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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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 노동소외의 극복을 위하여

 

 

굿 워크는 말 그대로 좋은 노동, 그리고 중간기술과 영적 가치에 관한 책이다. 저자인 슈마허는 산업사회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인 석유의 대량소비에 의존하는 현대 산업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그 끝이 멀지 않았다. 또한 산업사회는 노동과 삶의 질을 극적으로 저하시켰다. 이런 병적인 산업사회의 한가운데에는 거대기술이 존재한다. 거대기술은 중앙집중적인 권위와 자원 소비의 토대이며,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전락시키며 노동자에게서 창의와 자유를 앗아간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거대기술이 극복돼야 한다. 그래서 슈마허가 제안하는 게 바로 중간기술이다. 중간기술은 자본집약과 노동집약의 사이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것이다. 중간기술을 통해 많은 자본이 없어도 각 지역의 특성과 필요에 적합한 재화를 지역에서 집적 생산할 수 있다. 거대기술이 대량소비와 환경파괴, 실업, 위계제의 토대라면, 중간기술은 한 곳으로 집중된 생산능력을 해체하여 자연과의 조화, 충분한 일자리, 작업장 민주주의의 토대가 돼줄 것이다. 끊임없이 이윤과 성장만을 쫓는 현대 산업사회와는 전혀 다른 지반 위에서 인류는 다시 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를 일깨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데에 있으므로.

 

저자의 주장, 생각에 전폭 동의할 수 있는 책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당연한 걸 굳이 여기서 내 생각과의 차이점을 밝히거나 저자를 비판하거나 하는 건 필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굿 워크는 슈마허의 대중강연집이라 논리나 구성이 엄밀하지는 않다. 대신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듯 쉽고 친절하게 자신을 생각을 들려준다. 여기에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 건 속 좁아 보인다.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사상가 두 명이 겹쳐 보였다. 슈마허는 노동의 세 가지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슈마허는 책 중간에 노동과 삶의 의미와 가치에 무관심한 유물론을 비판하는데, 번역자가 물질주의를 유물론으로 잘못 번역한 것인지, 슈마허가 물질주의와 같은 의미로 유물론이란 말을 사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철학의 한 조류로서 유물론은 상식적인 의미의 물질주의와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가장 악명 높은 유물론자인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에 쓴 글에서 노동에 관해 피력한 입장과 슈마허가 말한 노동의 목적이 대동소이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유적 본질의 실현으로 보았다. 여기서 유적 본질이란 다른 동물종과 구분되는 인간종에 고유한 특성으로서, 다른 동물들이 본능에 의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데 반해, 인간은 구상하고 상상하며 이를 자연을 통해 실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생존의 수단이면서 자기실현의 수단이기도 한데, 마르크스는 더 나아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에서의 사회적 관계 즉, 생산관계를 사회와 역사의 진정의 토대로 보았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생산한다고 말하였다. 마르크스의 노동관과 슈마허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소외와 이의 극복에 대해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의 변혁과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기술에 대한 슈마허의 강조가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성취한 중앙집중화된 생산력을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인수만 한다면 노동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한 혁명가들도 없었을 것이다. 생산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노동자통제가 최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은 폭넓은 분권화를 요구하며, 높은 수준의 분권화는 슈마허가 말하는 중간기술 같은 새로운 물질적 토대를 전제한다고 보인다.

 

마르크스 말고 또 생각난 사상가는 에리히 프롬이다. 슈마허가 책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강조하는 영적 가치에 대한 주장이 프롬의 사상과 닮아보여서였다. 옮긴이 글을 보니 슈마허가 말년에 이르러 가톨릭 사상가들을 받아들여 무신론에서 돌아섰다던데, 에리히 프롬도 에크하르트 같은 가톨릭 사상가들을 자주 인용했다. 그래서 슈마허가 말하는 복음서나 영적 가치가 신비주의적이거나 노인의 약해진 소리 같은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프롬은 사회분석과 정신분석을 결합시켰던 초, 중기를 지나 후기에 이르면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자질 향상에 천착하는데, 여기서 종교의 근본을 새롭게 해석한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 석가모니 등의 가르침들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불안에 대한 진보적 해법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가르침이 가리키는 것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참된 고양과 자유이며,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신론과 인간해방을 목표하는 유물론은 서로 조우할 수 있다고 프롬은 말했다. 슈마허도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의 추구를 말한 것이라 읽었다. 반면에 오늘날 세속적인 종교의 대개 모습은 물질주의의 다른 판본과 다를 바 없다.

 

몇 시간 정도면 쉬이 읽을 분량의 책인데 읽는 내내 노동의 소외와 이의 극복, 그 방법, 참된 가치 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슈마허는 생각에 이어 행동하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확신과 결심,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문제를 이해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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