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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바리 -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정윤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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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안녕? 네 이야기를 듣고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한동안 고민했어. 내게 네 삶은 먹먹함이라는 거대한 벽이었고, 나는 그 앞에서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지. 책을 덮은 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침묵뿐이었어. 이 시대에는 상처를 드러내고, 위로를 건네주고, 힐링을 시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이 떠들어대고, 또 그런 행동들이 이미 누구나 따라하는 유행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 하지만, 나는 감히 네게 위로를 건네지 못하겠고, 힐링을 주겠노라고 자신할 수 없었어. 서투른 위로와 거짓된 힐링은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라는 걸, 언젠가 겪었기 때문이랄까. , 정말, 정말로 나는 널 어떻게 위로할지도, 무엇을 해야 힐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난,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해. 이걸로 너를 위로하겠노라는, 그런 얄팍한 마음은 없어. 다만, 네게 말을 건네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편히 읽어주길 바래.


네 이름은 바리. 할머니가 매번 들려줬던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이지. 부모는 아들을 원했으나 끝내 딸로 태어나서 버려지게 된, 그 기구한 운명이 비슷했기에 할머니는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거야. 그래, 넌 버려졌어. 너는 물었을 테지. ‘왜 하필 내가 버려진 것일까? 내 앞의 언니들은 한 명도 버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너는 그 답을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얻지 않았을까 싶어. 언젠가 자신을 버린 부모님이 곤란해질 때가 오고, 그때에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이 얼마나 소중했던 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이야.


그러나 너는 이름이 바리일 뿐, ‘바리공주가 아니었어. 부모님은 네가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었으며, 굳이 너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래서 네가 얼마나 소중한 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너는 연탄이 아니라 고추장을 팔면서 여전히 잘 사는 부모의 집을 뒤로한 채, 널 키운 산파 할머니와 살았던 가난한 시장 한 구석으로 돌아오게 돼. 그곳에선 홍등가에서 일했던 연슬언니가 있었고, 중국에서 엄마를 만나기 위해 참께 자루에서 숨죽이며 온 나나진이 있었고, “꿀맛이야, 바리랑 함께 먹으면, 뭐든지.”라고 말하는 청하가 있었고, 언제나 읽을 책을 가게에 놔두는 토끼 할머니가 있는 곳이었지.


언제부터인가 너도 느꼈을 거야. 삶은 어렸을 적 들었던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걸. 때로는 그 괴리감이 우리를 너무도 슬프게 만들지. 그토록 당당했던 여성이었던 산파는 아기를 못 가진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이후의 삶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고, 몸을 팔아 동생들을 보살핀 연슬언니는 끝내 그 동생들에게 외면 받았고, 나나진의 친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몸을 요구했으며, 너에게 청혼했으며 아이를 함께 만들었던 청하는 무언가 꺼림칙한 사고로 죽게 되었지. 마침내 너는 토끼 할머니에게 쓸 독초와는 다른 독초”, “편안하게 죽음으로 인도하는 절차 따윈 없이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독초를 법제하려고 해. 그리고 반드시 (아마도 그 독초를 쓰기 위해) 돌아오겠노라는 너는 다짐하지.


, 그런 너에게 내가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부모님은 없었지만, 두 할머니가 있지 않았느냐고? 고백을 하고, 결혼을 했던 청하와 함께한 기억이 있지 않았느냐고? 그래도 청하의 아이가 남아있지 않느냐고? 그런 빤한 소리는 하고 싶지도 않고, 네가 듣고 싶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지독한 삶 속에서 너는 위로와 힐링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너의 지독한 삶과 마주한 우리에게 필요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억지로 쥐어 짠 위로와 힐링으로 네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단지,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 치유 될 거라 믿으면서 네 삶을 마주하게 되어 느끼는 우리들의 불편함만을 완화시켜줄 뿐이지.


