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 세계 10억 인구의 삶을 바꾼 공생의 대안경제 시스템
마조리 켈리 지음, 제현주 옮김 / 북돋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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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10억 인구의 삶을 바꾼 공생의 대안경제 시스템이라는 부제를 단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는 근래의 협동조합 열기에 힘입어 나온 책들 중의 하나이다. 협동조합 관련 책들을 거의 읽어보지 않아서, 이런 종류의 책들 중에서 이 책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쉽게 읽히고 유익했다.

 

  먼저는 주식회사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다. 주식회사란 기업에 대한 소유권이 유가증권으로 분할되어 증권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권이 주가형태로 가격을 갖고 거래되기 때문에 소유자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을 당장 부자로 만들어줄 주가상승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주주들의 요구(즉 높은 주가)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그리고 신속한 이윤 확대가 기업의 지상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은 돌이킬 수 없이 탐욕으로 물든다. 증권거래소에 상장되고나서는.

 

  저자인 마조리 켈리가 흥미로운 건 주식회사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을 체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간다는 점에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주식회사를 고용주로, 판매자, 채권자 접하게 된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주식회사는 탐욕적이다. 노동자를 손쉽게 해고하고 소비자를 간단히 무시하고 채무자(대출자)의 존엄성까지 훑어내고 이런 돈으로 정치도 좌우한다. 결국 주식회사의 탐욕 앞에서는 무력하게 벌거벗겨질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이런 상황을 추출적 구조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 소수의 대주주가 주식회사라는 빨대를 통해 대다수의 땀의 결실을 훔치는 것이다.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면 부익부빈익빈이 극심해지고 모기지대출 연체로 촉발된 2008년 경제위기 같은 힘든 시기가 반복된다.

 

  그래서 저자가 대안으로 내놓는 것은 주식회사가 아닌 대안적 소유방식의 발전이다. 대안적인 소유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협동조합, 종업원 소유, 공동체 소유 등등. 어떤 형태이든 핵심은 이윤확대의 강박을 벗겨내고 다양한 가치들이 기업 안에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있다. 저자의 표현으로는 생성적 구조의 형성이다. 추출적 구조에서 생성적 구조로의 이행은 시대의 과제이고, 그 가운데에는 회사를 누가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다.

 

  누가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서 대안기업을 고민한다는 점이 근래 유행하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같은 말들을 되씹어보게 한다.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등에 대해 근래 부쩍 늘어난 관심은 나아지지 않는 경제와 살림살이의 팍팍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아래로부터의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는 당장 손에 잡히는 게 협동조합등이고, 웬일인지 덩달아 정부와 대기업, 언론들도 관련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사회적기업 육성법과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되고, 기업에서 내놓는 지원프로그램들도 늘어나고, 관련 강좌와 출판물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만사가 잘돼가고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사회적기업 같은 경우는 현재 정부에서 사회적기업을 인증해주면서 공공기관에서의 인증기업제품 의무구입 같은 여러 장려책을 통해 지원해주고 있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중간유통으로 구입실적 채워주고 중간마진 먹기 이상이 아닌 곳이 있고, 기존의 열악한 일자리를 대신하는 데 그치기도 하고, 지원받기 위한 게 아니라면 굳이 사회적기업이어야 하는지 물음표가 떠오르는 곳도 있다. 이런저런 모습들을 더해보면 대안과 이정표가 되기에는 많이 모자라 보인다.

 

  이는 어떤 맥락에서 협동조합등을 내세우는지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등을 주식회사체제를 보완하는 역할에 한정짓는 것, 즉 일자리와 빈곤 문제의 완화를 위해 빈곤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그들이 스스로를 고용하는 수단 정도로 장려하는 건 실제로는 그만큼도 해내지 못하도록 한다. 마조리 켈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추출적 구조와 함께 나란히 생성적 구조가 발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협동조합등이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려면 주식회사체제의 극복과 소유패러다임의 폭넓은 변화를 전제해야 한다. 사회적 목표 추구 같은 가치를 담아내려면 이에 합당한 사회적 소유의 틀을 짜야한다. 소유자들의 금전적 이익 추구를 보장하는 소유방식의 온존과 사회적 목표의 추구가 양립할 수는 없다. 때문에 협동조합등의 구상에 있어 대안적 소유방식은 본질적이며, 본질이 사상된 작금의 논의행태는 기만과 다름없다.

