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Russia`s War』 리뷰

 

 

소련의 성공은 이 모든 요인들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있다. 그 요인들이란 대중의 애국심과 타고난 인내심, 스탈린의 역할, 계획 수립 및 동원의 정치 환경, 그리고 창의성과 노력의 일시적인 만개 등이다. 마지막 요인은 매우 강력해서 대숙청 이후 사회를 괴롭혀 온 복종할 팔자를 타고났다는 암울한 풍조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전쟁 수행 노력은 단지 자신들이 속해 사는 체제에 반항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만 지탱되지 않았지만, 소비에트 국가, 그 지도자, 당의 산물도 아니었다. 두 요소가 상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독일의 공세가 부과한 상호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한데 결합되어 불안정하게 공생하면서 작동했다. 대가를 더 적게 치르고, 더 인간적으로 덜 억압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지 않고도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데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소련이 치른 전쟁의 비극이었다. 고통받은 한 민족의 희생이 승리를 가져왔지만 해방은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상실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승전의 순간에.”

 

위 글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마지막 문단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들 중 하나가 인상적이다. “고통받은 한 민족의 희생이 승리를 가져왔지만 해방은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 문장이 책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이 말만큼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소련 인민의 운명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어 보인다.

 

 

예상을 뒤엎은 승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원제는 Russia`s War이다. 한국어판 제목이 주는 인상과는 다르게, 나치 독일의 침공을 이겨내고 승전하기까지의 소련의 전쟁수행과정만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인 리처드 오버리는 책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요약한다.

 

소련은 거의 공통된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두었다. 구소련에서 전쟁 초반에 두드러진 터무니없는 무능과 의미 없는 억압에 퍼부어진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는 가장 혹독한 시험을 통과했다. 이것이 역사가들에게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를 내놓는다. 즉 소련은 전쟁에서 당연히 패했어야만 하는데, 의기양양하고 포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p435)

 

리처드 오버리는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에 답을 내놓는 데 능숙해 보인다. “대중의 애국심과 타고난 인내심, 스탈린의 역할, 계획 수립 및 동원의 정치 환경, 그리고 창의성과 노력의 일시적인 만개 등의 승리의 요인들을 전쟁의 일련의 장면들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단지 설명과 분석에 그치지 않고 전쟁수행과정에서 소련 인민이 피와 땀으로 치룬 가혹했던 희생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발휘하는 최고의 장점이다.

 

인터넷에서 책의 제목으로 검색하면 전쟁사 마니아들이 이 책을 추천해놓은 여러 글들을 읽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독소전쟁사를 다루고 있는 일부 마니아들의 관점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들은 마치 전쟁의 이성전략 전술적 합리성의 관점으로만 독소전쟁을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의 과정에서 단지 전쟁수행기구의 일 도구로서만 취급된 일개 군인, 국민들의 생명과 삶에 대한 짓밟힌 권리와 그들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그러나 그 의미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 서사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영웅화된 전쟁기계들의 행위들에 매겨지는 평가에 대한 관심은 과다하다. 특히 당시 가장 선구적이고 파격적이며 효율적이었던 전쟁기계로 평가받는 독일군에 대한 관심에는 애정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이 전쟁기계가 어떻게 하여 망가지고 부셔졌는지에 대한 고통 어린 호기심이 독소전쟁사에 대한 관심을 지배하는 듯 보인다.

 

 

 

 

 <진격하는 독일 탱크들. 나치 독일군의 놀라운 성공은 탱크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가진 군사적 가능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최초로 구사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비행기의 종심 타격력과 결합한 집단을 이룬 탱크의 진지선 돌파와 신속한 기동, 종심타격은 적군의 전선 수습, 군대 재전개 능력과 시간까지 일시에 파괴할 수 있었다. 한니발이 기병의 적후방전개능력을 극대화시켜 극적인 섬멸전을 완성했듯이, 나치 독일군에게 한니발의 기병은 기갑군이었다.>

 

독일 국방군과 전격전에 호의적인 전쟁사 마니아들이 내놓는 독인군의 패배에 대한 진단의 핵심은 히틀러의 책임이다. 히틀러의 어리석고 광기 어린 군사작전에 대한 개입, 지도가 독일군의 궤멸과 패주를 낳았다는 것이다. 1941년에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는 게 아니라 포위케 함으로써 북부집단군의 전력을 허비한데다가, 결국 소련의 반격을 허용하고 연합국의 소련에 대한 보급로도 터주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42년에는 주공을 모스크바가 아니라 남방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스탈린 정권의 붕괴를 노리지 않은 점.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에서 6군의 후퇴를 허용치 않아 궤멸시킨 점. 이후 소련군의 반격에 맞서 만슈타인 원수의 기동방어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재앙과 다름없었던 현지방어만 고집한 점 등이 히틀러 비난의 근거들이다.

 

이러한 진단은 그들에게 내재된 관점의 논리적인 귀결로 보인다. 그들에게 독일 참모부는 전쟁이성과 전략전술적 합리성의 결정체인 두뇌로, 또 독일 국방군은 그 두뇌의 지시를 정교하게 실천하는 강인한 육체로 여겨진다. 따라서 전쟁 패배의 원인은 그 두뇌와 육체의 밖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나 소련군은 그 원인이 될 수 없다. 독일군보다 우수한 두뇌와 육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군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근육을 무력화시킨 독일 내부의 적,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된다. 이러한 시각은 전쟁사 마니아들이 2차 세계 대전의 최고 명장으로 꼽는 만슈타인 원수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말한 변명과 일치하기도 하다.

 

 

 

 

<왼쪽부터 히틀러, 괴링, 괴벨스, 헤스>

 

내 생각이 거친 요약이며, 전쟁사 마니아들의 자부심 어린 글들을 지나치게 폄하한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들에 대해서 리처드 오버리는 이렇게 평가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 장군들은 재빨리 히틀러의 변덕스러운 지도 방식과 장비 부족으로 패배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독일이 전쟁에 진 것이지 소련이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사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1941년에 독일 장군들은 무식한 반()아시아전사들인 러시아 인들, 그리고 제정 러시아 장군들……보다 훨씬 덜 위협적인소련 지휘관들을 상대로 한 승리는 (기껏해야 8주 내지 10주가 걸릴) 시간 문제라는 자신감에 차서 출전했다. 이런 판단은 일어난 시건들로 거의 입증되었다. 독일군이 패하려면 독일 지도자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그 어떤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소련이 경제력을 회복하고, 군대를 개혁하고, 출중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들을 양산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독일은 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은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했다.” (p435)

 

즉 리처드 오버리는 1941년의 대패배를 딛고 일어선 소련의 역량과 이를 가능케 한 소련 내부의 혁신을 독일 패배의 참된 원인으로 바라본다. 혁신된 소련군에 독일군은 패배해야만 했다. 그리고 리처드 오버리는 소련에게 가해진 충격과 이로 인한 불가피한 변화를, 위기 앞에 선 초인적인 이성과 합리성의 단선적인 실현 과정이 아니라, 실수와 패배를 반복하며 배우며, 그 교훈을 인민의 희생이라는 토지 위로 고통스럽게 뿌리내리는 모순적이고 총체적인 과정으로서 묘사한다.

 

역사는 아무리 막대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책임을 모두 질 수 있을 만큼 만만치 않다. 반대로 역사는 그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가는 거대하고도 복잡한 구조물이며, 또한 허물어지고 새롭게 지어지는 영속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쟁을 몇몇 장군들과 지도자들의 머릿속 수읽기 정도로 환원시킴은 역사상에 실존했던 거의 모든 구조와 과정을 생략하는 오류일 뿐이다.

 

만약 히틀러의 잘못된 지도가 독일군을 패배로 몰아넣었을지라도, 히틀러를 전혀 견제치 못하고 그 전제를 허용한 체제의 취약성과, 이러한 취약성을 낳은 일련의 역사적 국면들에서 나치를 용인했던 모든 이들에게 책임이 나누어지는 법이다.

 

반대로 소련의 승리를 스탈린 개인의 업적으로 치환하는 개인숭배적 발상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체제의 성공과 이러한 성공을 낳은 일련의 역사적 국면들에서 과업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스탈린만을 치켜세우는 데 지금 누가 동의하겠는가?

 

 

소련 인민의, 인민에 의한 승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 영광을 돌리는 이들은 다름 아니라 이름 없는 자들, 바로 소련 인민들이다.