청하가 세상을 떠나고, 너는 불안해했지. “, 나나진. 나 혼자 청하의 아기 잘 키울 수 있을가? 지켜줄 수 있을까?” 이때 나나진은 이렇게 대답했어. “왜 혼자야. 쌀집 할머니도 있고, 나도 있고, , 빨간 입술 싸가지 할머니도 있잖아맞아. 너는 버려진 아이였지만, 비록 그것은 어떤 행복을 위해 견뎌내야 하는 소명운명사명도 아니었지만, 혼자인 아이는 아니었어. 네가 좋다면, 나도 너와 함께 할게. 너 혼자 청하의 아이를 키우지 않게 할게. 우리, 친구하자. 나는 감히 네 삶을 위로하거나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손은 내밀 수 있어. 내 손을 잡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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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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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이 하나의 명제로 대표된다. 하나같이 살아남지못할까봐, 벌벌 떨고,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댄다. 이제는 그 모든 게 자연스러워, 자신이 공포에 잠겨있는지도 모른 채 살 정도다. 확인될 수 없는 그 지독한 공포와 의심은, 이제 살아남으려는 자에게 필수적 감정이 되었다. 그 정서를 한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다. ‘무서워하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죽는다.’


그런데 여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가 있다. 바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다. 이 동화의 이상한 결말은 우리가 굳게 믿는 명제를 혼란스럽게 한다. 동화가 막바지로 치닫는 순간, 암탉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잎싹에게 감정이입이 된 독자는, 이런 기습적인 결말에 충격을 받는다. 언제나 이 시대 이야기의 결말은 끝끝내 살아남았습니다.’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매번 확인하면서 자신 또한 끝끝내 살아남으리라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 죽었습니다.’라니?


이상한 것은 결말뿐이 아니다. 동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잎싹의 삶은 기묘하게 흘러갔다. 그 시작은 한낱, 수많은 양계장 닭 중 하나에 불과했던 닭이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고 스스로 지을 때부터였다. 햇빛과 빗물을 모아 하나의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처럼 살고 싶었던 닭은,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 지었다. 매일매일 무정란만을 낳는 양계장 닭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잎싹은 마당으로 나가고싶었다. 알을 품고싶었다. 아가를 돌보고싶었다. 그것들은 살아남는 것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가만히 양계장 안에 있으면, 언제나 똑같은 시간에 먹이가 나왔다. 먹이를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고, 천적이 올까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다. “살아남아라!” 이 명제는 말한다. ‘얌전히 양계장에서 살면서 주는 것이나 받아먹으며, 안락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 그러나, 잎싹은 끝내 양계장 밖으로 나간다. ‘밖의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서우며 끔찍한지 알려주는 엄마가, 선생이, TV가 잎싹에게는 없었다. 실로 이 시대의 진리인,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을 잎싹은 몰랐던 셈이다. 그리하여 잎싹은 살아남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양계장에서 나오고, 마당에서 쫓겨난 잎싹은 밖의 세상에서 하나의 과 조우한다. 아무도 품지 않는 알이 안타까웠던 잎싹은 그 알을 자신이 품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살아남는 것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돌봄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자신이 직접 낳은 알도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는 한 조각도 남길 수 없으며,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알이니, 자신의 노후를 보장하는 투자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런데도 알을 품을 수 있는가?


역시나, 알을 깨고 나온 것은 닭이 아니라 청둥오리였다. 차츰차츰 아가가 자라면서, 잎싹은 그 아가는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잎싹은 헤엄칠 수도, 날아갈 수도 없었다. 아가와 함께 사는 건, 잎싹이 살아남을확률을 줄이는 거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잎싹은 아가를 키워낸다. 그것도, ‘늠름한 청둥오리. 헤엄도 배우고, 나는 것도 익혔으며, 이제 자기와 같은 청둥오리들 무리에서 사는 법까지 익힌 아가는, 잎싹 곁을 떠난다. 한 마리의 성숙한 청둥오리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잎사귀의 삶을 살고 싶었었던 잎싹. 한낱 양계장 닭이었던 잎싹은 양계장을 나왔고, 알을 품었으며, 아가를 돌보았고, 잎사귀가 아름다운 꽃을 맺듯 한 마리의 늠름한 청둥오리를 길러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느라,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잊어버리곤 한다. 산다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가 끊임없이 먹이가 되어주는 것이며, 그 생의 끝에는 자신 또한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생명이라면, 누구나 이 순환의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이라면,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것은 생명의 숙명이다. 잎사귀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때가 되면 땅으로 돌아간다. 잎싹은 정말로 잎사귀처럼 살았다.