 

  책은 단점도 적지 않다. 곳곳에 팽배한 경제적 탐욕을 주식회사제도로 환원시키는 듯한 태도, 그래서 이해관계자 소유는 탐욕에서 자유로울 것이라는 다소의 비약, 대규모 생산유통시설을 담아낼 수 있는 사회적 소유방식에 대한 고찰의 결여, 회사 내부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나갈 비전의 부족 등등. 이런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소유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협동조합등을 옹호하는 급진적이라면 급진적인 면모는 요즘 공공연히 권장되는 협동조합사회적기업 담론보다 훨씬 제대로 된 모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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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 민주주의 Democracy 아주 특별한 상식 NN 7
리처드 스위프트 지음, 서복경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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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무엇으로 채워나갈까?

[서평]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강한 시장 약한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지배를 의미한다. 계급사회에서처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리돼있지 않고, 인민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즉, 구성원 모두가 주권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 상태이다. 구성원들 간의 평등은 민주주의 자체는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불평등의 증가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는 경제적 불평등이 일으키는 민주주의의 무기력화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약화되고 있는 민주주의란 우리가 아는 대의선거정당민주주의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외양을 걸친 의회, 선거, 정당이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인민의 자기통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 부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현존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것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맘껏 이용한다. 가진 자들의 거짓 민주주의가 지키는 건 시장에서의 제한 없는 이윤추구이고, 사상 초유의 양극화이다.

 

 

강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저자인 리처드 스위프트는 인민주권의 이상에 다가가는 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갈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경제 민주화 : 현재의 약한 민주주의는 강한 시장 때문이므로, 강한 민주주의의 첫 걸음은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이다. 그런데 경제 민주화의 내용에 대해 저자는 흔한 시장규제, 정부개입, 복지국가 등에 한정시키지 않고, 더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고민을 던진다. 기업사회의 모순은 평등한 시민들이 기업 안에서는 소유와 통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틀어진 소수의 고용주와 이들에게 복종할 의무만을 가진 다수의 고용인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터에서 다수가 겪는 피라미드형 상명하복의 경험은 자신이 민주적 주체라는 의식을 앗아간다. 따라서 일터에서부터 경제적 삶을 스스로 통치해가는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진정한 기초 없이 강한 민주주의는 제대로 세워질 수 없다. 철저한 경제민주주의만이 인민주권을 심화시키고 강건하게 해줄 것이다.

 

대안세계화 : 세계화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건, 국제경쟁의 파괴력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정부능력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한미FTA는 투자자가 공공정책으로부터 이익을 침해받을 경우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통제받지 않는 국제협정, 선출되지 않는 초국적 권력인 IMF와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이 한 나라의 헌법과 민주적 합의보다도 상위에 군림하며 자본의 자유와 소유를 한정 없이 늘려주는 게 세계화의 핵심이다. 이에 저자는 초국적 권력기관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국제 시민사회를 형성해가고, 국민국가 안에서는 인민의 힘을 강화해가는 다차원적인 행동을 제안한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 민주화 이후에도 빈자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삶은 더 고달프다. 이처럼 밥 먹여 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사실 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 가짜에 불과하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때이다. 의회와 선거, 정당을 가로질러 인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열려야 한다. 국민주민투표를 통한 정책의 직접 결정이 활성화되고, 중앙집중적인 의사결정과 국가 기능을 지방과 지역의 더 작은 자치공동체들로 분산 이전시켜 폭넓은 분권화를 이뤄야한다. 현재의 국가관료체제가 직장과 지역에 기초한 자치공동체들의 연합체로 대체된다면, 직업정치인과 관료,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입법행정사법이 전 인민에게 개방되고, 인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스스로를 개선시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

 

생태민주주의 : 직업정치가와 관료에 의해 운영되는 제한된 민주주의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 중 하나는, 불평등의 증가 이외에도, 생태위기이다. 4, 5년마다의 선거에서 승리해야 하고 기업의 요구에 저항력이 없는 정치가의 단기적인 시간지평으로는 장기간의 추진과 인내를 요구하는 생태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 오직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의 더 많은 민주주의 즉, 더 많은 권리와 더 적은 노동시간, 더 민주적인 문화 등으로 향상될 삶의 질만이 물질추구와 소비를 줄이려는 진지한 노력을 대중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생태계와 실질적 민주주의는 하나를 방어하는 것이 다른 하나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관계 속에 있다.

