 이 참상을 끝내는 데는 남북전쟁이 필요했다.

미국 역사에서 벌어진 운동들을 보자. 공민권운동, 여성참정권 운동, 8시간 노동제 운동, 반전운동 등 모든 운동은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고 온건하게 행동하라는 요구에 직면했다. 마틴 루서 킹은 버밍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랫동안 나는 기다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든 흑인은 이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입니다. 기다려라는 말은 거의 언제나 결코 안 된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너무 오래 지연시키는 것은 정의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저명한 법조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다리지않기로 작정한 활동가들의 결단력이 공민권운동이 승리한 비결이다.” (144p)

 

마지막 장인 사회주의와 투쟁 그리고 여러분에서는 잘못된 세계와 쟁취할 세계 사이에 놓인 길을 말한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와 저항 사이의 간극을 이어 줄 지름길은 없다. 기성 체제를 대체하는 데 필수적인 지지와 광범한 동원 기반을 가진 사회·정치 운동(공민권운동처럼 현재 상태를 정말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운동)은 완전히 성숙한 형태로 갑자기 출현하지 않는다. 자유와 정의를 위한 모든 투쟁의 역사는 이런 운동이 하나하나 차분히 건설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자 파크스가 195512[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내주기를 거부하다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처럼 투쟁에는 절정의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절정 이전의 순간들도 기억해야 한다. 로자 파크스가 몽고메리에서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지부를 만들었을 때, 테네시 주의 하이랜더 포크 스쿨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해서 투쟁의 미래를 토론했을 때, 인종 격리 반대 시위들에 참가했으나 시 전체의 흑인 반란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때 같은 그런 순간들 말이다. 이런 순간들이 다가올 절정의 토대를 놓았다.” (175p)

 

우리가 진정으로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바란다면,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일은 모든 빈곤과 억압, 폭력에 반대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저항들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기다리지 말고 지금 불의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없어도, 투쟁이 없어도, 기성 제도로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약속을 믿는 대신 나의 참여와 행동으로 새로운 세계를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는 것이다.

 

대선에서 정말로 진 걸까? 그것은 정말로 우리의, 우리를 위한 싸움이었나? 지금 우울하다면 힐링의 시작이 될 이 질문에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 왜 사회주의인가?가 답해줄 것이다.

 

 

- 붉은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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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안내서
존 벨라미 포스터 & 프레드 맥도프 지음, 황정규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서평

: 완전한 사회주의 = 완전한 생태주의

 

 

1. 생태주의자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사상이 반생태적이지는 않더라도 현대 생태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황정규 동지를 통해서였다. 노동해방실천연대가 2009년에 발간한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3호에 실린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황정규는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 속에 생태주의적 인식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이러한 맑스와 엥겔스의 생태주의적 인식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자 하였다.”고 평가하며 폴 버켓과 존 벨라미 포스터의 연구를 소개했다.

 

폴 버켓과 존 벨라미 포스터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초기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라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중심으로 한 유물론 철학을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유물론을 후기에까지 심화 확대시켰는데, 당대에 자본주의 농업이 야기한 토양 비옥도 상실과 도시의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분석에서, 독일의 화학자인 리비히의 연구에서 착안해, 환경문제를 물질대사의 균열로 표현했다. 유기체가 외부의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를 교환하는 메커니즘을 의미하는 물질대사의 개념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하여, 자본주의에 의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균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결국 인간과 자연도 함께 파괴된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에서 물질대사 개념을 빌려오면서, 여기에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파악을 더하여 독창적으로 변형해냈다.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관계는 역사의 기초이고 토대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각 사회구성체마다 서로 다른 고유한 형태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인데, 이 노동이 역사가 발전해오며 함께 근본적으로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의 특징은 무제한적 이윤과 자본축적에의 종속과 이로부터 비롯하는 인간 소외인데, 그 결과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과 자본주의적 생산 사이에 극심한 모순이 발생하고, 파멸을 인식하면서도 폭주를 멈추게 못하는 소외된 인간이성의 무기력함이 증대한다. 따라서 인류 생존의 위기를 부르는 물질대사의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균열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돼온 인간의 전면적인 발달의 재개와 이에 의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재정립과 질적 도약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한, 황정규의 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토막을 길지만 옮겨본다.

