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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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519일에 TV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보았는데, 광주 민주화운동 특집이었고 다음과 같은 글귀로 마쳤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소설가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의 한 구절이었다. 그해 5.18에 시작한 민주화운동 또는 민중항쟁은 527일 새벽에 계엄군이 광주도청을 진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항쟁의 마지막에서 도청을 떠나지 않고 남은 시민군의 선택은 역사적 의의를 획득했다. 어떤 압도적인 무력과 폭력으로도 잠재우고 타협할 수 없는 무언가의 실존을 시민군은 저항과 죽음으로 증명하였다. 이후 우리의 역사는 광주에서의 숭고한 저항과 비통한 죽음에 공명하여 마침내 군사정권을 이겨 내는 전진을 이뤄냈다.

  예전에 19세기 유럽에서의 절대왕정과 싸운 시민혁명의 역사를 배우면서, 혁명의 상징이었던 바리게이트에 쓰여 있었다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싸우다 죽겠다는 낙서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프랑스 혁명의 삼색기가 상징했던 자유, 평등, 우애를 향한 열망과 투쟁이 죽음을 넘어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광주에서의 희생은 시대의 전환과 진보에 바쳐진 여러 역사적 장면과 동일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사진 안의 피해자들의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 죽기보다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패배, 죽음의 가능성, 살아도 이어질 투옥과 고난이 시시각각 조여 오는데도 왜 끝의 끝까지 스스로 자리를 지켰을까? 저 멀리의 사건에 대해서는 역사와 이념에 관한 추상적인 설명도 설득력을 갖지만, 지금 여기의 일에 대해서는 쉬운 답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꼬꼬무마지막 글귀에 이어지는 소년이 온다의 구절이다.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일부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를 읽어가는 건 고통스럽다.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자원하며 만난 중학생 동호, 고등학생 은숙, 미싱사 선주, 대학생 진수가 등장한다. 동호는 한 집에 살던 친구인 정대와 거리에 나왔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친구를 잃는다. 계엄군이 쓰러진 정대를 끌고 갔고, 동호는 정대를 찾기 위해 상무관에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마지막 날에 동호 역시 비극을 맞는다. 그리고 동호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헤아릴 길 없는 심정이 그려진다.

 

또 다른 광주

 

  소설가 한강은 에필로그에서 광주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09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20091월에 난 용산의 망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미FTA 반대로 광화문이 들끓었던 다음 해였다. 그렇지만 철거민의 죽음에 대해 시민들의 반응은 같지 않았다.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농성 현장에서 밤새 뒤척이며 노숙하다가 아침 출근길 사람들의 바쁜 걸음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각이 들었다. 이곳의 시간은 멈추어 있는데, 불과 몇 발자국 밖의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가는 현실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불쑥 생겨버린 경계의 안과 밖에서 서로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우리는 여전히 우리일까? 세상의 대부분은 여전히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던 그 거리감이 한강의 글을 통해 다시 떠올랐다.

  온 통신과 길을 막아 계엄군이 만든 공간적 고립보다 광주 시민의 희생이 무엇 하나 바꿔내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이 두려움에 공동체라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래서 광주는 공동체의 위기, 어딘가의 일상이 고립되어 산산조각 나는 것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월 광주가 겪었던 고립과 말살은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치유라는 시각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힘은 공감과 연대, 공동체의 복구에서 나올 수 있다. 또 다른 광주를 만들지 않기 위해 부당한 억압 앞에서는 서로에게 팔을 걸어야 하며, 어떤 왜곡과 비방에도 맞잡은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폭력은 없다. 힘없는 자에 대한 신뢰와 연대의 굳건함이 사회의 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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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이 바꾼 세계사 - 대량해고, 불황, 빈곤은 세상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도현신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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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역사책은 피지배계급이 겪는 빈곤실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동서양의 역사에서 국가와 영토가 바뀌고 전쟁과 혁명이 발발하는 결정적인 14가지 장면을 포착한다.