잎사귀의 삶. 그것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가는것이다. 다른 무수한 양계장 닭들과 달리, 잎싹은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 살아가는 것은, ‘으로 뛰쳐나오는 것이었고, ‘을 품는 것이었고, ‘키워낸 아가를 떠나보내는 것이었고, 그리고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 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다. 잎싹은 족제비의 아기를 보았고, 족제비의 먹이로 끝맺음한 자신의 생은 그 아기 족제비들에게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그렇게, 생명은 순환된다.


공포와 의심으로 한 치도 양계장 밖을, 마당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우리에게 잎싹의 삶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양계장과 마당 안에서는 잎싹의 삶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러다 결국, 끝이 없는 공포에 질려서 살아남는 것만 갈구하다가, 어느 순간 인생을 끝맺음당할 것이다. 밖의 세상이 무엇인지 모른 채. 알을 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먹이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그리하여 끝끝내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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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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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단어에 대한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테다. 서울에 살았든 살지 않았든, 가보았든 그러지 않았든. 누구나 ‘서울’에 대해서, 감정 섞인 기억들이 마음에 남아있다.


 그것은 욕망이란 이름의 기억일 수 있다. 아름답고, 자부심이 넘치며, 문화적이고, 럭셔리한 공간. 어쩌면 TV 광고에 나오는 환상적이고 자연적인 하나의 성(城)과 다를 바 없는 아파트의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언젠간 가야할 공간이거나, 앞으로 영영 갈 수 없는 공간이거나, 이미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욕망의 끝에 놓인 공간이라는 점에선 똑같다.


 또한 서울은 ‘가난한 과거’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점을 찍어야 하는 단어는 ‘과거’다. 세상이 팍팍할수록,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는 폭풍 리트윗 당한 것처럼 퍼져나가고, 그들은 언제나 ‘가난했던 과거’였던 ‘서울 살이’를 이야기하곤 한다. 미국에 아메리카드림이 있다면, 한국에는 서울드림이 있다. 서울드림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조미료는 ‘가난했던 과거 서울 살이’다. 참고, 참고, ‘가난한 시절’을 참으라. 그리하면 진정한 ‘서울 사람’이 될 수 있으리니. ‘성과 같은 이름을 지니며, 성처럼 높고, 성처럼 화려한 곳에서 사는 사람’ 말이다.


 이제 서울은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것은 ‘과거’에 불과해졌다. 혹시 당신이 가난하다면, 당신은 ‘서울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 ‘성공’해서 서울 사람으로 입성하던가, 아니면 ‘도태’해서 서울에서 쫓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서울은 ‘가난’을 품지 않고 ‘과거’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것은 구질구질한 것이고, 구질구질한 것이 서울 안에 있는 걸, ‘서울 사람’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뜨겁게 안녕』에서 김현진이 기억하는 서울은, 위의 기억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서문에서 “나는 기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썼다. 그녀가 기억하려고 하는 것, 그건, 21세기 서울이 지우려고 하는 기억이다. 선진화의 첨병(尖兵)인 서울에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하고, 품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 


 언젠가부터 서울은 그 구차한 기억들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뉴타운과 재개발이란 이름하에, 기억을 ‘정화’(淨化)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났다. 자신들을 지우려는 서울의 ‘단호하며,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태도 속에서 버림받은 기억들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쫓겨났다. 김현진 또한 버림받은 기억들 중 하나였으니, 그녀도 언제나 밀려나고 또 밀려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녀는, 밀려나고, 쫓겨나고, 버림받은 기억들을 낱낱이 담을 수 있었다.


 가난은 아름답지 않다. 더더욱 그것이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 놓인 가난이라면, ‘절대로’ 아름다울 수 없다. 차라리 그건, 구질구질하고, 구차하며, 강퍅하고, 황당하고, 억울하며, 무서우며, 한스럽다. 김현진도 이를 모르진 않는다. “그때 내가 그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걸었더라도, 그녀의 인생에서 달라지는 거라곤 없었겠지. 이곳은, 이웃을 생각하기엔 참 고독하고도 난해한 도시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기묘하게도, 신비하게도. 그녀가 책 속에 풀어낸 기억들은 ‘구질구질’이라는 한마디로 매도할 수 없다. 그녀는, 서울에게 버림받은 기억들 중 하나인 그녀는, 가난한 기억들 하나하나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그 기억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직업이 뭐건 나이가 몇 살이건 어떻게 생겼건 온몸에서 풀풀 풍기는 ‘살겠다, 살고야 말겠다’하는 에너지야 말로 아름다움의 정수였던 거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의 글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위로가 된다. ‘찬란한 욕망’도 아니고, ‘지나간 극복기’도 아닌, 희망이 메마른 곳에서도 끝끝내 버텨내는 ‘의지’와 같은 위로를. 