 

인간 개개인의 다방면에서의 발전이 진행될 때에만 물질대사의 균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발전과 이 지식을 올바로 이용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발전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의 맹목적 힘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자연과 공존하는 관계를 맺는데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이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가야 한다.

또한 이는 인간이 자연과 맺고 있는 노동의 형태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인간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맑스는 인간노동이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스스로의 본성 역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는 인간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치유하기 힘든 균열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인간발전을 왜곡시키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극복하는 것이 인간해방을 자신의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전망은 위의 인용문에서 인간의 완전한 발전”, “인간의 힘을 목적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전망은 모든 억압과 착취의 극복과 노동의 소외의 극복이라는 사회주의 본연의 목표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복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함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는 완전한 인간주의=완전한 자연주의라는 1844년 초고에서의 맑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황정규는 이 글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생태학’, 그리고 다른 생태주의 사상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는데, 그 노력 중 하나가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의 번역이다. 다양한 활동으로 바쁜 일상 중에서도 책을 번역한 노고에 감사한다. 또 이론과 실천을 함께 겸비한 사회주의자에 의해, 어느 범용한 교수들과는 다르게 인간해방의 이상을 위해 분투해온 존 벨라미 포스터와 프레드 맥도포가 공저한 글이 번역된 것에 다시 감사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2.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최선의 안내서

 

책은 서문과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고, 어렵지도 길지도 않다. 그러면서 저자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의 핵심은 모두 녹아 있다. 한 마디로 간명하며, 때문에 마르크스의 생태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여행하기 위한 최선의 안내서라 할 만 하다. 앞서 말했듯이 마르크스의 생태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관계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균열을 내고 있는지의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에 대한 최선의 안내서는 동시에 환경에 치유할 수 없는 충격을 가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본성에 대한 최선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책의 부제는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안내서이다.

 

1장의 제목은 지구의 생태위기이다. 저자들은 최근 지구시스템과학에서 과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발전시킨 것 중 하나가 행성 경계라는 개념”(14p)이라며, 행성 경계의 개념에 근거해 생태위기의 심각성을 전달한다. 행성 경계란 인간이 야기한 다양한 환경변화들이 이미 넘어섰거나 코앞에 둔 각각의 마지노선들로서, 만약 그 경계를 넘어설 경우 돌이킬 수 없이 인간과 다른 생물종들에게 지극히 적대적인 새로운 환경에 직면해야 한다. 행성 경계의 대표적인 예들이 기후변화와 해양 산성화, 성층권 오존의 소진 등인데, 해양 산성화의 경우 과학자들이 제시한 경계는 2.75인데 산업화 이전에는 3.44였던 것이 현재는 2.90이다. 이와 같이 1장에서는 생태위기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이미 우리 문 앞에 도착해 노크하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2현행유지 : 행성파괴에 이르는 길은 제목 그대로, 우리가 현재의 경제체제를 유지한다면 금세기 내에 맞이하게 될 파멸을 말한다. 그런데 이 전 지구적 경제체제는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경제성장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성장의 잠정적 목표에 도달하기 이전에 지구는 완전히 거덜 나고 말 것이다. “허먼 댈리는 전 세계가 미국 수준의 일인당 생산과 소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가능성의 정리라고 불렀다. 이를 위해서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6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43p) 그런데 현행유지가 행성파괴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준의 불평등이 함께 유지되는 것도 의미한다. 그리고 부자들은 생태위기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빈자들에게 그 곤경을 전부 떠넘긴다. 바로 자본주의를 통해서.

 

3자본주의와 성장지상주의는 생태위기를 야기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소유자(자본가)가 직접 생산자(노동자)가 발생시킨 잉여생산물을 전유하고, 이를 통해 소유자가 자본축적(투자 및 부의 축재)을 할 수 있게 하는 경제적, 사회적 체제다. 생산은 이윤의 발생과 축적의 촉진을 목적으로 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물질적 형태를 취한다. 이 체제에서 개인들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며, 오직 자신들 간의 상호경쟁과 시장의 비인격적 힘들을 통해서만 제재를 받는다.”(51p)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충돌하는 면에서 자본주의를 고찰하면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자본주의의 추동력과 동기는 이윤과 축적을 향한 끝이 없는 추구다. 두 번째, 경쟁 때문에 기업은 지속적으로 판매의 증가와 시장점유율의 상승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56p) , 더 큰 이윤을 향한 갈망으로 현재의 이윤을 새로운 자본으로 투자하는 내적 본질과, 경쟁을 낳고 패자를 도태시키는 시장에서 가해지는 외적 강제에 의해 자본은 성장과 축적을 멈추지 않고, 그 결과 경제는 지속적으로 팽창하게 된다. 그런데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더욱 경제성장에 매달리게 되는데, 성장이 멈추는 순간 체제의 취약성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이를 저자들은 미국경제의 통계를 들어 “GDP 성장률이 노동인구의 증가보다 실질적으로 더 크지 않다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점”(81p)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체제의 취약성을 줄여 줄지는 몰라도 환경에는 몇 배나 더 파괴적이다.