 

(독일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1943년의 승리들은, 비록 희생이 1년 전보다도 훨씬 더 적기는 했지만, 영웅들을 많이 잃는 큰 희생을 치르고 거두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군 군인과 항공대원 470,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독일군 진지선은 다시 183,000명을 잃고 돌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엄청난 수치였다. 두 달 동안의 싸움에서 붉은 군대는 미국과 대영 제국이 전쟁 전체 기간에 잃은 군인과 거의 같은 수의 군인을 잃었다. 소련 인민에게 부과된 희생의 수준은 다른 사회를 작동 불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소련 인력의 엄청난 대량 출혈은 두 해 넘게 지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 4,700,000명이 죽음을 당하고 수백만 명이 불구가 되거나 상처를 입었다. 이 손실은 1943년의 가을철 공세 무렵에 소련군의 사단 병력이, 비록 대포와 탱크의 대규모 증강으로 강화되기는 했지만, 2,000명으로까지 내려갈 정도로 막심한 것이었다. 전쟁 동안 소련군 부대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대차 대조가 노동의 대량 투입에서 자본의 대량 투입으로 이동했다. 소련이 동부에 무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서 인력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신화다. 동부에는 사람보다 공간이 더 많았다. 소련은 오로지 소련 여성의 2/3를 동원해서 공장과 농장을 운영했기에, 그리고 더 이상 그저 무턱대고 병사의 숫자에 의존할 필요 없이 미군처럼 대량 생산되는 무기에 의존할 수 있도록 군을 현대화했기에 살아남았다.” (p289)

 

 

 

 <소련과 독일의 전시 생산 비교. 소련은 석유를 제외한 다른 자원의 생산 능력에서 독일에 뒤지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대량의 항공기와 탱크, 포는 점차 소련군이 독일군을 압도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위 내용의 요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련이 독일에 결정적인 반격을 가하기까지 막대한 인명피해를 치렀으며, 이는 다른 사회였다면 그 작동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소련 사회는 자신에게 가해진 대파괴를 견디어냈다. 소련 인민이 무한에 가까운 인내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죽은 이들의 자리를 대신해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련이 가진 힘이 단지 무한의 인력과 인내심에 불과했다는, 소련군의 승리에 대한 무지에 가까운 통상적인 설명에 대한 반박이다. 소련은 인적 물적 자원의 대량 파괴와 국토의 큰 상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하게 재생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현대화, 기계화되었고 이에 투입된 군장비들은 새롭게 조직된 경제에서 산출되었다. 그리고 군대가 치룬 가혹한 희생 못지않게 경제의 재조직화 과정에서도 소련 인민은 다른 국민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희생을 감내했다.

 

“‘총력전이라는 용어가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용어는 틀림없이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소련을 묘사하는 말일 것이다. 그토록 많은 국민을 전쟁 수행 노력을 위한 작업으로 내몬 다른 국가는 없었으며, 사람들에게 그토록 과중하고 기나긴 희생을 요구한 다른 국가도 없었다. 후방 국민의 삶은 전쟁이 벌어지는 전선의 고통스러운 싸움을 빼닮은 분투였다. 1943년 이후에 거둔 승리들은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얻었다. 소련을 단일 전시 병영으로 바꾸겠다는 스탈린의 약속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전쟁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다. (중략)

 

하루하루의 삶은 농촌에서 가장 가혹했다. 시골 마을은 자기 마을 장정들을 군대에 내주었다. 1944년 무렵에는 집단 농장에서 일하던 남자의 거의 3/4이 사라졌다. 남은 남자들은 병자나 노약자, 또는 전선에서 불구가 된 농부들이었다. 도시와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에 극히 중요한 공급 식량을 생산하는 일 대부분을 러시아 여자들이 했다. 여성이 1941년 농촌 노동력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1944년 무렵에는 그 수치가 거의 4/5였다. 그들의 일상은 혹독하고 비참했다. (중략) 그들에게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릴 농기구와 말이 없었다. 그들은 막대기와 나뭇가지로 땅을 파헤쳐 씨를 뿌렸으며, 여자들이 조를 짜서 쟁기를 끄는 모습이 낯익은 광경이 되었다. 어떤 농민들은 하루의 작업 시간을 마치면 지역 벌목조에 가담해서 여름이건 겨울이건 종종 먼 거리까지 나무를 끌고 가서 도시에 극히 중요한 땔감을 공급해야만 했다. 많은 농민들이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산한 식량과 땔나무가 부족해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다. (중략)

 

도시의 삶은 가혹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견디기가 더 쉬었다. 일을 하면 먹을 것을 얻었다. 완전 고용된 모든 사람들에게 배급표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일하지 않으려고 들거나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가족에게 얹혀살든지 아니면 굶어 죽었다. 1942, 전쟁 기간 중 가장 암울했던 수개월 동안 가장 약한 사람들이 죽어 갔다. 이것에는 잔인한 합리성이 존재했다. 일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보상을 받았다. 나머지는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중략) 새로운 노동 조건이 정해졌다. 주당 66시간 일하고 한 달에 하루 쉬는 것이 표준이 되었다. 휴가는 중지되었다. 초과 근무 의무제가 도입되었다. 공장 노동자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고 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기에 충분할만큼 나이가 들기를 기다리는 소년들이었다. 과중한 노동 시간, 기껏해야 기초 수준인 공장의 안전 기준, 가혹하게 부과되는 작업 기준량은 한결같이 그들의 건강을 해쳤다.” (303-5)

 

 

 

 

 <집단농장의 점호 장면. 자신들의 두 팔과 막대기가 여성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생산수단이었다.>

 

소련이 발휘한 힘은 인력의 규모가 아니라, 한정된 인력에 지어진 무한한 요구의 감내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소련 인민의 희생을 온전히 열정적이고 자발적이었던 것으로 낭만화화지 않는다. 그토록 영웅이었던 희생은 소련 인민 스스로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체제가 인민에게 가한 억압과 테러에 의해 상당부분 지탱되었다. 책을 읽다보면 아연실색할 정도로 스탈린주의 체제의 내부를 향한 테러가 멈추지 않고 열거된다. 과장되고 날조된 태업과 반역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 수많은 살상을 낳은 소수민족의 집단이주, 막대한 규모의 유형과 노동수용소 등.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 그치지 않고, 억압과 테러에 의한 동원의 과정에서, 단지 동원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요소들이 체제를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싸움터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피난민과 이주민이 흘러들고 먹을 것과 생필품을 구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고 노동 관리 체제가 가혹함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후방은 계속 굴러갔다. 그것은 서구에서 흔히 국가 계획이라는 서툰 손에 지배되기에 단순하고 취약하다고 간주된 체제로서는 비상한 집단적 성취였다. (중략) 천천히 더 확정적이고 중앙 집권화된 계획 체계가 수립되었다. 이 체계는 전시 조직화라는 특수 상황이 쉽사리 적응할 수 있음이 입증된 평시 경제 체제에 기반을 두었다. 여러 차례의 5개년 계획으로 관리들과 생산자들은 전국 차원의 계획과 자원 할당에 익숙했다. 침공 뒤에 존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체제가 식량이나 무기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계획이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러나 식량, 물자, 노동력이 심하게 부족한, 쭈그러든 경제가 더 번영하고 생산성이 높아 보이는 적보다 더 많은 생산을 해낼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감안해 볼 때, 오로지 희소 자원과 그 자원 할당을 통제하는 힘을 유지하는 소비에트 국가의 해당 능력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p308)

 

전쟁을 지휘했던 소비에트 국가가 단지 억압적이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당과 국가는 전쟁에서 생존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잠재된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국가기구들 중 특히 소련 군대의 혁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소련군이 독일의 중부 집단군을 쳐부수었다는 사실은 전쟁 초반 2년이 준 교훈을 얼마나 잘 배웠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 동안 실시된 소련군 작전술의 가장 훌륭한 사례였을 것이다. 그 전역은 1930년대 초에 투하체프스키가 최초로 윤곽을 그린 집단을 이룬 항공기와 장갑 무기의 종심 작전과 아주 흡사했다. 먼저 619일 밤에 파르티잔 부대들이 독일군의 교통망에 체계적인 공격을 개시해서 운송 목표물 1,000군데에 맹타를 가하고 독일군의 보급 체계와 재전개를 불능으로 만들었다. 이 뒤에 엄청난 강도를 지닌 항공 공격이 이어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기념일 전날인 621일에 소련 폭격기들이 공조해서 독일군의 후방 지대에 항공 타격을 개시했다. (중략)

 