 

 

민주주의, 비어있는 항아리

 

위의 대안들이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약한 민주주의와 강한 민주주의 사이의 대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어떤 제도나 시스템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증 못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비어있는 항아리와 같다. 민주주의를 실제로 정의하는 것은 그 속을 인민이 어떠한 일상의 실천들로 채우느냐에 달려있다. 냉소를 가장한 무관심으로 제 운명을 부자와 권력자에게 맡겨만 놓을 것인가? 아니면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협동조합, 마을, 공동체 같은 민주적 공간들을 스스로 열어 모두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향유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가늠하는 건 지금 여기에 사는 각자 선택들의 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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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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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 노동소외의 극복을 위하여

 

 

굿 워크는 말 그대로 좋은 노동, 그리고 중간기술과 영적 가치에 관한 책이다. 저자인 슈마허는 산업사회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인 석유의 대량소비에 의존하는 현대 산업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그 끝이 멀지 않았다. 또한 산업사회는 노동과 삶의 질을 극적으로 저하시켰다. 이런 병적인 산업사회의 한가운데에는 거대기술이 존재한다. 거대기술은 중앙집중적인 권위와 자원 소비의 토대이며,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전락시키며 노동자에게서 창의와 자유를 앗아간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거대기술이 극복돼야 한다. 그래서 슈마허가 제안하는 게 바로 중간기술이다. 중간기술은 자본집약과 노동집약의 사이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것이다. 중간기술을 통해 많은 자본이 없어도 각 지역의 특성과 필요에 적합한 재화를 지역에서 집적 생산할 수 있다. 거대기술이 대량소비와 환경파괴, 실업, 위계제의 토대라면, 중간기술은 한 곳으로 집중된 생산능력을 해체하여 자연과의 조화, 충분한 일자리, 작업장 민주주의의 토대가 돼줄 것이다. 끊임없이 이윤과 성장만을 쫓는 현대 산업사회와는 전혀 다른 지반 위에서 인류는 다시 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를 일깨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데에 있으므로.

 

저자의 주장, 생각에 전폭 동의할 수 있는 책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당연한 걸 굳이 여기서 내 생각과의 차이점을 밝히거나 저자를 비판하거나 하는 건 필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굿 워크는 슈마허의 대중강연집이라 논리나 구성이 엄밀하지는 않다. 대신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듯 쉽고 친절하게 자신을 생각을 들려준다. 여기에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 건 속 좁아 보인다.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사상가 두 명이 겹쳐 보였다. 슈마허는 노동의 세 가지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슈마허는 책 중간에 노동과 삶의 의미와 가치에 무관심한 유물론을 비판하는데, 번역자가 물질주의를 유물론으로 잘못 번역한 것인지, 슈마허가 물질주의와 같은 의미로 유물론이란 말을 사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철학의 한 조류로서 유물론은 상식적인 의미의 물질주의와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가장 악명 높은 유물론자인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에 쓴 글에서 노동에 관해 피력한 입장과 슈마허가 말한 노동의 목적이 대동소이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유적 본질의 실현으로 보았다. 여기서 유적 본질이란 다른 동물종과 구분되는 인간종에 고유한 특성으로서, 다른 동물들이 본능에 의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데 반해, 인간은 구상하고 상상하며 이를 자연을 통해 실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생존의 수단이면서 자기실현의 수단이기도 한데, 마르크스는 더 나아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에서의 사회적 관계 즉, 생산관계를 사회와 역사의 진정의 토대로 보았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생산한다고 말하였다. 마르크스의 노동관과 슈마허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소외와 이의 극복에 대해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의 변혁과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기술에 대한 슈마허의 강조가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성취한 중앙집중화된 생산력을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인수만 한다면 노동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한 혁명가들도 없었을 것이다. 생산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노동자통제가 최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은 폭넓은 분권화를 요구하며, 높은 수준의 분권화는 슈마허가 말하는 중간기술 같은 새로운 물질적 토대를 전제한다고 보인다.