 오늘도 서울의 어느 뒷골목에선, 가난한 기억들은 밀려나고, 쫓겨나며, 깔끔하게 지워지고 있다.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은 그들을 위한 진혼곡(鎭魂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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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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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한 미래의 꿈나무 중 하나였던 나는, 드디어 청춘의 장(場)에 들어가게 되었다. 푸를 청(靑)! 그리고 봄 춘(春)! 청춘(靑春)이라는 말에는 이처럼 뭔가 샤방샤방하고 상큼할 것 같은 이미지가 담겨있다.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청춘의 장으로 들어서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과연, 샤방샤방과 상큼함을 넘어, 블링블링한 모습이 풍경으로 펼쳐졌으니! 이 시대의 청춘들은 각자 저마다의 칵테일을 한 잔 식 손에 들고는, 끝내주는 ‘스펙’ 상품의 옷을 걸치고 있었더랬다. 오, 역시 청춘은 ‘파티’란 말인가?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블링블링한 모습의 청춘들은 열심히, 죽도록, 자신이 ‘가장 끝내주는 청춘’임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건, 간택되기를 기다리는 무엇 같았다. 또한 그건, 팔리기를 기원하는 무엇 같았다. 어쩌면 그건, 떨이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무엇 같기도 했다. 결국 여긴, 파티장이 아니라, 경연장(競演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며, 가끔 아파하기도 하는(그러나 언젠간 다 나을 것이 분명했다!) 이 시대의 모범 청춘임에 분명했다. 왜냐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낼 정도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청춘이 아닌 이들’은, 항상 자신들이 청춘을 그렇게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며, 아파하면서!) 보냈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블링블링함에 정신이 아득해지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내 꼴을 보니, 놀라 자빠질 뻔 했다. 내 손은 칵테일이 아니라 냉수 한 잔을 들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스펙’제가 아닌 후줄그레뎅뎅했다. 과연, 나는 블링블링은커녕, 어둠컴컴하지도 못한, 무색무취의 유령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그 오묘한 파티장, 아니 경연장에서는 ‘너 같은 것은 청춘도 아니야!’라는 무언의 후려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는, 예선 탈락이었다. 뭔가, 죄송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작 그것밖에 못해서 예선탈락이냐!’ 라는 질책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예선 탈락한 청춘이라 죄송합니다, 라고 어딘가에 사죄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블링블링 청춘들은 자신들의 블링블링함을 쉬크함을, 간지를, 똘똘함을, 하여간 뭐든지 간에 비싸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힘껏 뽐내고 있었다. 나는 멍청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털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찾아와서 냅다 말을 건넸다.


 “자네 뻘쭘한가?”


 이상한 코스프레를 한 듯한(마르크스 코스프레라 했다. 근데, 마르크스가 누구야?) 아저씨는 내게 주절주절 말을 꺼냈다. 아저씨는 내 상태가 ‘소외’라고 말했다. (요즘에는 그걸 ‘루저’라고 부르죠.) 그리고 저 블링블링한 청춘들도 실은, ‘소외’된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루저가 아닌데요?) 아무리 ‘혼자서’ 블링블링 한다고 한들, 소외되는 것은 똑같다고 했다. 내가 냉수 한잔이 아니라 칵테일을 들고, 후줄그레댕댕 옷이 아니라 삐까뿌르리리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무색무취의 유령이 되거나, 블링블링한 상품이 되는 것 말고, 청춘의 장(場)에서 재밌게 사는 법을 쑥덕쑥덕 일러주었다. 그건, 이곳을 경연장(競演場)에서 파티장으로 바꿔버리는 마법 같은 이야기였다. 


 괴상쩍은 코스프레 아저씨의 말을 그대로 믿기엔,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뻘쭘하게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과연, 저기 또 한 명의 냉수 한 잔을 들고 있는 이가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말을 건네기로 했다. 파티는, 말을 건네는 것부터 시작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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