현대 문명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제2차 세계대전은 1929년 미국발 대공황에서 비롯했다.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 지 4년 후인 1933년 미국의 실업률은 공식 집계로만 25%에 달했다. 일본과 독일에서의 실업난은 더욱 심각했고, 불행히도 내부에 팽배한 불만을 타국에 대한 침략으로 돌려 세우려는 세력이 득세하고 말았다. 선거로 집권한 나치는 민주 공화국을 무너뜨리며 민주주의를 조롱하더니, 추축국과 더불어 평화를 깨트리며 수많은 생명을 욕보였다. 최악의 실업난이 불러온 이러한 끔찍한 전개에 질린 나머지 종전 이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 개입이 당연시되었고,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기기 위한 국가의 책임도 자리 잡게 되었다.


오직 더 많은 부를 좇는 데만 몰두하는 탐욕의 과잉이 빚어낸 1929년 대공황은 자본주의의 부작용과 병폐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탐욕이 만들어내는 실업이라는 (한편에서는 부가,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이 쌓이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태어나고 성장한 비결이기도 한데, 15세기 이후 영국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이다. 부모에 이어 자손이 대대로 귀족에게 땅을 빌려, 한 귀퉁이마다 한 집이 먹고 사는 오랜 관습이 깨진 건 양털을 깎아 수출하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였다. 소작농을 전부 내쫓고 울타리를 쳐 양을 키우면 매일 돈이 자라나는데, 어느 귀족이 관습을 존중하고 농부들의 사정을 돌보겠는가.


이렇게 15세기 중엽부터 극심해진 인클로저 운동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영국에 쏟아졌는데, 이 실업자들이 이민자 또는 군인이 되어 영국의 해외 식민지를 넓히고 이권을 지키는 총알받이가 되었다. 한 역사가는 1660년대에서 1950년까지 무려 2000만 명의 영국인들이 북미와 호주, 뉴질랜드 등의 해외로 이주를 했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보면 근현대 세계지도를 그려낸 게 이들 쫓겨난 영국인들인 것이다. 한편 도시로 흘러간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악마의 소굴로 부르는 공장으로 들어가 세계 최초의 노동자계급이 되어 노동법과 노동조합, 노동당을 탄생시켰다.

 

직업을 잃고 난을 일으킨 사람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이민자와 군인이 되어 한 민족의 활동 무대를 쫙 넓힌 (다른 민족은 지배에 놓이는) 경우는 고대에도 있었다. 그리스는 산이 많아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농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일찍이 지중해 서쪽으로 퍼져 나가 시칠리아, 마르세유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에서 용병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인 13000여 명이 용병으로서 페르시아 왕위 쟁탈전에 참전했다가, 바그다드 인근에서 고용주를 잃고 다시 그리스로 탈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용병들의 지도자였던 크세노폰이 책으로 엮은 게 아나바시스이다. 이 책이 그리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페르시아가 실제로는 허약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한다. 그리고 아나바시스로부터 65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로 향하고,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한다.


실업자가 된 민중이 역사를 뒤흔드는 장면은 중국과 한국에서도 여럿 나온다. 양나라를 무너트려 수당 시대로 이어지는 후경의 난, 당나라를 쓰러트려 510국 시대로 이어지는 황소의 난, 고려를 약화시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삼별초의 난, 명나라를 멸망시켜 청나라로 이어지는 이자성의 난, 다시 청나라의 조종을 울린 의화단의 난. 왕조 교체 시마다 직업을 잃은 사람들에 의한 난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난세가 모두 끝나고 태평성대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멕시코에서는 NAFTA로 인한 실업자들이 마약사업에 뛰어들고 있고, 한국에서는 IMF위기 대량실업이 남긴 비정규직과 무한경쟁으로 삶이 팍팍하다 못해 고통스럽고, 소말리아 앞 바다의 어부들은 해적이 되었다.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일곱 개의 문을 가진 테베는 누가 지었을까?

책들에는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왕들이 돌덩이를 날랐을까?”