 

4환경과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가 환경에 가하는 충격의 구체적인 양상들을 살핀다. 규모가 커짐에 따라 기업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원과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펼친다. 그리고 기업은 인류의 보편적 관점과 공익이 아니라 오직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만 작동하고, 자연을 이윤 생산의 수단으로만 취급하며, 마치 자연에는 한계가 없다는 듯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더 많은 폐기물을 투기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거의 멸종 지점에 다다른 수많은 해양 어종의 감소는 어떻게 재생가능한 자원조차도 고갈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남획으로 인해 상업 어종의 1/3이 이전의 잠재어획량 중 단 10퍼센트만을 겨우 생산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상업 어종이 21세기 중반까지 이렇게 될 것이다.”(97p)

끝없는 성장 추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정부의 환경 관련 행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탐욕과 이기심을 숭배하며, 이를 인간본성으로 여긴다. 그리고 정부는 기업에 사실상 포획돼 있는 지경이며, 기업과 성장 앞에 놓인 장애를 치워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따라서 지금의 체제가 지닌 본성 중에는 너무 늦기 전에 체제를 한 걸음 물러서게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132p)

 

5자본주의는 녹색이 될 수 있는가?저탄소 녹색성장’, ‘지속가능한 발전등의 표어가 대변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는 기술적&시장 기반의 해결책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논박한다. 기술의 발전이 문제의 대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팽창을 본질로 하는 경제체제는 오히려 역설적인 결과를 발생시킨다. 에너지, 자원 저감 기술이 단위생산비용을 줄여줌으로써 실제로는 자본축적을 가속화시키고 소비총량을 더 증가시키는 식이다. 또한 탄소거래제 같은 시장적 해결책,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같은 기업 자율에의 의존도 환상에 불과하다. 저명한 보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회사의 주주들이 봤을 때 기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면서 환경 관심사를 추구한다면, 그때는 그가 부도덕한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148p)

이러한 상황에서 증식 핵반응로나 탄소격리 같은 재앙을 초래할지 모르거나 불확실한 하이테크놀로지까지 무책임하게 대안으로 선전되고 있다. 이런 해결책들에 공통된 심리는 이런 것이다. “자본주의가 환경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따라서 환경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구해야 할 대상은 지구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가 된다.”(143p)

 

반대로 자본주의가 아니라 지구를 구하는 길은 무엇인가? 6생태혁명, 가능성을 현실로는 자본주의 안에서 생태위기를 경감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현실적이지 못하며,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생태혁명만이 유일한 출구라고 웅변한다. “생태혁명은 인간과 자연 모두에 대한 착취의 악순환을 끊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206p) 마르크스의 말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제한된 태도는 그들의 서로에 대한 제한된 관계를 결정하며, 그들의 서로에 대한 제한된 태도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제한된 관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태혁명은 인간해방의 사회주의를 전제하며, 그 기본원칙에 생태적 성격을 가미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소유가 아닌 사회적 이용, 연합한 생산자들이 행하는 자연과 인류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질대사의 합리적 규제, 현재와 미래 세대를 포함하는 공동체의 필요 충족”(197p)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내버려두지 않으면서도, 생태혁명의 전망 안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지구적 생태위기에 맞선 급진적 운동들이 등장하고 성장하고 있다!

 

 

3. 지속가능한 미래를 말하는 오래된 신념

 

황정규는 역자 후기에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같이 전달하고 있다. “2000년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에 걸쳐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면서,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는 기존의 견해를 완전히 논박했다. 포스터는 책을 구상하는 초기 단계에서 책 제목을 마르크스와 생태학으로 정하려 했으나,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야말로 핵심적인 생태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책 제목을 마르크스의 생태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269p)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가 생태주의적 인식과 비전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라는 인식 기반이 생태위기에 대한 고찰에 얼마만큼의 날카로움과 비타협적 투쟁성, 한결 같은 원칙, 총체적 대안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를 책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책의 논리를 간단한 형태로 음미해보자.

