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 2034년,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리트 계급의 세습 이야기 이매진 컨텍스트 72
마이클 영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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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를 정의롭게” -MZ노조

 

지난 107일 서울교통공사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서울교통공사의 MZ세대 노조가 신청한 비정규직 직고용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지하철 광고 게재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건보공단의 공정가치연대와 서울교통공사의 (All)바른 노조가 비정규직 직고용 반대 광고에 함께 한 건, 언론에 보도된 관련자의 말에 따르면, “젊은 직원들은 오랜 노력 끝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고, “채용은 공정의 산물이지,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때문이다.


시험 순위로 정규직을 뽑는 건 공정하고, 비정규직이 투쟁으로 정규직이 되는 건 불공정하다는 생각을 대변하는 단어가 바로 능력주의이다. 오직 능력으로만 선발하고, 능력에 따라 지위와 소득에 차등을 두는 게 효율적일 뿐더러 공정하기까지 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게 요즘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비판하는 책들이 계속 출판되고 있다. 한국의 능력주의(박권일),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덜), 능력주의는 허구다(스티븐 J. 맥나미 외 1) 등인데, 이중에 한 권만 읽으라면 마이클 영이 쓴 능력주의를 꼽고 싶다.


능력주의로 번역하는 ‘Meritocracy’는 마이클 영이 1957년에 발간한 능력주의에서 처음 만들어 낸 단어로 알려져 있다. 능력주의는 사실과 허구의 역사가 섞여 있는 미래 소설로서, 2034년 시점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형성과 전개를 돌아보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능력은 타고난 지능(IQ)과 노력의 합으로 정의된다. 능력에 따른 선발 원리는 신분제를 타파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능검사와 업무능력평가가 점차 정교해지면서 어느 때부터 IQ125 이상인 사람들만이 새로운 상층 계급을 구성하고, 이들끼리만 결혼하면서 지능이 높은 자식을 길러낸다. 능력의 원리가 다시 세습의 원리를 불러내고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분류되기 때문에 계급들 사이의 간극은 어쩔 수 없이 더욱 넓어진다. 상층 계급은 자기가 지닌 역량과 자기가 기울인 노력, 부정할 수 없는 자기의 업적 덕분에 성공한 만큼 자기회의나 자기비판에 시달리지 않는다. 반면 하층 계급은 몇 번이고 치른 시험에서 족족 떨어진 만큼 당연한 결과로 열등생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제 예전처럼 기회를 박탈당한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열등한 지위를 갖게 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이제 열등한 사람은 자존감을 지탱할 버팀목을 모조리 잃어버린다.”(306~7)

 

일단 차지하라. 그 자리가 너의 능력이 될 것이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일견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이 얼마나 정의롭지 않은 결과로 귀착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가장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구매자에게 자원을 배분하는 게 시장원리이다. 따라서 한정된 일자리도 가장 많은 시간을 희생하여 노력을 기울인 구직자에게 열어 주는 게 합리적이며, 노력의 양과 재능의 우열을 평가하는 게 시험의 기능인 것 같다. 시험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기부금을 많이 낸 순? 기존 직원의 자녀 우선? 힘 좀 쓰는 사람들의 청탁 순? 선착순?


시장 이외의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듯이, 능력주의 이외의 대안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내 능력으로 쟁취한 일자리에 가지는 자부심은 이 정도 노력도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시도에 대한 불편과 혐오를 정당화한다. 노력이 부족한 걸 탓해야지 능력의 원리에는 흠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고소득이 시험으로 뽑힌 사람들만의 능력 덕뿐일까? 공공부문의 안정적 소득은 상당 부분 사회적 합의와 재정정책에 의존하는데, 공공성보다 효율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바뀌면 고액 연봉자들부터 구조조정 1순위가 될 것이다. 한편 침체된 산업이나 원청에 쪽쪽 빨리는 하청에 속해서는 월등한 재능과 노력으로도 패배자가 되기 싶다. 잘 나가는 기업도 사실은 저개발국가의 저임금 노동력 착취와 자원 약탈, 환경 파괴에 의존하고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생산성과 소득이 꼭 비례하지 않으며, 개인의 기여도도 경제가 복잡해질수록 측정하기 어렵다.


이처럼 개인의 소득과 능력 사이의 관계가 약하다면 능력주의가 내세우는 능력이란 무엇일까? 위계화된 불평등 구조 속의 높은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까지만 유효할 뿐인 능력이다. 일단 자리를 차지하면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도 그 자리가 아래층보다 나은 부와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와 힘은 세대를 넘어 학벌과 재산으로 전달된다. 진짜 뒤집고 부정해야할 건 높고 낮은 자리들의 존재이다. 이처럼 잘못된 위계에 맞서 우리는 인간다움의 만개를 가슴에 품어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난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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