 

독일의 극작가,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던진 질문에 대해 20세기 역사가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답했다. 역사를 기록해온 이들은 오랫동안 왕과 장군 같은 권력자들의 의도와 결정이 역사를 만드는 것처럼 써왔다. 이와 달리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자들에 주목한다. 이름 없는 자들의 소리 없는 (기록되지 않은) 외침이 실제로 역사를 움직여온 힘이라는 아이러니의 발견은 역사학의 위대한 성과 중 하나이다.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지배받는 이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건 설계도만으로는 도시를 지을 수 없다는, 손과 발의 노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지배자는 구상하고, 피지배자는 실현하는 분업이 유지되는 한 역사는 멈추어 있다. 역사가 나아갈 때는 구상과 실현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피지배자 스스로 제 살 길을 찾아나서는 순간이다. 그럭저럭 생활을 보장해온 삶의 방식이 무너지는 순간 민중은 전혀 다른 삶을 모색하고, 이로부터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고 새 시대를 여는 에너지가 쌓인다. 우리는 빈곤과 실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빈곤과 실업이 사라지는 날까지 역사는 틀림없이 전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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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 2034년,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리트 계급의 세습 이야기 이매진 컨텍스트 72
마이클 영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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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를 정의롭게” -MZ노조

 

지난 107일 서울교통공사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서울교통공사의 MZ세대 노조가 신청한 비정규직 직고용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지하철 광고 게재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건보공단의 공정가치연대와 서울교통공사의 (All)바른 노조가 비정규직 직고용 반대 광고에 함께 한 건, 언론에 보도된 관련자의 말에 따르면, “젊은 직원들은 오랜 노력 끝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고, “채용은 공정의 산물이지,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때문이다.


시험 순위로 정규직을 뽑는 건 공정하고, 비정규직이 투쟁으로 정규직이 되는 건 불공정하다는 생각을 대변하는 단어가 바로 능력주의이다. 오직 능력으로만 선발하고, 능력에 따라 지위와 소득에 차등을 두는 게 효율적일 뿐더러 공정하기까지 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게 요즘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비판하는 책들이 계속 출판되고 있다. 한국의 능력주의(박권일),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덜), 능력주의는 허구다(스티븐 J. 맥나미 외 1) 등인데, 이중에 한 권만 읽으라면 마이클 영이 쓴 능력주의를 꼽고 싶다.


능력주의로 번역하는 ‘Meritocracy’는 마이클 영이 1957년에 발간한 능력주의에서 처음 만들어 낸 단어로 알려져 있다. 능력주의는 사실과 허구의 역사가 섞여 있는 미래 소설로서, 2034년 시점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형성과 전개를 돌아보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능력은 타고난 지능(IQ)과 노력의 합으로 정의된다. 능력에 따른 선발 원리는 신분제를 타파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능검사와 업무능력평가가 점차 정교해지면서 어느 때부터 IQ125 이상인 사람들만이 새로운 상층 계급을 구성하고, 이들끼리만 결혼하면서 지능이 높은 자식을 길러낸다. 능력의 원리가 다시 세습의 원리를 불러내고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분류되기 때문에 계급들 사이의 간극은 어쩔 수 없이 더욱 넓어진다. 상층 계급은 자기가 지닌 역량과 자기가 기울인 노력, 부정할 수 없는 자기의 업적 덕분에 성공한 만큼 자기회의나 자기비판에 시달리지 않는다. 반면 하층 계급은 몇 번이고 치른 시험에서 족족 떨어진 만큼 당연한 결과로 열등생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제 예전처럼 기회를 박탈당한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열등한 지위를 갖게 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이제 열등한 사람은 자존감을 지탱할 버팀목을 모조리 잃어버린다.”(306~7)

 

일단 차지하라. 그 자리가 너의 능력이 될 것이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일견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이 얼마나 정의롭지 않은 결과로 귀착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가장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구매자에게 자원을 배분하는 게 시장원리이다. 따라서 한정된 일자리도 가장 많은 시간을 희생하여 노력을 기울인 구직자에게 열어 주는 게 합리적이며, 노력의 양과 재능의 우열을 평가하는 게 시험의 기능인 것 같다. 시험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기부금을 많이 낸 순? 기존 직원의 자녀 우선? 힘 좀 쓰는 사람들의 청탁 순? 선착순?


