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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평점 :
『가난뱅이의 역습』 & 끼가 있는 반란
1.
스스로는 읽지 않았을 책인데 읽게 되었다. 역시 첫 느낌은 실망스러웠다. 1장에 “가난뱅이 생활 기술”이라고 몇 가지 써났던데, 형편없는 자취생활을 해본 적이 있어, “이게 뭐시라고...”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읽어 내려갔다. 나도 길바닥에서 자봤단 말이야!
책을 읽기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이 책이 그저 그런 ‘탈노동운동적 저항담론’ 중의 하나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가난뱅이의 역습』이 출간된 2009년에 누군가 쓴 소개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비호감을 형성했다. 책을 끝까지 읽어 보니, 그 소개글이 딱히 잘못 전달한 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읽고 나서 비호감이 호감으로 바뀌었다. 2장 이후부터 저자인 마쓰모토 하지메가 본격적으로 말하는 “연대”와 “반란”이 틀린 말이 아니고, 유쾌해 보이고, 무엇보다 끼가 넘쳐 보여, 내가 하고 싶은 운동과는 차이는 있지만 감탄했다.
2.
“말하자면… 정사원으로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집도 사고해서 이제는 ‘우등반’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자네! 우쭐거릴 일이 아닐세! 안된 애기지만, 자네도 이미 각 잡힌 가난뱅이란 말씀이야. 진짜 ‘우등반’이란 말이지, 잠깐 일을 쉬거나 몇 년쯤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놈들이라구. 이런 놈들은 무지무지 노력하고 무지무지 재수가 좋아야 해. 그리고 남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릴 용기가 있어야 한단 말이지.” (11p)
마쓰모토에게 부자란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놈”이고, 가난뱅이란 그 나머지이다. 가난뱅이도 다 같은 가난뱅이는 아니다. 스스로를 우등반이라고 착각하며 시스템의 부품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다. 물론 마쓰모토는 “강제노동 수용소”를 탈출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사는 가난뱅이가 되자고 한다. 다만 문제는 시스템 밖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3.
1장에서는 다소 궁상스럽게 보이는, 이끼고 살아가는 노하우들을 적어 놓았는데, 정말 들어줄만한 건 2장부터이다. 마쓰모토가 제안하는 자활의 방법들을 압축해보면 ‘자율’과 ‘협력’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는 부자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밖에서 살아가야 하니, 무에서 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것을 자기 힘으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이 농촌에서의 자급자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요는 기업과 정부가 구축해놓은 타율적 영역을 벗어나 물자가 보다 자유로운 원칙에 따라 흐를 수 있도록, 자율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마쓰모토가 생각해낸 건 재활용 가게였다.
“신품은 돈이 남아서 쩔쩔매는 부자들이나 사라고 해. 그런 놈은 헤헤 속아서 정신없이 새것을 사고 헌것을 버리니까, 우리는 그런 바가지 씌우는 경제 시스템에서 밀려난 것, 즉 중고품을 모아서 가난뱅이의 재산으로 돌고 돌게 하면 된다구.” (75p)
물자가 돌고 돌기 시작하면 경제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하지만, 또한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트고 맺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끈끈한 협력도 가능해진다. 서로 부족한 게 보이면 채워주고, 서로 의지하고, 함께 일들을 벌이기도 한다.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만큼 자율의 공간도 넓어진다. 그러면서 자율의 가치는 이제 공동체 자치와 참여로 확장된다. 2장이 끝날 때까지, 마쓰모토는 재활용 가게를 시작한 것에서부터 지역 사회의 일원이 되고, 함께 축제를 벌이고, 공방이나 인쇄소, 극장 같은 공동체 공간도 멋대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든다.
4.
하지만, 자율과 협력, 공동체 자치가 방해받지 않고 지낼 수만은 없다. 기업과 정부는 자신들의 질서를 구석구석에까지 구축해놓고, 가난뱅이들이 조용히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숨 막혀 싫다는 불온한 기운이 ‘아마추어의 반란’(마쓰모토의 재활용 가게) 같은 곳에서 거리로 뿜어져 나온다 싶으면 바로 경찰이 가로막는다. 그렇지만 여기에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마쓰모토는 자신이 일으킨 갖가지 반란들을 들려준다. 드디어 가난뱅이의 반란이다!
이쯤에서 감탄한 건 데모의 컨셉이다. 비장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재미와 난장이다. 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쓰모토가 메시지 없이 난리만 피우는 건 결코 아니다. 메시지는 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새로운 감성을 입히지 않으면 요즘 가난뱅이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건 새로운 감성을 자극하고 그들의 눈과 귀가 데모대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판을 벌이는 것이다. 마쓰모토가 벌인 난장을 읽고 있으니, 이 사람은 정말 끼가 넘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난장이라면 나도 맘껏 즐길 수 있겠다~
5.
한국에도 마쓰모토 같은 가난뱅이가 천명, 만명은 있으면 좋겠다. 거리에 나가면 데모인지, 축제인지 같은 것들이 매일 벌어질 것이다. 또 동네마다 주민들이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채워주고, 함께 결정해가는 공동체가 자라날 것이다. 아마도 현재 한국 사회에 가장 부족한 게 이런 것들이 아닐까? 아마도 현재 한국 운동권에 가장 부족한 게 ‘끼’가 아닐까? 자, 우리도 이제 끼가 있는 반란을 저질러보자. 자율과 협력, 공동체, 자치의 가치들을 앞세우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