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이 바꾼 세계사 - 대량해고, 불황, 빈곤은 세상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도현신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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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역사책은 피지배계급이 겪는 빈곤실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동서양의 역사에서 국가와 영토가 바뀌고 전쟁과 혁명이 발발하는 결정적인 14가지 장면을 포착한다.


현대 문명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제2차 세계대전은 1929년 미국발 대공황에서 비롯했다.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 지 4년 후인 1933년 미국의 실업률은 공식 집계로만 25%에 달했다. 일본과 독일에서의 실업난은 더욱 심각했고, 불행히도 내부에 팽배한 불만을 타국에 대한 침략으로 돌려 세우려는 세력이 득세하고 말았다. 선거로 집권한 나치는 민주 공화국을 무너뜨리며 민주주의를 조롱하더니, 추축국과 더불어 평화를 깨트리며 수많은 생명을 욕보였다. 최악의 실업난이 불러온 이러한 끔찍한 전개에 질린 나머지 종전 이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 개입이 당연시되었고,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기기 위한 국가의 책임도 자리 잡게 되었다.


오직 더 많은 부를 좇는 데만 몰두하는 탐욕의 과잉이 빚어낸 1929년 대공황은 자본주의의 부작용과 병폐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탐욕이 만들어내는 실업이라는 (한편에서는 부가,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이 쌓이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태어나고 성장한 비결이기도 한데, 15세기 이후 영국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이다. 부모에 이어 자손이 대대로 귀족에게 땅을 빌려, 한 귀퉁이마다 한 집이 먹고 사는 오랜 관습이 깨진 건 양털을 깎아 수출하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였다. 소작농을 전부 내쫓고 울타리를 쳐 양을 키우면 매일 돈이 자라나는데, 어느 귀족이 관습을 존중하고 농부들의 사정을 돌보겠는가.


이렇게 15세기 중엽부터 극심해진 인클로저 운동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영국에 쏟아졌는데, 이 실업자들이 이민자 또는 군인이 되어 영국의 해외 식민지를 넓히고 이권을 지키는 총알받이가 되었다. 한 역사가는 1660년대에서 1950년까지 무려 2000만 명의 영국인들이 북미와 호주, 뉴질랜드 등의 해외로 이주를 했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보면 근현대 세계지도를 그려낸 게 이들 쫓겨난 영국인들인 것이다. 한편 도시로 흘러간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악마의 소굴로 부르는 공장으로 들어가 세계 최초의 노동자계급이 되어 노동법과 노동조합, 노동당을 탄생시켰다.

 

직업을 잃고 난을 일으킨 사람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이민자와 군인이 되어 한 민족의 활동 무대를 쫙 넓힌 (다른 민족은 지배에 놓이는) 경우는 고대에도 있었다. 그리스는 산이 많아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농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일찍이 지중해 서쪽으로 퍼져 나가 시칠리아, 마르세유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에서 용병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인 13000여 명이 용병으로서 페르시아 왕위 쟁탈전에 참전했다가, 바그다드 인근에서 고용주를 잃고 다시 그리스로 탈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용병들의 지도자였던 크세노폰이 책으로 엮은 게 아나바시스이다. 이 책이 그리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페르시아가 실제로는 허약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한다. 그리고 아나바시스로부터 65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로 향하고,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한다.


실업자가 된 민중이 역사를 뒤흔드는 장면은 중국과 한국에서도 여럿 나온다. 양나라를 무너트려 수당 시대로 이어지는 후경의 난, 당나라를 쓰러트려 510국 시대로 이어지는 황소의 난, 고려를 약화시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삼별초의 난, 명나라를 멸망시켜 청나라로 이어지는 이자성의 난, 다시 청나라의 조종을 울린 의화단의 난. 왕조 교체 시마다 직업을 잃은 사람들에 의한 난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난세가 모두 끝나고 태평성대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멕시코에서는 NAFTA로 인한 실업자들이 마약사업에 뛰어들고 있고, 한국에서는 IMF위기 대량실업이 남긴 비정규직과 무한경쟁으로 삶이 팍팍하다 못해 고통스럽고, 소말리아 앞 바다의 어부들은 해적이 되었다.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일곱 개의 문을 가진 테베는 누가 지었을까?

책들에는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왕들이 돌덩이를 날랐을까?”

 

독일의 극작가,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던진 질문에 대해 20세기 역사가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답했다. 역사를 기록해온 이들은 오랫동안 왕과 장군 같은 권력자들의 의도와 결정이 역사를 만드는 것처럼 써왔다. 이와 달리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자들에 주목한다. 이름 없는 자들의 소리 없는 (기록되지 않은) 외침이 실제로 역사를 움직여온 힘이라는 아이러니의 발견은 역사학의 위대한 성과 중 하나이다.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지배받는 이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건 설계도만으로는 도시를 지을 수 없다는, 손과 발의 노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지배자는 구상하고, 피지배자는 실현하는 분업이 유지되는 한 역사는 멈추어 있다. 역사가 나아갈 때는 구상과 실현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피지배자 스스로 제 살 길을 찾아나서는 순간이다. 그럭저럭 생활을 보장해온 삶의 방식이 무너지는 순간 민중은 전혀 다른 삶을 모색하고, 이로부터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고 새 시대를 여는 에너지가 쌓인다. 우리는 빈곤과 실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빈곤과 실업이 사라지는 날까지 역사는 틀림없이 전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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