 

마르크스 말고 또 생각난 사상가는 에리히 프롬이다. 슈마허가 책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강조하는 영적 가치에 대한 주장이 프롬의 사상과 닮아보여서였다. 옮긴이 글을 보니 슈마허가 말년에 이르러 가톨릭 사상가들을 받아들여 무신론에서 돌아섰다던데, 에리히 프롬도 에크하르트 같은 가톨릭 사상가들을 자주 인용했다. 그래서 슈마허가 말하는 복음서나 영적 가치가 신비주의적이거나 노인의 약해진 소리 같은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프롬은 사회분석과 정신분석을 결합시켰던 초, 중기를 지나 후기에 이르면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자질 향상에 천착하는데, 여기서 종교의 근본을 새롭게 해석한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 석가모니 등의 가르침들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불안에 대한 진보적 해법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가르침이 가리키는 것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참된 고양과 자유이며,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신론과 인간해방을 목표하는 유물론은 서로 조우할 수 있다고 프롬은 말했다. 슈마허도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의 추구를 말한 것이라 읽었다. 반면에 오늘날 세속적인 종교의 대개 모습은 물질주의의 다른 판본과 다를 바 없다.

 

몇 시간 정도면 쉬이 읽을 분량의 책인데 읽는 내내 노동의 소외와 이의 극복, 그 방법, 참된 가치 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슈마허는 생각에 이어 행동하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확신과 결심,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문제를 이해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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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와 민중권력

 

 

한 혁명가의 죽음

 

지난 35, 우고 차베스가 암투병 끝에 서거했다. 그를 설명하는 최선의 말은 아마 차베스 본인이 한 말일 것이다.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빈민에게 권력을 주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고, 모든 가난한 자들 즉, 베네수엘라 민중은 여기에 21세기 유일한 혁명으로 응답해왔다. “민중권력을 창조하라!” 이 선언이 바로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의 정신이다.

 

정치무대에서 차베스가 처음 등장한 해는 `92년이다. 육군 중령이었던 차베스는 부패정권을 쓰러트리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때, 당장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미래의 승리를 기약하는 당당한 모습을 통해서 당시 암담한 현실을 버텨내던 민중 사이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98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고, 이후 14년간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볼리바리안 혁명을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끌어왔다. 이제 차베스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겠다. 대신 그가 마지막까지 헌신했던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볼리바리안 혁명 속에서 차베스의 고결한 이상과 강한 의지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개혁

 

지구 반대편 남미대륙에 위치한 이 나라의 현재 국호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공화국이다. 차베스가 집권 후 곧바로 추진한 헌법 개정이 `99년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국호가 바뀌었다. 새로운 헌법은 볼리바리안 헌법으로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 볼리바리안의 의미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뜻한다. 볼리바르는 1810,20년대에 스페인에 맞서 식민지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차베스가 볼리바르를 호명하며 불러내고자 했던 건 지배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정신이었다. 과거의 지배자가 스페인이었다면, 오늘날 남미대륙을 도탄으로 빠뜨리고 있는 건 미국이 전 세계에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이다.

 

베네수엘라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건 경제파탄과 `89년의 IMF협상을 통해서였다. 당시의 페레스 정권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재정긴축과 사회보장 축소, 민영화, 시장 자유화 등을 합의해주었다. 이를 발표한 지 11일 만에 수도 카라카스에서 대중교통비가 두 배가 오른 것에 분노한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수천 명이 희생당했다. 이후 차베스가 집권하기까지 십여 년 동안 빈곤율이 64.2%까지 증가하고, 석유회사를 비롯한 기간산업이 민영화돼 물가가 치솟았다. 반면에 소수가 독차지한 부는 이를 틈타 더욱 커졌다.