시장 이외의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듯이, 능력주의 이외의 대안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내 능력으로 쟁취한 일자리에 가지는 자부심은 이 정도 노력도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시도에 대한 불편과 혐오를 정당화한다. 노력이 부족한 걸 탓해야지 능력의 원리에는 흠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고소득이 시험으로 뽑힌 사람들만의 능력 덕뿐일까? 공공부문의 안정적 소득은 상당 부분 사회적 합의와 재정정책에 의존하는데, 공공성보다 효율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바뀌면 고액 연봉자들부터 구조조정 1순위가 될 것이다. 한편 침체된 산업이나 원청에 쪽쪽 빨리는 하청에 속해서는 월등한 재능과 노력으로도 패배자가 되기 싶다. 잘 나가는 기업도 사실은 저개발국가의 저임금 노동력 착취와 자원 약탈, 환경 파괴에 의존하고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생산성과 소득이 꼭 비례하지 않으며, 개인의 기여도도 경제가 복잡해질수록 측정하기 어렵다.


이처럼 개인의 소득과 능력 사이의 관계가 약하다면 능력주의가 내세우는 능력이란 무엇일까? 위계화된 불평등 구조 속의 높은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까지만 유효할 뿐인 능력이다. 일단 자리를 차지하면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도 그 자리가 아래층보다 나은 부와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와 힘은 세대를 넘어 학벌과 재산으로 전달된다. 진짜 뒤집고 부정해야할 건 높고 낮은 자리들의 존재이다. 이처럼 잘못된 위계에 맞서 우리는 인간다움의 만개를 가슴에 품어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난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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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 -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위한 경제학
전용복 지음 / 진인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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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지원금, 재정건전성, 포퓰리즘


전 국민에 줄 듯 안 주는 재난지원금 논의, 나아가 기본소득 논쟁에서 보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재정건전성이다. 정부는 버는 만큼만 지출해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정부가 빚까지 내는 건 불어 닥칠 부작용이 훨씬 크다. 이런 상식을 거스르고 돈을 퍼주며 표를 모으려는 게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정부는 세입이 부족하면 빚을 내고, 더 이상 빌릴 데가 없으면 돈을 찍어낸다. 정부가 찍어낸 돈은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며 경제를 막장으로 내몬다. 지폐로 공예품을 만들 지경에 이른 베네수엘라를 보라! 건전한 시민은 마땅히 재정적자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정책과 이를 선동하는 정치인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를 거부해야 한다는 이론이 미국에서 불어오고 있다. 요즘은 미제가 명품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이것만큼은 주목해야 한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흥행하고, 40%의 미국인이 사회주의에 긍정적이라고 답하는 분위기 형성에도 기여한(?) 이것의 이름은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이다.

 


현대화폐이론과 현대금융시스템


현대화폐이론(이하 “MMT”)은 재정건전성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념들에 대한 팩트폭력이다. 재정적자를 비판하는 주류경제학은 MMT가 보기에 현실과는 딴 판인 허상을 전제하고 있다. MMT는 현대금융시스템을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주류경제학을 논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 정부의 재정적자가 최악의 정책이라는 믿음은 중앙은행만이 화폐를 발행하고, 증가한 화폐는 시중에 직접 유통되며, 이러한 통화량 증가는 화폐가치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전개를 깔고 있다. 그런데 이는 두 가지 지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화폐는 민간은행도 창조할 수 있으며, 중앙은행의 통화는 실제로는 한정된 영역에만 머문다.

MMT에 따르면 현대금융시스템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은 민간은행(1금융권)과 가계, 기업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거래는 최종적으로 민간은행에 개설된 가계와 기업들의 계좌 간의 이체로 결제된다. 손에서 손으로의 현금거래에서나 쓰이는 지폐와 동전은 지불수단의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불수단으로서의 은행예금은 저축뿐만 아니라 은행의 대출에 의해서도 창조되며, 그것도 매우 손쉽게 늘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은행은 대출금을 자기 은행의 계좌로 입금해주기 때문이다. 은행 장부 차변의 대출자산 숫자와 대변의 고객 계좌 잔고(즉 부채) 숫자만 함께 늘려주면 된다. 이러한 회계 처리가 벽에 부딪치는 건 고객이 현금을 인출할 때나 다른 은행으로 이체할 때뿐이다.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에서 지폐를 받아 오거나, 타은행으로 송금해줄 때는 상대에게 대가를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대가가 바로 중앙은행의 통화, 지급준비금이다.