드디어 623일에 전면 공격이 독일군 돌출부 북쪽에서 시작되어 다음 이틀 동안 남쪽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모종의 공격이 있으리라는 징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방어자들은 자기들을 치는 것의 규모와 강도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이 닥치고 있는가를 독일군에게 경고했을지도 모르는 통상적인 일제 포 사격이 총공격을 위해 줄어들자, 보병, 탱크, 포병이 어두음을 틈타 한꺼번에 전진했다. (중략) 독일군의 방어가 허물어져서 뒤따르는 기계화 부대가 그 틈새를 벌리고 다음 목표물로 이동할 공간을 남겨 놓았다. 이번에는 소련 지휘관들이 독일군의 저항 고립 지대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진지선이 공고해지기 전에 돌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독일군이 구사해서 매우 놀라운 성공을 거둔 바로 그 전술이었다.” (p326-7)

 

소련군이 도리어 독일군을 상대로 전격전을 벌일 만큼 변모했던 것이다. 소련군의 현대화는 손쉬운 모방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소련 사회가 전쟁의 고통을 감내하며 쥐어짜내고 성취해낸 모든 결실들, 참패의 연속 중에서 고통스럽게 배운 교훈들의 극적인 종합, 완성이었다. 전쟁 초기에 막대한 규모의 손실은 입은 붉은 군대를 보충하기 위해, 후방에서의 전쟁수행을 위한 핵심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남자들이 징집되었다. 그리고 남겨진 농장과 공장에서 남자들을 대신해 노동력을 제공한 건 여자와 아이였다. 이들이 지탱한 소련의 경제는 독일보다 적은 경제자원을 가지고서 더 많은 무기를 군대에 제공했다. 이를 위해 후방에 남겨진 이들은 단지 먹고 일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제외한 모든 소비품을, 또 모든 사적인 시간을 희생했다. 이 정도의 동원과 사회재조직은 소련 정치 경제체제에 고유한 능력의 발휘를 제외하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소유제도와 국가가 자원들을 할당하고 운용하는 중앙집중식 계획경제, 국가에 순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조건, 하나의 당과 한 명의 영도자만이 존재하는 일괴암적인 국가권력, 이것들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또한 국가기구들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절대시하는 국가이성의 의지를 집행하는 데 자국민에 대한 테러조차 서슴없이 자행할 정도로 일사불란함을 흔들림없이 유지했다. 이처럼 가혹한 조건에서도 인민으로 하여금 계속 싸우고 일하게 하기 위해 소련 당국은 독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자는 애국심에 호소했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계급투쟁이라는 소비에트 이념보다는 민족과 전래의 토지를 지키자는 전통적인 애국적 호소가 인민의 희생을 유지하는데 더 유효했다. 그리고 소련 인민은 자신에게 지어진 운명을 감내하기 위해 동유럽 봉건주의의 오랜 지배에서 길러진 특유의 숙명론적 심성에 기대었다.

 

 

 

<어머니-러시아가 그대를 부른다!>

 

그리고 소련군 지도부는 쥐어짜낸 인력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운용하는 법을 깨닫고 적용했다. 폭격기들과 탱크로 전략단위를 이루어 신중하게 선정된 지점들을 집중적으로 타격해 적을 마비시키고 파열구를 냈다. 그리고 기계화된 운송수단으로 병력과 장비를 실어 나르는 부대가 뒤를 따라 적역을 가로지르는 회랑을 만들어내고 넓혔다. 마지막으로 닦여진 회랑으로 기동한 보병사단이 남겨진 적을 포위하고 섬멸했다. 작전은 수천킬로미터에 걸쳐진 전역에서 계획에 따라 정교하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군대의 기능이 분화하고 각 부대는 서로 유기적으로 기능했다. 전투기와 탱크를 모는 조종사들, 수리하는 정비사들, 새로운 개념의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하고 수행하는 장교들, 이들을 신뢰하며 현대전을 수행하는 병사들이 빠르게 길러지고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독일군을 어떤 운에도 기대지 않고 압도할 정도로 능숙해졌다.

 

 

영웅을 기다린 가혹한 운명

 

가장 중요한 점은, 승전의 조건들이 위로부터의 강제와 인민의 순응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동력은 그 반대의 사실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리처드 오버리는 말한다.

 

원시적이라고 비난을 받은 한 체제가 보여 준 현대적 능력은 그저 NKVD(내무 인민위원회의 약자로 국가테러기구)가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사실, NKVD가 개입한 곳에서 나타난 결과는 전쟁 수행 노력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해하는 것이었다. 소련식 계획 체제는 그 관료적 이미지에 어긋나는 유연성과 조직력을 보여 주었으며, 엄청난 다수 국민을 단일한 공동 목표에 동원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과시했다. 전쟁이 끝난 뒤 낡은 버릇이 되돌아왔다. 당도 관료제도 사회주의 낙원을 계획할 수 없었다.

 

이 명백한 역설을 설명해 주는 해석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 전쟁 동안 비상 사태로 수많은 소련 관리, 경영자, 군인들이 수동성의 분위기,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한 퇴역 군의관은 1941년 이후에 사람들이 어쩔 도리 없이 여러 경우에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맡아야만 했던’ ‘자연 발생적 탈스탈린화시기가 왔다고 회상했다. 마침내 1942년 가을에 일선 정치 기관원이 강등되고 장교들이 매 시간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점검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행동할 수 있었을 때 군에서 개인의 책임감이 고양되었다. 1990년 승전 기념일에 소설가이자 참전 용사인 뱌체슬라프 콘드라티예프는 마치 오로지 그대만이 러시아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 그런 느낌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전쟁이 개개 군인들에게 커다란 책임을 부여했다고 회상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런 도취적인 의무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콘트라티예프는 이어서 내가 있든 없든 만사는 어느 때처럼 굴러간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후방에서도 전쟁이 가져온 해방감이 존재했다.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살아남은 시인 올가 베르그골츠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썼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었기에 그런 자유를 자극했고, 그 자유는 자연 발생적인 융통성, 삶의 강렬함, 섬뜩한 극기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p437)

 

자유와 책임의 자연발생적인 확대에 뒤따른 개인의 주체화가 체제 아래서 숨죽여 있던 힘을 활성화시켰다는 논지이다. 이러한 논지의 타당성을 따져볼 수 있는 경험자료의 제시는 부족해 보인다.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가 자국민에게 저지른 테러들에 대한 서술에 비해, 당과 국가 내부에서 또는 그 밖에서 자발적이고 독창적으로 수행된 전쟁수행노력에 대한 서술은, (스탈린의 용인 하에) 스탈린의 간섭에서 벗어나 성공적인 전략들을 입안했던 소련군 사령부에 대한 부분 정도를 제외하고는 일화적이고 빈약하다. 그리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 모순적인 현상들, 즉 한편에서는 억압과 테러가 다른 한편에서는 창의성과 노력의 만개가 어떠한 모습으로 공존할 수 있었는지, 그 창의성과 노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리처드 오버리는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즉 그의 마지막 명제는 일종의 가설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개개인에게 자율과 책임이 주어질 때가 그렇지 않은 때보다 더 큰 에너지와 열정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는 바이다. 의사결정이 상부로 집중될수록, 또 하부의 재량권이 축소될수록 하부는 상부의 판단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게 되며, 상부는 숱한 자잘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고받고 검토하고 판단해야 하는, 자기 능력 이상의 일로 과부하에 걸린다. 이에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변해가는 현장에 대해 대체로 무지한 채로, 일률적이고 과거 결정을 반복 참조하는 착오적인 것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전체가 활력을 잃어가고 무기력해져간다.

 

비극적인 것은 전쟁이 끝난 이후로 소련 사회가 실제로 화석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스탈린주의가 다시 소련 사회를 뒤덮기 시작했다. 지배의 사슬이 사회를 옮아 매고, 체제는 늘어난 사슬의 무게를 못 이기며 침체로 빠져들었다. 승리를 가져다준 인민의 희생을 배반하고 다시 족쇄를 채웠던 체제는, 그러나 두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어찌 되었던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인류사 최악의 재앙이었고, 그 중 대부분의 피해가 독소전쟁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조차 소련 인민이 겪은 참화를 거의 설명하지 못한다. 소련 인민 앞에 놓인 직접적인 위협은 무엇보다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가 동방에서 일으킨 전쟁은 클라우제비츠 식의 정치의 연속 같은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한 인종을 전래의 토지에서 몰아내고 노예화시키고 절멸시키기 위한, 총과 포가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목적-살상을 한 점의 의심없이 실현한 학살이고 파괴였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을 위해 슬라브 인종이 거주하는 우랄 산맥 서편의 땅과 자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이 건설될 동방의 식민지에는 게르만 민족을 위해 봉사할 노예화된 인구 외의 슬라브인들은 절멸되거나 시베리아로 내동댕이쳐져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동방계획을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진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실행에 옮겼다. 유태인과 공산당원을 골라내 총살에 처하고 가스실로 보냈고, 수백만 명의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해 독일의 공장에서 혹사케 했다. 나치의 식량과 물자 징발은 피점령민들을 고의로 기아로 내몰아 절멸시키려 했던 것이 진지하게 고려됐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될 정도다. 이처럼 자신들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려고 온 나치 독일 앞에서 소련 인민에게는 흥정의 여지가 없었다. 앉아서 죽던지, 아니면 싸우다 죽던지 뿐이었다.