 

신자유주의는 가뜩이나 불평등한 사회를 더 비참한 곳으로 전락시켰고, 구조적 모순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것이 볼리바리안 혁명의 배경이다. 새 헌법을 제정한 이후 `01년에 차베스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경제와 사회의 복구를 목표로 49개 개혁법안을 통과시킨다. 이중 탄화수소법은 석유산업의 민영화를 중단시키고 국영화와 석유이익의 국민경제 환원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토지법은 개인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정부가 사유의 미경작지와 휴경지, 도시 유휴지를 징발해 농민과 도시빈민에게 분배하려는 조치다. 또 협동조합법은 민중의 자조 노력에 협동조합이라는 공식지위를 부여해 정부의 지원을 보장해준다.

 

그런데 기존의 기득권세력은 개혁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고 군대와 경찰, 관료, 자본가, 언론, 어용노조가 총집결해 `02년에 군사쿠데타와 경제파업을 연달아 일으키며 차베스 정권을 전복시키려했다. 위기의 순간에 차베스를 구한 건 정치권력도 군대도 아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이 새 헌법과 개혁을 수호했다. 그리고 이 순간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다.

 

민중권력으로의 급진화

 

볼리바리안 혁명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기득권층의 반발에 부딪쳐 위기에 처하자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급진전됐다는 점이다. 민중은 반혁명세력으로부터 차베스와 헌법, 개혁을 수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미래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조직했고, 나아가 엘리트들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다. 차베스는 현명하게도 반혁명세력과 타협하지도, 민중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한하지도 않았고, 민중의 요구에 발맞추어 함께 전진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역할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하게 분출하는 요구들을 지원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는 반혁명 시도에 언제든지 동참할 수 있는 국가관료와 변화할 뜻이 없는 관료기구에게 혁명을 맡길 수 없다는, 시행착오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료주의를 민중의 자치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분명해졌다.

 

민중권력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02년 겨울에 자본가들이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물자를 파괴하며 경제파업을 벌이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생산을 재개시켰다. 차베스는 이런 공장들을 국가가 인수하도록 해 노동자 투쟁을 지원해주었고, 국유기업에는 자주관리와 공동경영을 도입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기업과 경제의 사회화는 계속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무력한 피고용인에서 일터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편, 비교적 소규모 단위에서 일반적인 협동조합은 백만 명이 넘는 농민과 노동자를 포함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성장은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의 성숙과 민중이 스스로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역량의 진전을 반영한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06년부터 조직된 공동체평의회이다. 공동체평의회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수백가구로 이루어지며, 해당 지역주민의 요구를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재정을 배분받아 집행까지 한다. 한마디로 동네 자치이고, 국가의 의사결정과 기능이 수 만개의 공동체평의회로 이전돼 국민 모두가 의원과 공무원이 되는, 차원이 다른 참여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물론 아직까지 공동체평의회가 기존의 국가를 대체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베네수엘라 민중이 전인미답의 한 발을 내딛은 건 틀림없다.

 

이중권력의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에서는 특이하게도 지배계급의 재산, 관료기구 같은 구체제가 온존하면서도 민중권력이 등장해 활력을 키워왔다. 그동안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불평등도 완화돼왔다.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으로 민중의 삶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여기에는 차베스의 지렛대로서의 역할이 무척이나 컸다. 이런 맥락에서 차베스는 민중에게 새로운 사회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차베스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로운 사회로 가는 문이 잠겼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문 밖으로 걸어 나와 더 전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제2, 3의 문들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국가에 모순적인 두 힘이 나란히 존재하는 이중권력의 상황이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계속될 수는 없다. 그동안 민중권력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씨앗과 함께 낡은 사회와의 갈등과 투쟁의 여지도 더불어 커온 셈이고, 구체제는 파괴될지언정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과 베네수엘라 민중의 승리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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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란 무엇인가
바츨라프 스밀 지음, 윤순진 옮김 / 삼천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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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용하는 건 거대한 에너지 흐름의 극히 일부라는 게 가장 기억에 남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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