현대금융시스템의 두 번째 차원은 중앙은행과 민간은행, 중앙정부로 이루어져 있다(이하에서 정부는 중앙정부만을 의미한다). 민간은행과 정부는 중앙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는데, 이 계좌의 잔고가 바로 지급준비금이다. 지급준비금의 역할은 은행 간의, 은행과 정부 간의 지불수단이라는 점이다. 은행이 중앙은행에서 지폐를 받아오는데, 고객의 타은행 이체 요구에 대응할 때, 은행으로 납부된 세금을 정부로 건네줄 때, 정부나 중앙은행이 발행한 채권을 사고 팔 때도 지급준비금을 사용한다. 그리고 어떤 은행이 지급준비금이 부족하여 중앙은행이나 다른 은행으로부터 차입할 때 형성되는 금리가 바로 언론에서 자주 나오는 그 기준금리이다. 민간은행의 지급준비금 차입 수요가 많아지면 기준금리 준수를 위해 중앙은행은 지급준비금을 공급한다(=공개시장운영. 언론은 이를 유동성 공급으로 표현한다). 민간은행과 중앙은행의 차이점은 중앙은행의 화폐공급에는 어떤 경제적인 장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민간은행에는 고객의 인출 요구 등에 대응할 수 있는 지급준비금 보유와 조달이라는 장애가 존재한다).


생소한 내용이지만 이건 꼭 기억하자. 민간경제에서 대부분의 지불수단은 은행예금이다. 예금은 은행의 대출에 의해서도 창조된다. 중앙은행과 민간은행, 정부끼리는 그들만의 통화인 지급준비금을 사용한다. 금융시스템 속에서 은행예금과 지급준비금의 창조는 규제만 없다면 무제한적이다. 관련 실무자라면 당연시 여기는 이런 사실을 주류 경제학자들은 외면한다고 MMT는 꼬집는다.

 


공공재로서의 화폐, 정부의 역할


현대금융시스템의 두 가지 차원과 각 차원의 상이한 지불수단에 대한 MMT의 설명은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를 바로 연결 짓는 믿음이 잘못임을 보여준다. 만약 정부가 재난지원금을 신용카드 등의 결제대금 방식으로 지급한다면, 정부가 보유한 지급준비금이 중앙은행에 개설된 민간은행의 계좌로 이체될 것이고, 민간은행은 이체 받은 지급준비금만큼 카드회사 계좌의 예금을 늘여줄 것이다. 정부지출은 이렇게 통화량(은행예금)을 증가시킨다. 반대로 납세자들이 은행예금으로 세금을 납부하면 예금은 사라지고 정부의 지급준비금이 늘어나므로 민간부문의 통화량은 줄어든다. 따라서 통화량이 실제로 증가하려면 세출이 세입을 초과해야 한다.

그런데 재정적자만이 아니라 은행이 대출을 상환액 이상으로 늘려도 통화량은 늘어난다. 실제로는 민간은행의 무분별한 신용공급(은행에게는 대출자산, 반대편에게는 부채)이 인플레이션과 버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많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재정적자에도 국가부도 운운 등 온갖 반대에 직면해야 하는 정부보다 대출을 늘릴수록 돈을 버는 은행이 통화량 증가에 항구적 이해를 갖는다. 한국에서 부동산이 급등하는 동안 함께 나란히 급증한 건 가계부채였다. 손쉬운 대출과 레버리지 투자가 자산버블의 주 원인인데도 언론은 엉뚱한 곳에 책임을 전가한다.


만약 정부가 실제로 돈을 펑펑 쓴다면 어떨까? 정부는 부족한 세입 대신 국채를 민간은행에 팔아 적자를 메울 것이다. 민간은행은 지급준비금으로 국채를 매입한다. 대량의 국채 발행이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빨아들이며 국채금리를 인상시키면 중앙은행이 나서서 민간은행이 보유한 국채를 사들이며 지급준비금을 공급한다(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직접 국채를 사는 건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제 민간은행 대신 중앙은행이 국채를 보유한다. 그런데 정부가 중앙은행에 지급하는 국채이자는 다시 정부로 돌아온다. 중앙은행은 정부기관이기 때문이다. 정부부채가 아무리 커져도 채권자가 자국의 중앙은행이라면 부도날 일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부채는 장부상의 숫자와 역사적 기록(적자액의 누적)에 불과하다. 90년대 이후 일본과 2008년 이후 미국에서 벌어진 양적 완화의 실제 의미이다. 정부부채 증가와 국가부도를 동일시하는 건 국채와 외채를 구분하지 않는 무지 탓이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아무리 많이 들고 있더라도 그 나라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