 

그런데 총부리가 앞에서만 겨누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무제한적 희생을 요구하는 스탈린주의 체제 역시 소련 인민에게는 사실상 또 다른 위협이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싸우고 일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나 전장으로, 공장으로, 토지로 내몰렸다. 어쩔 수 없는 전시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이 체제는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자국민들을 혹독하게 취급했다. 개개인들은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자신들에게 지어진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의문을 표하는 순간, 그는 고문실로 끌려가거나 총살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일상적인 테러의 위협이 소련 전시사회를 지배했다.

 

소련 인민은 한 편에서는 절멸과 노예화의 대상으로, 다른 한 편에서는 국가이성의 무자비한 실현의 도구로 여겨졌다. 어느 곳에서도 그들은 편히 누울 수 없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위대했던 건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었던 그 혹독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용기를 발휘하고 결의에 찬 투쟁을 시작하고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군이 레니그라드와 모스크바 앞에까지 이른 1941) “9월 중순 무렵의 분위기는 침울하고 절망적이었지만, 모스크바의 공황 같은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그들이 해야만 하는 희생을 상기해 줄 필요가 없었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증언에서 소개 대상이 된 사람들 중 다수가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린이들은 가족과, 아내는 남편과 함께 남았다. 주민들의 공포와 나란히 쥬코프가 훗날 보통 사람들의 용기, 인내심, 강인성이라고 기억한 것 또한 함께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419월은 평생 기억에 남았다고 회상했다.” (p150)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가는 동안 시 당국은 조직화된 생활 비슷한 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공장은 가능한 한 오래 계속 가동해서, 시 방어자들을 위한 장비를 생산해 냈다. 7월부터 12월까지 공장들에서 탱크와 전투용 차량 1,100대 이상, 박격포 10,000, 포탄 3,000,000발이 생산되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굶주리는 레닌그라드 노동자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사용할 대포와 박격포 1,000문을 만들어 냈고, 이 무기들은 독일군 진지선을 넘어 레닌그라드 밖으로 공수되었다. 그 유명한 키로프 공장은 전선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잠을 잤고, 작업 시간은 독일군의 소이탄으로 난 불을 끄거나 공장 방어 훈련을 하느라 중단되어 있었다. 공장들은 더 궁색한 가정생활에서 벗어나 먹을 것, 동지애, 심지어는 인정마저 발견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p154)

 

저널리스트 앨리그잔더 워스는 1944년에 우크라이나의 소도시 우만의 시장으로 임명된 중년의 러시아 인 파르티잔 대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피부가 창백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긴 단신의 자하로프 시장은 자기를 찾아온 손님에게 고생스러운 파르티잔 생활을 설명해 주었다. 그가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작은 무리였고, 그들은 비니차 숲에 들어가 숨었다. 무기가 빈약해서 그들은 계속 큰 피해를 입었다. 자하로프는 19417월에 부상을 입었고, 독일군에게 사로잡혔다. 탈출을 한 그는 우만 밖의 파르티잔과 합류했다. 그는 1942년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고, 게슈타포는 그를 혹독하게 고문하고 때리고 등을 부러뜨렸다. 그는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고, 숲에서 파르티잔 대원들은 그를 그저 미챠 아저씨라고만 알았다. 거기서 그는 철도 공격을 주도하는 한편, 그의 부대는 독일에게 고용된 카작에게 시달렸다. (중략)

저항은 이해하기가 더 쉽지 않다. 저항에는 엄청난 위험이 따랐으며, 파르티잔은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의 가미가제였다. 파르티잔에 가담한 사람들 일부는 소비에트 체제가 복귀했을 때, 또는 복귀할 경우에,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가담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순수한 신념에서 파르티잔에 가담했다. 자하로프 시장은 자신의 선택을 내 나라가 잘되라고 일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국민에게 그같이 무거운 짐을 부과한 체제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정치적 이상주의에 회의를 품기 쉽지만, 그 이상주의를 내버려서도 안 된다. 소박한 애국심은 많은 파르티잔의 말과 행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우리에게는 그것을 무시할 이유가 없다.” (p211-2)

 

 

 

 <처형당하는 파르티잔 여성 대원>

 

“1942년과 43년의 소련의 군사적 소생은 난타당한 공업 경제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은 오직 1941년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지역에서 기계, 설비, 인력이 극히 경이로운 대탈출을 했기에 구원을 받았다. 독일 공격 이틀 뒤 계획 입안자와 관리 85명의 직원을 가진 소개 위원회가 세워졌고, 그 책임자는 당에서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라자르 카가노비치였다. 그는 그 심각한 비상시국에 대처하지 못하고 7월에 노동조합 지도자 시베르닉으로 교체되었다. 소개는 이례적인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항공기의 공격을 당하면서, 몇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에 독일군이 있는 상황이 자주 빚어지는 가운데 수천 명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개미처럼 공장에 달라붙어 기계를 뜯어내고 설비와 주요 물자를 가장 가까운 철도 수송 종점으로 운반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장거리 여행을 하기 위해 종종 인력을 이용해서 무개 화차 위나 유개 화차 안에 짐을 실었다. 가능한 곳마다 각 열차는 한 공장과 그 공장 노동자를 통째로 운반했다. 노동자들은 줄지은 침대와 난로 하나가 갖추어진 화차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우랄 산맥, 카자흐스탄, 또는 시베리아에 있는 목적지에 이르러 그들은 화차에서 쏟아져 나와 작업장을 재조립하는 고된 일을 시작했다.” (p235)

 

보통 사람들이 발휘했던 영웅적 행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 더 말해져야 한다. 이것들이 독일에 맞서 소련이 발휘했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던 전생수행능력의 진정한 비밀이다. 소련 인민은 국가기구가 파괴되고, 허물어지던 절망적인 패주의 상황에서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며 스스로 저항을, 반격의 조건을 조직했다. 동원과 테러만으로 그들의 분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소련 인민 사이에서 스스로 생겨난 노력들이 국가가 부과하여 이뤄내려 했던 어떤 것들보다도 더 적절하고 강했음이 틀림없다. 소련 인민의 자생적인 노력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소비에트 국가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두들기던 1941년 그 순간에 포화에 녹아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의 귀결은 씁쓸한 것이었다. 모순적이게도 자신들을 억압해오던 체제를 최대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억압적 성격을 전혀 바꿔내지 못한 채로. 소련 인민 위에 군림하던 운명은 그 가혹함을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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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처럼 일한다는 것 - 위기에서 빛나는 스티브 잡스의 생존본능
리앤더 카니 지음, 박아람.안진환 옮김 / 북섬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스티브 잡스가 죽고 이를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처음으로 스티브 잡스에 대한 흥미가 일어, 도서관에 갔다가 눈에 보이는 거 아무거나 집어온 책이 『잡스처럼 일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책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무협지를 읽는 정도의 집중력이면 적당한 책이다. 누가 극찬했다던 지 어디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표지의, 얄팍한 일반화로 도출되고 분류된 몇 개의 교훈들이 각각의 장들을 이끌고, 일화와 인터뷰가 주를 이루며, 찬양으로 도배된 그런 책들 말이다.
 
  그래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유익한 지식들도 있었다. 잡스가 어떤 이유들로 찬양받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잡스는 불황에 빠졌던 IT업계를 향후 30년은 먹여 살려줄 ‘디지털 라이프’ 시장을 개척했으며 이 새로운 시장에서 기업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사용자 경험의 최우선’, ‘하드웨어-소프트웨어-서비스 통합’, ‘일관 제품군’ 등의 개념들을 통해 보여주었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조직을 장악하고 혁신을 이끌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디자인에 대한 잡스의 접근법이었다.
 
