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은 더 이상 기마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지 않는다. 여왕의 안위를 책임지는건, 매끈한 방탄 리무진과 총을 가슴에 품은 경호원들. 그렇다면, 번쩍이는 투구와 붉은 망토를 걸친 당신들은 이 자리에 왜 서있는 것일까.

광화문 일대를 돌아다니다보면 수문장 교체식의 근엄한 얼굴의 장수가 어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투구를 벗은 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맞닥뜨린다. 가짜 수염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아직 여드름 자국도 남은 어린 청년이다. 왕이 사라진 시대, 지킬 왕이 없는 수문장 따위가 실재할 리는 없다. 그렇게 한 번 벗겨진 가면은 다시 복원되지 않는다. 그 후로 수문장 교체식을 볼 때면, 나는 근엄한 수문장 대신 또 다른 어느 어린 청년의 얼굴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그 무뚝뚝하게 굳은 얼굴로, 친구들과 술 한 잔 할 생각을 하는지, 혹은 애인에게 사 줄 선물 생각을 하는지.

사진의 근위병들도 마찬가지일게다. 이제는 형식만 남은 보여주기 행사. 근위병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미끄러져, 그저 관광객들의 사진 속 피사체로만 남아버린 존재를 '연기하는' 당신들. 당신도 머리 속에 여왕은 간데 없고, 데이케어에 맡긴 아이 생각을 하고 있겠지. 관광객들도 당신들이 진짜 근위병이라 믿지는 않을거다. 그렇다면, 이 짜고치는 고스톱 같은 풍경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도, 키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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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3-21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상과 허상의 문제이군요.
본질과 포장의 문제.
버킹검 궁이 이렇게 생겼던가요?? ^^
사진 잘 보고 갑니다.

turnleft 2008-03-22 02:54   좋아요 0 | URL
버킹엄은 아니구요, 전시내각 있던 곳 근처에 있던 무슨 건물이었어요.

hnine 2008-03-22 06:30   좋아요 0 | URL
아 예~ 버킹검궁은 아닌 것 같아서 궁금해서요 ^^

turnleft 2008-03-24 13:53   좋아요 0 | URL
저도 버킹검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안나네요. 털모자 쓴 근위병들만 기억이.. ^^;

Mephistopheles 2008-03-2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저 영국근위병들 군기는 엄청 쎄다고 들었는데..^^
요즘이야 안그러겠지만 털모자 쓰고 위병 서다 딴짓하다 발각나면 사형이였던
시기도 있었다잖아요.

turnleft 2008-03-22 02:56   좋아요 0 | URL
뭐 아무래도 실제 왕가가 존재하고 그 왕가를 지키는 군대니까요. 우리나라 수문장 교대식 같은 것과 직접 비교할 바는 아니죠. ^^;

푸른신기루 2008-03-2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런던 갔을 때 근위병 교대식 보던 도중에 그냥 갔어요;;
롯데월드 에버랜드 퍼레이드보다 더 시시하다던 사람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ㅎㅎ
그래도 그저 보여주기 행사라기 보다는 나름대로의 전통 유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그냥 관광용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전 지금도 보여주기일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과거에는 왕족을 지켜줬잖아요
시대가 변했고 그들을 대체할 (더 좋은) 무언가가 생겨났다고 그것들을 내쳐버리는 건 배신행위 아닐까요
그나저나 진짜 목숨을 걸었든 보여주기든 적어도 명목상은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고 저 궁전 안에서 그들을 보곤 할 여왕이 부럽..-_-;;

turnleft 2008-03-22 03:18   좋아요 0 | URL
나름의 전통 유지고, 지금도 저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을거에요. 저도 "보여주기" 행사로 쓸모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어디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보는건지 생각해 보는거죠. 특히 관광이라는게,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 실제 "그들"과는 거리가 많으니까요. 기표가 기의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시대에 무얼 보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

푸른신기루 2008-03-22 20:33   좋아요 0 | URL
바르셀로나 민박집에서 같은 방을 쓴 어떤 분 얘기가 생각났어요
여행을 많이 하신 것 같던데 한 나라의 수도는 절대 안 가신대요
수도에는 관광객이 많아서 그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게 많다고, 그런 건 '관광'이지 '여행'이 아니래요
그 분은 그냥 기차타고 그 나라를 다니다가 좋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 역에나 내리는 등 그런 진짜 '여행'을 한다고 하시는데 부럽더라고요
프랑스에서는 여행하다가 어떤 포도농장에서 와인도 선물받고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기차에서 환상적인 노을도 보고..
저도 좀 더 배짱을 키워서 그렇게 다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ㅎㅎ

turnleft 2008-03-24 13:55   좋아요 0 | URL
수도던 어디던 얼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 가느냐의 차이겠죠. 경험이 쌓이고 여유가 생기면 신기루님도 그렇게 여행하실 수 있을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