MMT는 화폐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현대 화폐는 민간에서는 금융상품(채권-채무관계) 또는 세입·세출의 매개로서 형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그리고 화폐의 탄생과 죽음을 조절하기 위해 중앙은행은 자신의 발권력을 행사한다. 화폐는 재화와 용역을 거래하고 분배하기 위한 사회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공공재의 일종이다. 총생산물이 증가하는 만큼 원활한 거래와 분배를 위해서는 화폐량도 늘어야 한다. 그런데 화폐공급을 이윤 동기의 민간은행 대출에 맡기는 방식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 정부가 재정적자로 직접 지출하는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고 정의롭다.


이제까지의 논의와 결론을 더 유익한 내용들과 함께 쉽고 상세하게 접하고 싶은 분들에게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저자 전용복)를 추천한다. MMT가 뭔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유명한 학자들도 헛소리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존재한다. MMT를 부당한 대우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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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1.

대학교에 다닐 무렵 한 번 읽고 책무리들 속에 십 몇 년 간 방치해왔던 책이다. 보지 않는 책들은 정리해 볼 요량으로 뒤적이다 눈에 먼저 들어왔다. “가라타니 고진.” 흐릿해진 기억 속의 이름이다. 2005년 정도? 당시 유행에 편승해 윤리21을 먼저 보고, 트랜스크리틱을 이어 읽었는데 마르크스에 대한 독특한 독해에 공감할 수 없어 더 이상 읽지 않았던 저자였다.

중고책으로 내놓기 이전에 책도 얇겠다, 다시 한 번 읽었다. , 네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열심히 읽은 건 아니지만 인상적인 부분들이 있어 기록을 남긴다.

 

2.

고베 시에서 중학생이 연쇄살인 사건을 저질렀고, 일본의 여론은 사회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무척이나 강하게 청구했다고 한다. 이는 자식이 살인자여도 부모만큼은 변호해주고 이에 대해 공감해주는 미국과 같은 사회에 비교할 시 일본 특유의 사회현상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런데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정당한가? 책임을 묻는다는 건 사건의 원인이 곧 책임의 주체라는 인식과 같이 하는데, 이 말 대로라면 막상 살인을 저지른 자식에게는 잘못이 없는 셈이 된다. 살인사건은 불운한 가정환경 같은 원인의 결과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의 도덕 체계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범죄의 책임을 그 행위자에게 묻는 것은 범죄자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자유의 존재라는 걸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자유가 존재하는 것일까? 사건의 발생을 계통적으로 추적하면 숱한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있을 것이며, 결국 존재하는 건 총체, 즉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인 요소들과 요소들 사이의 엉키고 엉킨 실타래 같은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결정론적 세계관 속에 자유와 책임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위대한 결정론자들, 즉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프로이트는 한편으로는 자유와 해방의 사상가들이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를 빌어 결정론과 구조, 원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괄호 속에 넣어 놓는 관점의 이동을 통해 자유를 위한 공간을 정립한다.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지만, 총체 속의 개체에 불과하지만 타자를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듦으로써 자기 자신이 원인으로서 행동한다는 의미의 자유를 쫓을 수 있다.

자유에 대해 위의 의미로 정의할 수 있다면 책임의 의미도 변한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부자유에 스스로를 놓아두는 것에 책임을 지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유는 자기가 자기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타자를 목적으로서 대하라는 명령을 받드는 것이다. 자유는 능동적인 상태이며 삶이 가진 생명과 활력의 표현이다. 반면에 부자유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 속에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우리가 책임을 지어야 하는 건 자유의 왕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필연의 감옥에 갇혀있는 우리의 관성과 무능력이다.

 

3.

요즘 독서의 효능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무엇도 바꾸지 못하는 쓸모없는 독서를 난 왜 하고 있지? 윤리21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독서와 사유가 알기 쉽게 펼쳐져 있다. 상당히 추상적인 논의이지만, 구체적인 이슈들을 저울질하는 데 잘 끌어다 쓰고 있다. 요령 있는 글이 아름답게도 보인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성공한 덕후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다. 부러운 마음도 든다. 이 부러움이 사라지기까지 중고책으로 내놓는 건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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