  “디자인은 참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디자인이 외관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사실 작동 방식을 의미하지요. 맥의 디자인은 단순히 외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외관을 의미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작동 방식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적절하게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애기입니다. 무언가를 그냥 꿀꺽 삼키지 않고 철저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열정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요.”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잡스에게 디자인은 (신)기술을 제품으로 전환시키는 과정 그 자체였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제품으로 구현되기 이전의 기술은 전문가만의 영역에 속하며, 일반 소비자에게는 그 복잡성으로 인해 사용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을 소비자가 사용할 수 있는 단순한 형태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외관의 문제를 넘어서며, 사용자가 제품의 작동원리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동작시키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잡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탁월했다.
 
  이전에는 전문가들이 직접 부품을 조립해 사용해오던 컴퓨터가 플러그만 꽂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완제품의 형태로 처음으로 시장에 등장한 게 애플Ⅱ였고, 초소형 하드디스크와 디지털음원 재생기술은 이미 존재해왔지만 비로소 CD플레이어보다 쓸 만한 간편한 휴대용 음악재생기로 변환시킨 게 아이팟이었다. 또한 매킨토시가 최초로 구현했던 GUI 역시 복잡한 명령어를 직접 입력하는 수고 대신 작고 귀여운 아이콘들을 마우스로 클릭하는 것으로 대신하여 사용자 이용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잡스식 디자인의 한 사례다. 즉 디자인은 외관 더하기 인터페이스인 것이다. 그런데 잡스가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은 외관과 인터페이스를 통일적인 것으로 다룬 점이다. 모니터와 본체를 일체화시킨 매킨토시의 디자인은 모니터와 본체를 코드로 직접 연결해야 하는 사용자 수고를 덜고 플러그 앤 플레이라는 애플Ⅱ의 정신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잡스의 디자인 정신은 애플의 독특한 경영방식으로 확대 적용되는데 철저하게 사용자 경험을 중시하여 소비자가 애플의 제품을 쉽고 편안하게 사용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요소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사실 잡스의 디자인관이 얼마나 훌륭한 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디자인관이 확인해주는 다른 사실은 잡스가 헨리 포드에 견줄 수 있는 탁월한 제품기획자였다는 점이다. (헨리 포드는 잡스가 존경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IT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잡스는 이를 대중적인 제품과 돈으로 바꿔내는 데에 탁월했던 것이다. 마치 헨리 포드가 혁신적인 T형 자동차로 떼돈을 벌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점은 헨리 포드와 스티브 잡스의 차이점이다. 포드가 자동차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에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과 생산성연동임금제라는 노동과정 상의 혁신이 필요했고, 이러한 혁신을 최초로 확립시킨 포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단순반복노동으로 악명 높은 포드주의라는 새로운 생산규범을 후대에 남겼다. 반면에 우리는 다행이라고 할지 잡스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낼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 그렇다고 IT산업의 번창에 생산과정 상의 혁신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애플이 제품 제조를 폭스콘에 통째로 하청 주었듯이 현대 IT산업 번영의 이면에는 ‘생산의 세계화’가 존재한다. 후발공업화지역의 값싼 인력과 병영식 공장 없이는 첨단기술이 값싼 IT제품으로 손쉽게 둔갑해왔을 리가 만무하다.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 대해서 보도했던 대부분의 언론에 이질감을 느꼈던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언론은 애플의 혁신적 제품에서 잡스 개인의 창의력만을 보려 하고 그가 이룬 성공의 정당성을 발견하지만, 우리는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안다.
 
  “누가 일곱문을 가진 도시 테베를 건설하였는가?” -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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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 교수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서점가 1위 자리를 휩쓸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일으킨 지각변동이 서점가로도 퍼져가고 있는 셈이다. 장하준이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2008년 금융위기의 재앙은 “결국 따지고 보면 1980년대부터 세계를 지배해 온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그 원인이 있다.” 또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유시장 정책은 금융위기 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 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과 불안정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이제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자본주의를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만들 방법이 있음을 보여 준다.”

자유시장 이념에 대한 장하준의 23가지 비판 중 첫째가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것이다. “오늘날 시장 바깥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은 시장과정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시장에서 제외되었다. 인간을 비롯해 공직, 판결, 투표권, 대학입학 자격, 무허가 약품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즉 시장은 시장참여자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며, 이 규칙과 한계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 또는 역사적으로 형성돼온 사회규범(인권, 보통선거권, 공정성, 건강권 등)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개입이 거의 언제나 시장의 효율적인 자원배분 기능을 왜곡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실상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신자유주의의 거짓과 기만을 알아채게 돕는 데에 굉장히 유용하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대안적 논리와 역사적 경험, 실증자료, 재치있는 비유를 통해 저변에서부터 무너뜨려간다. 그리고 그의 문체는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하다. 장하준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위협적인 신자유주의 저격수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장하준에게는 시장경제의 심장에까지 펜을 겨눌 배짱은 없는 것 같다. 장하준은 윈스턴 처칠의 명언인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정치제도를 제외한다면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제도이다.”를 언급하며,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문제는 다른 모든 시스템이 더 나쁘다는 것이지만.”이라고 말한다. 장하준은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믿는다.”라고 하지만,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제까지 가장 나았던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인류가 앞으로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반문해왔다. 물론 이러한 반문에 대해 장하준 같은 이들은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고 그 가치를 격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하준과 우리의 이상주의 사이의 거리만큼 장하준의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실제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하준이 시장주의자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점 하나는 “20세기에는 특히 기업가 정신을 구현하려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 공동체 차원에서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경제발전의 사회적 성격을 정당하게 지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쌓고 있는 막대한 부와 권력은 자본의 소유를 통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점이 장하준은 말하지 않지만 역사상 자본주의 비판가들이 말해왔던 자본주의적 ‘착취’이다. 자본주의 비판가들은 이러한 착취가 어떻게 경제발전이 가져다준 인간성의 전면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억압하는지를 말해왔다. 또한 이들은 단지 소수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자신들의 집단적 노력의 성과를 고루 전유할 수 있는 사회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인간해방의 이상주의가 헛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약진과 복지국가의 건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회주의 운동이 서구민주주의와 복지국가 발전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인정한 책은 넘친다). 실은 장하준 자신도 반자본주의 운동 가운데서 제기된 아이디어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를 그나마 더 낳게 만들어온 동력은 ‘착취 없는 사회’라는 이상과 정의에 대한 많은 이들의 헌신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필요로 하는 정치경제학자가 되기에 장하준은 보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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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은 진정 마르크스 경제학자인가?

 

내수경제가 대안이다?

 

12월 27일자 한겨레에 실린 책 소개 기사를 보니, 지승호 전문 인터뷰어가 김수행 교수를 인터뷰해 책으로 만든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에서, 김수행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나?
“내수 중심의 경제를 한번쯤 해 보라는 겁니다.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하다 보면 세계경제가 어려워 수출이 잘 안 되면 금방 타격을 입잖아요. 내수시장을 키운다는 것은 사실은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과 같아요.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해서 서로 나눠 가지는 식으로 정책을 바꾸면 내수시장이 확 커진다구요. … 이를 통해 수출산업이 아니라 내수에 기반을 둔 산업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구요.”
“양극화 해소→내수기반 확충→경제의 안정적 성장→인권유린과 증오 해소→사회적 타협의 확대로 나가는 것이 유럽 선진국들이 걸어온 길”이라는 그의 생각은 “자신들의 수익률을 유지하고 올리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줄이고 노동자에게 양보를 강요해 점점 더 야만적인 사회를 만들어 온” 미국·영국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간 스웨덴 모델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와 시민의 역할이 커지는 “계획참여 경제나 계획참여 자본주의”다. (한겨레 기사 인용)

 

내수경제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현재 한국의 경제문제가 수출의 비중이 커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취약해서라든가, 총수요의 부족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대한 취약성도 결국 (수출수요의 감소로) 총수요를 부족하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니, 김수행 교수의 “내수경제가 대안”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한국경제의 위기는 총수요의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총수요의 부족이 원인’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인가?