 

인간이 야기한 다양한 환경변화들이 현재와 같이 지속된다면, 지구는 틀림없이 파멸에 이르는,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몇 년 안에 들어설 것이다.

자본주의는 제한 없는 팽창을 본성으로 가지며, 이로 인해 자연은 인간에 의한 착취의 관계 아래에 놓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생태위기에 기술적&시장 기반의 해결책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경제팽창과 자연 착취를 멈추지 않고서도 지구의 파멸을 막을 수 있다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믿음이다.

물질대사의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착취를 매개로 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서로를 제한하지 않으며 하나의 발전이 다른 하나의 발전에 전제가 되는 생태혁명, 사회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에 대해서는 모든 환경주의자가 동의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환경주의자들은 생태위기의 심각성과 시급성을 알리고 반대의 행동을 조직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러나 파멸적인 환경변화들이 자본주의 그 자체에서 기인하며, 때문에 이런저런 수선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체제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 , 에 대해서는 환경주의자들 사이에서 공통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세 가지 명제들이야말로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비타협성이 없이는 이 말하는 비현실적인 믿음으로 퇴보할 것이며, 이는 결국 지구를 파괴하는 길이다.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길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한 빨간불이 돼주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와 그 생명력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어느 사상보다도 자본주의에 대한 일관되고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비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노동자계급과 화해 불가능한 체제로 규정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의 세계와 흔히 비견되는 아담 스미스의 세계를 보자. 스미스는 재화를 교환하려는 성향이 인류의 본성이라고 했다. 따라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즉 교환하려는 본성을 제약하는 장애물들이 제거될수록 교환의 빈도와 범위가 늘어나고, 또한 이로 인해 분업이 발전한다고 했다. 그리고 분업의 발전은 생산성을 향심시킴으로써, 교환의 확대는 결국 국가의 부를 풍요롭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장사회에서 부의 형태는 상품이다. 저마다 각자가 생산한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이를 타인의 소유물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일정한 비율을 교환가치 또는 가격이라고 한다. 경제주체는 바로 이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생산활동에 종사하는데,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은 동시에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용가치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자의 이익을 위한 상품생산이 결국 사회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게 된다. 시장은 이기심을 이타적 역할로 이끈다. 스미스는 바로 이 조화로운 손이 국부를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웅변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영원불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게 아니라 스미스가 문제 삼지 않는, 오히려 시장사회의 건전한 기초로 파악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특수한 사회제도로부터 시작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은 대부분의 핵심적인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배제된 노동자계급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계급에게 판매한다. 노동력도 어느 상품과 마찬가지로 교환가치를 갖게 되며, 이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바로 임금이다. 자본가는 임금 비용의 지출을 통해, 즉 노동력 상품의 구매를 통해 비용 이상의 이득을 취한다. 가장 먼저는 상품생산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이윤을 획득한다. 이윤은 일단 형성되면 자본의 생산성이든, 경영의 생산성이든 환상적인 외관을 취하지만, 그 근원은 노동력 상품의 구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연이 정한 노동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시간은 숱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만약 노동시간의 길이가 겨우 건물, 기계, 도구, 원료, 연료 등의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를 충당할 정도의 상품가치밖에 생산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이윤이 유일한 목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성 상, 자본주의도 임노동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은 결국 그 이상으로 연장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임금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의 연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윤은 바로 이 노동시간의 연장, 초과노동의 흡수로부터 나온다. 자원과 기술, 경영 등 무엇도 노동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상품을 결코 생산해내지 못한다. 반대로 노동도 자원과 기술, 경영 등과 결합하지 못한다면 무엇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어느 생산요소와 같지 않고 다른 점은 자유의 존재라는 것이다. 