 

총수요의 부족은 초과공급된 상품의 판매를 어렵게 해, 결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생산규모를 축소시키게 하고, 잉여노동력을 방출시키게 해 실업을 늘린다. 이는 연쇄적으로 초과공급자에게 원자재, 중간재 등을 판매하던 자본가의 판로를 제한시키고, 또한 실업의 증가로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감소함으로써 총수요의 추가적인 위축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총수요의 위축에 따라 경기전망이 악화되면서 자본가들에 있어 투자는 불안정하고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투자수요는 더욱 위축된다. 그리고 실업의 증가와 경기전망의 악화에 면한 소비자들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처해 지갑을 닫게 된다. 이러한 나선형적 경기하강을 통해 경제는 더욱 어두운 터널로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케인즈주의자들의 공황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고, 따라서 케인즈주의자들은 총수요가 위축되는 초기 국면에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해, 추가적인 수요위축을 막고 경기를 부양시킴으로써, 다시 자본가의 금고와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해 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총수요는 왜 갑자기 부족해지는 것일까? 케인즈주의자들은 대개 유동선 선호나 투기에 따른 활황과 그 붕괴, 이를 가능케 한 금융의 과대성장 등을 주요이유로 뽑는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공황의 원인을 자본의 운동 그 자체에서 찾는다.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의 지배적인 동인은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이다.

 

가치를 증식하려는 자본의 축적이 착취의 형태(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와 이에 따른 새로운 생산기술의 도입과 노동과정의 변형, 그리고 산업순환과 산업예비군의 양산(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내적 모순의 발현(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등을 결정한다.

 

따라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당연히 공황같은 경제현상의 분석을 총수요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김수행 교수의 언급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라는 스스로의 언명과 달리 오히려 케인즈주의자 같다.

 

물론 이 말이 케인즈주의적 분석은 무조건 옳지 않다는 도그마적 선언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라는 것이다.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는 책 제목과 달리 실제 내용은 케인즈주의적 대안이라니, 얼마나 요상한가? <케인즈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고 책 제목을 고쳐 짓는 것이 양심적이다.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장기불황의 원인 :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

 

김수행 교수가 얼마나 마르크스 경제학자답지 않은지에 대해서 다른 사례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민중의 소리 12월 22일자인, “죽은 산업생산이 경제 전체를 끌어내리고 있다” 라는 제목의 김수행 교수 인터뷰 기사이다. 일부를 다소 길지만 인용하겠다.  

 

“내가 볼 때는 단순히 금융부분에서의 위기가 온 게 아니고 경제체제 전체로서의 위기가 왔다. 금융을 살리려 해도, 이자율을 낮추더라도 경제가 안 살아나서 아래로 빠진 것이다.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
- 산업생산이 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서 복지국가가 매우 잘 확립이 돼 있었고 노동계급의 힘이 굉장히 컸다. 모두가 나누면서 더불어서 산다는 개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다고 신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1980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이 대표적이다.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이면 자본주의가 더 발달한다고 봤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조했다. 이렇게 해버리면 금방 나오는 것이 국내시장이 확 좁아지는 것이다.
실제로 누진세에 의해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고 병원이나 학교나 실업수당이나 저소득에 대한 보조나 이런 게 굉장히 늘어난다. 이게 사실 국내수요를 만들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안되니 선진국의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 물건이 안 팔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화 전략이 나왔다. 선진국 정부가 무역자유화, 외환자유화 얘기가 그래서 나온거다. 산업생산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산업이 확대됐다. 97년 한국공황이 왔을 때 당장 우리 주식시장을 다 잡고 부를 빼가는 식으로 했다. 금융활동, 주식 채권 외환을 사고팔아 이윤을 보는 것, 파생으로 이윤 보는 것, 소비금융은 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주머니 돈을 훑어내는 사기적인 것이다. 금융은 실제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금융부분의 이윤은 생산은 없고 전부 주머니를 터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들은 산업기업이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R&D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당을 내놔라, 주가를 올려라 해서 이익을 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경영진에게 스톡옵션을 주고, 노동유연화 시키고, 나중에 가서는 회계조작해서 단기순이익을 올려 기업이 많이 망하게 했다. 산업 육성이 안됐다. 그러니 아무리 금융에 돈을 줘도 안 올라가는 것이다.”

 

김수행 교수는 현재 세계대공황의 진원지를 금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도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며, 1974-75년 공황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이 겪고 있는 장기불황(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 비교한 연간 성장률의 하강을 의미한다)이 대공황 분석의 핵심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리로 굳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의 마르크스주의자다운 면모는 딱 여기까지이다. 이어서 김수행 교수는 세계대공황의 원인을 아래같이 두 가지로 말하는데, 이는 진보적일지는 몰라도 마르크스주의적이지는 않다.  

 

① 신자유주의(“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요했다”)에 의한 소비위축
(*김수행 교수는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라고 표현하는데, 사회보장제도나 노동운동은 소비수요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투자수요까지 포괄하는 시장이라는 용어보다는, ‘소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김수행 교수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적절한 듯하다.)

 

② 주주가치 극대화(주주이익 우선)에 따른 기업의 단기이익 극대화 추구
(*위 인용문 중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 산업 육성이 안 됐다” 부문 참조) 

 

위 설명방식은 분명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①은 복지확대 및 노동운동 강화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역할 할 수 있고, ②도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역사회, 소비자 등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기업경영에 관계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설명방식은 한국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자주 주장된다. 특히 ②의 주장은 금융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대안연대회의 등에 의해 빈번히 소개됐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도 (부분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분석들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케인즈주의자, 제도학파 등에 의해서 주로 주장된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흥행했던 장하준 교수의 시각도 김수행 교수의 설명방식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리고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가 장기불황의 원인이라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라는 소리인데, 과연 그러할까?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가 될 수 없는 이유

 

주주가치를 제한하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경제위기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주주가치 극대화를 쫓는 영미식 모델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경영이 소유로부터 더 독립적인 독일·일본 모델도 동시적인 공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 


그리고 소비팽창이라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답이 될 수 없는 것도, 우리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이미 실패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인위적인 소비진작정책은 줄곧 짧은 붐을 낳고는 거품붕괴에 직면했다.  

 

이에 대해 김수행 교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소비진작정책은 구조적인 양극화라는 부실한 기반 위에서 집행되었기 때문에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고 답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복지확대와 고용안정, 임금팽창이라는 총수요 확대정책은 견실한 기반으로 작용하여, 경제가 다시 견조한 성장과 안정이라는 레일 위를 달리도록 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 같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적하는, 양극화를 유발한 복지축소, 노동유연화, 임금억압은 그 자체로 자본을 살리고, 경제를 팽창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조치로부터 자본이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부를 직접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 이전시키는 약탈이었고, 이로부터 자본은 당연히 이익을 누렸다. 그런데 왜 세계자본주의는 장기불황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반노동 정책은 개별적인 자본에게는 이익일지 몰라도, 경제 전체적으로는 총수요를 위축시켜 불황을 장기화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은 극도의 어리석음이다. 이 말이 참이라면 이제까지의 자본주의는 어떠한 공황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황기에는 의례 실업의 증가와 임금감소 등 소비위축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본은 공황기의 조건으로부터 착취율을 높이고 이윤율을 개선하여, 다시 힘찬 축적을 위한 조건을 확보한다. 자본의 축적이 재개되면 새로운 공장이 세워지고, 고용이 창출된다. 개별적인 자본의 수익성 개선과 이에 힘입은 축적의 재개는, 사회 전체적으로 투자수요와 증대와 이에 의한 부가적인 소비수요의 증대를 가져와 경제 전체를 회생시키는 것이다. 공황은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극복돼 왔다(물론 이 말이 1950년 이후의 케인즈주의적 공황극복책이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착취적인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노동 공세로도 극복이 안 되는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정책도, 인위적인 수요진작책정책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1974-75년 공황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점의 극복 없이,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양극화 해소를 통한 총수요 부양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김수행 교수가 제안하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들은 전부 자본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것들이다. 자본의 수익성이 악화되면 당연히 자본가의 투자능력과 의지도 좁아진다. 따라서 경제는 투자수요 위축에 직면해 하강하게 된다. 이러한 하강경향을 어떻게 조정할 것(가령 개별자본의 이윤에 대한 조세 수취 강화와 이에 기반한 사회적 투자 등)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총수요 부양만 말하는 것은 경제학 초짜나 저지를 실수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세계자본주의를 늪에 빠트리고 있는 구조적 문제란 무엇인가?

 


장기불황의 원인은 자본의 과잉축적에서 구해져야 한다

 

과잉자본이란 모든 자본이 가치증식하기에는 서로가 장애가 되는, 모든 자본이 안정적으로 축적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본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과잉자본은 자본이 순환하는 과정(화폐-생산수단/노동력-생산-상품-화폐′)에서 취하는 화폐, 설비, 노동력, 상품 등의 형태에 따라, 투자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과잉화폐, 가동률 저하를 겪는 과잉설비,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과잉노동력, 창고에 진열대에 가득 쌓이는 과잉상품 등의 다양한 형태로서 존재한다. 

 

과잉자본의 상태에서는 기존에 자본으로 하여금 활발한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였던 이윤율이 저하한다. 기존의 적절한 수준의 이윤율이 유지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상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상품판매를 위해 가격인하에 경쟁적으로 나서야 하며, 또는 비용압박에 직면해서도 쉽사리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그대로 이윤의 감소를 감수해야 되는 상황에 처한다. 과잉자본과 과잉생산은 짝패이며, 이는 자본에게 있어 이윤율 저하로 드러난다.

 

과잉자본 하에서의 이윤율 저하는 우선 생산성이 낮고, 높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자본을 먼저 압박해 도산의 위기에 처하게 한다. 그리고 과잉생산, 과잉설비의 상황에서 자본은 새로운 기계의 도입, 공장건설 등에 거의 나서지 못하게 된다. 설비투자는 점점 모험적이 것이 되고, 따라서 자본가의 실제 투자능력보다도 못 미치는 산업에서의 과소투자가 발생한다. 이윤 중 더 많은 부분이 새로운 노동력과 설비의 구매에 투하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금융에 투하된다. 즉 배당과 이자를 낳는 주식과 채권의 구매,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이는 자산, 상품의 투기에 화폐가 몰려든다. 산업에서의 과소투자와 맞물러 금융이 과대성장한다.

 

경쟁의 격화로 자본의 폐기 혹은 이윤을 낳지 못하는 부문에서의 자본철수가 본격화되면 이에 따라 과잉자본에 고용돼있던 노동력도 방출되고, 산업순환은 침체에 빠진다.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생산영역에서의 침체는 곧바로 금융부문에서의 위기로 전염된다. 제한된 이윤획득의 기회에 비해서 너무나 많이 몰린 투기자금이 만들어낸 거품은 폭발하고, 금융공황이 발생한다. 금융공황은 신용을 위축시키며, 채무와 신용으로 기계를 돌리던 자본가들을 파멸로 몰아간다. 따라서 산업부문도 공황에 빠진다. (*이는 공황이 일어나는 여러 과정들 중의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런데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위에서 묘사한 과잉자본의 상태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과잉자본의 상태는 특히 자동차산업의 과잉설비에서 잘 드러난다. 1980년대부터 과잉설비의 문제점을 노출한 세계자동차산업의 과잉생산능력(생산능력-생산대수)은 1990년에는 1,300만대 수준이었고, 2001년에는 2,300만대 수준까지 증가했다. 09년에는 과잉생산능력이 2,900만대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과잉생산능력의 존재로 자동차산업의 가동률은 60~70%대(정상수준 80%)에 머물러왔고, 이는 유휴설비에 투자된 자본의 현금화, 즉 자본의 순환을 지연·단절시킴으로써 자동차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켜왔다.

 

김수행 교수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과잉생산, 과잉자본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바로 자본의 축적과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의 발현임을, 즉 자본의 축적 자체가 위기와 공황의 이유임을 말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이란 종자돈을 불리듯이 자본이 자신의 덩치를 불려가는 것을 말하고, 과잉축적은 과잉자본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본축적의 상태를 의미한다.) 과잉축적론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설명이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과잉축적에 대한 이해는 왜 자본 자신이 자기 자신의 한계인 점과, 자본주의 모순의 필연적인 발현에 대해서 인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극복으로 모아질 수 있게 해준다. 

 

 

과잉축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나 과잉축적론이 경제위기에 대한 설명에 있어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위기가 드러나는 현상이지, 원인 그 자체는 아니다. 과잉자본과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을 낳는 것이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인데, 왜 자본축적이 과잉축적으로 돌진하게 되는지는 언제나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가령 세계자동차산업에서 지속적으로 과잉생산능력이 증대해온 것은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들이 수요가 늘어나는 지역시장(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설비를 증설(특히 현지공장 건설)해왔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과잉설비에는 한국이 한 몫을 톡톡히 담당했는데, 과잉중복투자의 전형이었던 삼성자동차나, 지금 위기의 와중에도 체코와 러시아에 신규공장을 건설 중인 현대차의 공격적인 경영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현실의 경쟁은 자본을 과잉축적으로 내몬다. 이 과정에서 경영자의 공격적 성향이나 잘못된 판단은 과잉축적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동차산업에서 과잉설비의 또 하나의 이유는 자동차산업이 고용, 생산 및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전후방 연관효과가 커서 경제위축을 우려한 국가의 개입으로 낡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설비의 폐기가 지연돼왔기 때문이다(이번의 GM 구제금융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경제에서 자동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른 정부개입과 세계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이 과잉설비를 구조화시킨 것이다. 

 

세계제조업 전체 수준에서의 과잉설비에 대해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로버트 브레너는 미국·일본·유럽 간의 국제적 경쟁 격화를 지적하며, 그 이유들 중 하나로 경쟁자의 신설비 도입에 직면해 이윤율 저하를 겪는 자본가들이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고정자본의 폐기 대신, (어차피 고정자본은 매몰비용이기 때문에) 유동자본 대비 평균이윤율만 얻을 수 있다면 해당분야에 잔류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든다. 즉 자본으로 기능하기 위한 최소자본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자본의 청산과 이동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생산영역의 모순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은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과 이윤율 저하에 대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과잉축적이나 이윤율 저하 추세의  핵심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정리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점이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장기불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김수행 교수의 이율배반적인 결함은 어떻게 설명돼야 하나?

 

김수행 교수가 여러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것은, 그의 이론적 활동에서의 성실함에 비교하면 상당히 의외이다. 김수행 교수가 한국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뛰어난 학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이율배반적 결함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그런데 이의 설명에서 김수행 교수의 개인적인 특성을 이유로 드는 것은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할 것이다.  

 

김수행 교수의 공황론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을 공황론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이해는 벤 파인과 로렌스 해리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파인과 해리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경험적 예측이 아니라, 이윤율 추이에 대한 모순되는 두 경향(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과 이를 상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며, 실제의 이윤율 추이는 모순되는 경향들의 힘과 배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해석이 근본주의자들의 것인데, 근본주의자들은 상쇄경향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때문에 이윤율은 저하하기 마련이며, 현실에서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관철된다고 본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주기적 공황의 설명에 직접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에 반하여 김성구 교수 등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자본주의의 장기 추세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은 이론적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단적으로 파인과 해리스는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에 대해서 의미있는 연구서를 낸 적이 없다. 그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이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엄밀하더라도, 실제의 경제분석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도움을 거의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매번의 공황을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야기하는 모순들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즉 모순되는 두 경향을 계량화하기도 힘들뿐더러, 사실 두 경향은 장기적인 과정과 시기를 통해 관철되는 것인데, 대략 십년주기의 공황을 매번 이러한 힘들의 변화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황의 설명에 직적 적용하는 해석방식으로는 20~30년에 걸친 장기불황과 같은 장기추세의 설명에 있어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 적용의 어려움이 현실의 분석에 있어 김수행 교수를 무능하게 하고, 따라서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들을 차용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만약 우리가 김수행 교수의 이론활동에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김수행 교수가 의존하고 있는 이론틀(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고유한 해석)을 교체하거나, 혁신해내는 것일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라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자의든 타의든) 권위자를 자처하며, 장기불황의 원인과 대안에 대해 신자유주의니 내수경제니 운운하는 것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바로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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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한 한 TV토론회에서 어느 대학 교수가 정부쪽 토론자로 나와 협상의 정당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을 보고, 화가 치민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여당 의원도 나왔었는데, 여당 의원도 인정하는 문제점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쌓아온 지식을 내세우며 협상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모습을 보고, ‘종’이 ‘주인’보다 더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어용 지식인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지만, 정말 화가 나는 것은 학자적 양심을 지키는 것보다 권력의 눈에 들기를 욕망하는 지식인이 요즘은 차고 넘친다는 점이다.


영혼이 없는 지식인의 정치 참여

  지난 대선과 총선을 전후해 ‘폴리페서’(정치 참여 교수)라는 말이 유행했다. 선거철만 돌아오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대학교수, 낙선해도 대학에 쉽게 돌아오는 교수 등의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명막 정부 출범 때 16명의 국무위원 후보 가운데 7명이 대학 교수 출신이었고, 4월 총선에서는 42명의 대학 교수 출신이 출마해 19명이 당선됐다(전국구 포함). 그리고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뒤 학교로 돌아오려 했던 한 서울대 교수가 논란이 되었고, 급기야 서울대 교수 81명이 ‘폴리페서 윤리규정’ 건의문을 대학에 제출했다. 교수직을 정치권을 맴돌다가 끈 떨어지면 돌아올 둥지 정도로 여기는 뻔뻔한 교수들에 대한 제재는 당연하겠다.