다른 생산요소들은 자본의 의도에 철저히 종속되며, 그 사용가치가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자본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에 비해 노동은 자본의 일부이면서 일부가 아니다. 노동은 어느 때든지 인격체로서, 자유의 존재로서 자본에 대립한다. 때문에 이윤은 오직 노동을 노동시간의 형태로 물적 존재화해 자본에 통합시키는 정도, 즉 경제적 강제에 의해서만 비로소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윤은 노동에 대한 착취자로서의 자본의 승리와 지배, 그리고 생산수단의 독점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의 표현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사회에서는 착취와 이윤이 사라지고 공동의 소득에서 얼마를 분배하고 얼마의 잉여를 다음 해의 투자를 위해 남겨놓을 것인지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새로운 사회과정이 대신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노동을 착취하는 권력, 자본과 노동 사이의 지배-피지배의 사회적 관계로 일반화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비판력을 피워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마르크스에 대해서 많은 환경주의자들이 노동착취의 이론은 인정할 수 있지만 자연착취에는 맹점을 갖는 것으로 비판해왔다. 이러한 오해에 통렬한 반박을 내놓은 게 바로 버켓과 포스터 등의 연구업적인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바를 다시 강조하자면, 마르크스가 놀랍게도 시대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의한 자연착취라는 문제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바탕은 그의 유물론 철학 덕분이었다. 인간과 자연을 서로 다른 두 원리로서 파악하는 이분법적인 관념론 철학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그리고 자연을 인간의 확장된 몸으로 파악하였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이전의 유물론을 따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을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의 실천에 의해 변화 발전하고, 다시 역으로 자연의 변형이 인간 역사에 새로운 가능성과 제약을 제공하는 존재로 바라보았다는 점에 마르크스의 고유성이 있다. 즉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창조하는 기초가 된다. 이처럼 자연을 역사를 갖는 존재로 파악하면서 마르크스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는, 자연의 원래적 의미를 초월한다. 이 초월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즉 노동(생산)이 역사를 창출한다는 유물론적 역사파악의 전제가 마련된 것이 하나이고, 또 인간에 의한 자연의 새로운 변형이 인간과 자연에 부정적인 변화를 낳을 수도 있다는, 오늘날 가장 시급한 인식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역시 서두에서 소개했듯이, 마르크스는 실제로 후자의 인식을 당대의 자본주의 농업이 낳은 토양 비옥도 상실과 도시의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분석으로 구체화시켰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자연착취에는 맹점을 갖고 있다거나 생태주의와 무관하다는 생각은 깊은 오해인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사상이 단지 생태주의적 인식을 포함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확고한 생태적 비전을 제공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생태위기는 바로 자본주의에 의한 물질대사의 균열이다. 즉 인간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하면서 인류가 생존하고 번성하는 토대 중의 토대인 생물들 사이, 생물과 비생물 사이의 물질 순환이 파괴되고, 이로 인해 환경은 인류는 물론 대다수 생물종에게 적대적인 시공간으로 변해왔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극복이란 물질대사 균열의 치유이고,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방식이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방식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바로 자본주의라는 총체. 자본은 노동을 착취함으로써만 이윤을 생산하고 축적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으로부터 재료를 취하게 되는 생산수단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의 수단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자본의 도구가 된다. 자본은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도구와 촉매로써 생산수단을 운동시킨다. 더 많은 착취와 이윤을 위해서는 상응하는 더 많은 생산수단이 투입돼야 한다. 이에 더해 자본주의 특유의 노동절약 기술의 발전은 노동 한 단위 당 생산수단 양의 비를 비약적으로 늘림으로써 생산수단의 투입과 집중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왔다. 저항이 아니고서는 노동의 착취에서 제한을 모르는 자본은 역시 자연의 착취에서도 한계를 보지 못한다. 자연이 노동 착취의 도구로 전도되는 자본주의에 물질대사 균열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당연히 자본주의의 극복을 말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생태적 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 균열의 뿌리를 보았듯이, 마찬가지로 물질대사의 치유는 반드시 새롭고 평등한 사회적 관계의 형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완전한 사회주의만이 완전한 생태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새로이 만들어가게 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생적 관계는 다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과 인간의 전면적인 발달을 촉진할 것이다. 완전한 생태주의만이 완전한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생태적 비전은 동시에 사회적 비전이며, 사회적 비전이 곧 생태적 비전이다. 이러한 인식과 대안에서의 총체가 바로 마르크스를 자본주의와 투쟁한 불온한 사상가로뿐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미래와 그 원리를 그려낸 선구적 사상가로 미래의 세대가 기억하게 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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