  그런데 대학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의 정치, 공직 참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정치, 공직 참여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 참여 과정이 지식인의 철학과 신념의 실천 과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스스로를 정치권의 장식과 도구로 전락시키며, 입신 영달하는 과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이다.

  “한승수 현 국무총리. 그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8월 상공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며 정권과 연을 맺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던 때였다. 한 국무총리는 1988년 5월 민정당 공천을 받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89년 12월 제34대 상공부 장관에 취임했다. 노태우 정권 때다. 문민정부로 분류되는 김영삼 정권 때는 제15대 주미 대사, 제18대 대통령 비서실장, 제3대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지냈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0년 무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다음해인 2001년에는 최초의 민주정부라 일컬어지는 김대중 정권에서도 외교통상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한 국무총리는 2002년 10월 다시 한나라당에 입당, 16대 국회의원직을 마쳤다. ‘전두환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까지’ 주요 임명, 선출직 공직을 두루 거쳤다. 현재 국무총리 자리까지 포함하면 여섯 개 정권에 걸쳐 있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1쪽)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의 조사에 따르면 역대 정부의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중 63명(34.6%)이 한승수 현 국민총리처럼 군사정부(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 이어 문민정부(김영상,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공직을 맡았다고 한다. “이 조사는 지식인의 정권 참여가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정부에 참여하는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 소신과 무관하게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정부에 자신의 지식을 파는 ‘지식 상인형’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같은 책, 95쪽)


지식인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폴리페서 문제를 비롯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이 책은 2007년 4월부터 7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같은 제목의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기획 시리즈 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기획 시리즈는 민주화 20년을 맞은 2007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은 어떤 존재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이를 소재로 17회에 걸쳐 연재된 것이었다. 이 기획기사에 대한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자.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그 양과 질에서 우리 언론 사상 최초로 시도한 지식인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다. 팀장과 세 명의 기자가 악전고투 끝에 만든 지식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자 변론문이다. 연재 기간 동안 지식사회를 긴장시킨 지식인 건강진단서다.” (같은 책, 6쪽)

  이러한 평가가 결코 자족적인 것이 아닌 것이, 이 기획기사는 2007년 7월에 한국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부문’에 선정됐고, 이어 11월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 매스컴위원회의 ‘올해의 가톨릭 매스컴상 신문 부문’에 뽑혔다. 그리고 2008년 1월에 ‘제39회 한국기자상 기획 보도 부문 수상작’으로도 선정됐다. 이는 내용의 시의성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지식인들과 인터뷰하며 문제의식을 다듬고, ‘지식인 지도’와 ‘문민, 군사 정권 넘나든 장차관 분석’, ‘지식인 설문’, ‘해외 박사 분석’ 등의 실증자료들을 직접 만든 특별취재팀의 쉽지 않은 노력에 힘입은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이번에는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지식인의 죽음

  책의 서문은 한국의 지식인처럼 명예와 돈과 권력을 모두 갖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지식인은 흔히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담론에 참여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자로 정의된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은 그 이상이다. 교수로 좀 이름이 나면 쉽게 장관, 총리의 고위 공직을 차지한다. 이러한 한국의 습속은 유별나다. 미국에도 교수 출신 장관이 있지만, 교수에서 바로 장관이 되지는 않는다. 과장급으로 가서 경력을 쌓은 뒤 대학으로 돌아갔다가 그 다음 국장급 자리를 맡는 식이다. 교수라도 공직자로서의 경력을 축적해야만 고위직을 맡을 수 있다. 또한 언론에서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교수들을 찾는다.

  “그렇다면 이 땅의 지식인은 자신들에게 이런 가치를 부여한 사회에 응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책이 출발점으로 삼은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책은 바로 지식인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를 들어보자.

  “민주화 20년이 넘었다. 군사정권은 타도되었다. 누구에게나 분명했던 악과 싸우는 시대가 끝난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으로 진영 대결이 종언을 고했다. 선과 악의 선명한 이분법적 전선이 사라졌다. 이제 사회는 외세에 억눌린 민족을 구원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이끄는 안내자, 민중의 해방의 선도자이자 민중 이익의 수호자, 위대한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서의 지식인을 원하지도 않고 그들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다. 저항적 지식인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것이 지식인의 첫 번째 죽음이다.

  지식인의 두 번째 죽음은 그 첫 번째 죽음의 결과다. 지식인은 더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지식인은 민주화 과정을 통해 이미 공공하게 구축된 지배 질서를 전복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지식인은 이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보루가 되었다.” (같은 책, 11쪽)

  지식인의 저항적-사회비판적 역할 방기가 곧 지식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이제 사회에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독립된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기득권을 향유하는 특권 계급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정치권력, 경제권력의 품 안으로 안겨가 권력의 전위대, 선동가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지식인에게 여전히 저항적-사회비판적 역할을 기대하고, 이에 근거해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유물이지 않을까? 책은 아니라고 말한다. 민주화 20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성장지상주의, 시장주의, 미국이며, 따라서 이러한 획일적 가치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여전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상이었던 ‘저항적 지식인’이 우리 시대 지식인의 표상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고 말한다. “민주화 20년을 마감하고, 신보수주의 시대가 꽃을 피는 이 시점에 저항과 부정만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대안 체제의 구축”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인들은 대항 헤게모니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책의 문제의식이 도달한 결론이다. 즉 책은 지식인의 권력지향적 행태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 지식인에게 다시 시대의 갈등과 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돈에 신념을 파는 지식인

  책의 주요한 문제의식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책은 본문에서 기자다운 실증적 분석과 지식인 자신의 고백적 담론들(기고글)에 근거해 지식인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의 세부적인 항목들을 작성하고 있다.

  본문은 10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부터 3장까지는 총론 격으로 민주화 20년 동안의 지식인의 풍경과 위기를 말한다. 올해 초 퇴임한 김수행 서울대 교수의 ‘현대마르크스경제학’ 수업 풍경을 20년 전과 비교한 프롤로그에서 시작해, 주요 지식인 104명을 좌,우축과 민족,탈민족축으로 된 좌표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지식인 지도’와 진보,보수,중도 지식인 74명에게 ‘지식인의 위기’에 대한 생각,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과 저술 등을 설문한 결과도 실었다.

  4장부터 10장은 각론으로 분야별로 지식인이 처한 위기를 진단한다. 정치권력과 지식인, 경제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과 지식인 등 사회권력과 손을 잡은 지식인의 모습이 충격적이다. 미국 박사가 지배하는 한국 대학사회의 문제점과 공룡화된 학술 진흥재단의 학문지원 시스템이 어떻게 지식인들의 활동을 압살하고 있는지도 점검했다.

  특히 정치권력과 지식인 사이의 잘못된 관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폭로된 재벌과 지식인 사이의 ‘유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고발은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재벌이 어떻게 지식인 사회를 식민화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기업 자문 교수들의 임무는 ‘건강한 기업 활동’을 위한 ‘자문’에 응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업 측에 비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됐을 때 우호적인 언론 칼럼을 쓴다든지, 자신의 학회나 학교 인맥을 이용해 기업에 필요한 우군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지식인 출신 사외 이사들의 역할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또한 한 대학교수의 “요즘 교수들 중에 돈 3천만 원만 준다고 하면 기업 측에서 원하는 그대로 결론을 내 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자조는 암울하다.


“한국 지식사회학의 역사에 우뚝 설 대작이요, 쾌거”

  책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탐구 대상이 대학교수에 집중되는 바람에 지식인 범위가 상당히 한정되면서, 지식인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다. 특히 ‘시간강사’로 불리는 비정규직 교수 문제, 박사 출신 실업자 문제를 고려하면,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지식인이란 전체 지식인 사회의 상층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 사회의 양극화에 대한 분석과 함께, 교수직이 연줄에 따라 폐쇄적으로 배분되는 대학구조가 지식인 사회를 어떻게 불구화시키는지에 대한 분석이 빠진 점도 아쉽다.

  그렇지만 이런 아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강준만 교수의 평에 따르면 “한국 지식사회학의 역사에 우뚝 설 대작이요, 쾌거다.” 미비점을 보완한 ‘속편’을 기대한다. (*한편 강준만 교수는 책이 다음 기회에 보완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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