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한 번 듣는 이야기와 계속 듣는 이야기. 내게 김사과의 소설은 두 번째에 속한다. 첫 번째, 그러니까 한 번 듣는 이야기의 특징은 이렇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읽는 이야기, 즉 어떻게 될지 아는 순간재미없어지는 이야기. 그러나 김사과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듣는 순간이 즐거워서 듣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내게 김사과의 소설은 서사적 호기심을 채우는 무엇아니라, ‘강렬한 감정적 체험인 셈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인가? 분노. 물론 이 정제된 단어에 강렬한 감정을 우겨넣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단어가 아니라 단어에 담긴 맥락을 떠올려보자. 당신에게 강렬한 체험을 남긴 분노와 그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해보라. 바로, 그 느낌. 김사과의 소설은 내게 그렇게 체험된다’.


누군가 화가 났다. 그러면 누구나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는 왜 화가 났지? 마찬가지로, 김사과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 많은 분노는 어디서 왔는가? 그동안의 소설에서도 언뜻언뜻 분노의 기원에 대해서 서술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지만 천국에서는 아예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꺼낸다. 스물 스물 나와서 마침내 독자를 삼켜버리는 에너지, 그 강렬한 감정의 기원에 대해서. 그곳은 어딘가. 소설을 삼켜버리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곳은 어딘가. 어디긴 어딘가. 바로, 천국에서. 그렇다. 소설의 세계를 삼켜버리는 무시무시하고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기원이 불분명한 그 감정들은 천국에서나왔다.


그렇다. 이곳엔 천국이 있었고, 천국이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은 작동했다. 내일은 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내일도 천국에서 살아갈 거라는 믿음과, 어제는 천국에서 살아 왔노라는 믿음으로 세상은 유지됐다. 바로, “20세기에 대량생산된 중산층의 세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천국은 두 조각으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보이지도 않는 저 안드로메다의 차원으로 날아간 천국과 지상의 밑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천국으로 중산층의 세계는 갈라졌다. 물론, 그 중 대부분은 추락하는 천국에 속해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믿음으로 세계를 유지했던 천국이라는 허상은 틈이 벌어졌고, 그 틈새에서 이름 없고, 불길하며, 역겨운 감정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천국에서 나온 것들이었지만, 천국의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했다. 부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그 중 하나는 그 모든 것들을 본 적이 없는 양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눈 먼 사람들이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해맑은 사람들이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인지부조화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니까, 끝없이 미루기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루기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여, 다른 식으로 부인하는 방법이 나왔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더는 알 필요가 없다는 신종 부인법. 알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천국이 쪼개지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나는 떨어지는 천국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나는 틈새에서 터져 나오는 역겨운 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나는 모르는 놈들과는 다르게 알고 있다. 나는 눈 뜬 자이며, 나는 순진하지 않다. 물론, ‘알고 있다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 모든 혼란에서 벗어날 탈출구. 문은 빠르게 닫히고 있었다. 아니 문으로 뛰어갈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문은 닫혀 있는지도 몰랐다. 천국에서의 주인공 케이는 망설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문은 너무 멀리 있었고, 너무 많이 닫혀버렸다. 그러나 케이는 상상할 수가 없다. 케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케이는 체험한 적이 없었다. 문이 닫히고 난 세계에 대해서 케이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케이는 그것을 자살과도 같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내일도 천국에서 살아갈 거라고 믿는 세계 말고, 내일은 저 천국으로 들어갈 거라고 믿는 세계 말고, 세상에 천국은 없다고 믿는 세계 말이다. 그러니까, 바닥의 세계. 밑바닥의 세상. 추락하는 자신의 세계조차 배부르다고 부르는 곳. 그곳에서 케이는 언제나 같은 소리를 듣는다. ‘넌 우리와 달라.’ 결국, 케이는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세계가 달랐던남자친구 지원에게 이별을 통보 받고, 세상 경험 풍부하며 지혜로워 보였던 386 아저씨에게 조언을 구한다. 한 때 영롱했던, 그러나 언젠가부터 망가져버린 386 아저씨의 대답은 이랬다. ‘넌 그들과 달라.’ 케이가 살았던 세계는 천국 같은 수족관이었으며, 케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수족관에서 얌전히 갇혀서, 정해진 위험과 주어진 도전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386 아저씨는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케이는 망가져버린 386 아저씨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가 없다.


정해진 위험과 주어진 도전이라는 짜여진 각본 속에 살고 있음을 인지하며, 카페에서 열심히 삶에 대한 도전, 그러니까 시험 준비를 하던 중 케이는 갑자기 머릿속에 어떤 의문이, 어떤 불만이, 어떤 감정이 솟구친다. 아마도, 그것은 이런 질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정말 달라?’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는, 짐짓 삶의 경험이 농축된 조언인 듯 보이는 그 태도. 사실 그것은 또 다른 부인법이 아니었을까? 저기 넘실되는 불쾌하고 역겨우며 이름 없는 에너지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과 이미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만으로는 견딜 수 없어진 이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부인법.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계약기간을 이틀 앞두고 잘려나가는 이들과 나는 달라, 끝없이 무급인턴의 뺑뺑이를 돌고 있는 이들과 나는 달라, 상가를 잃고 옥상에 올라가서 생존권을 외치는 이들과 나는 달라,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 무책임하게 회사에서 잘려나가는 이들과 나는 달라, 하루 12시간씩 일하고도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들과 나는 달라. 여기는 천국이니까. 여기는 진짜 바다가 아니니까. 여기는 수족관이니까. 여기는, 여기는, 여기는…….


마침내, 케이는 참지 못하고 카페를 뛰쳐나간다. 그 순간, 케이를 가로막는 수족관 벽은 없었다. 어쩌면 케이는 알게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바다에 있음을. 자기도 다르지 않음을.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나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케이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갔던 것이다. ‘그곳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린세스 바리 -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정윤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리, 안녕? 네 이야기를 듣고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한동안 고민했어. 내게 네 삶은 먹먹함이라는 거대한 벽이었고, 나는 그 앞에서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지. 책을 덮은 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침묵뿐이었어. 이 시대에는 상처를 드러내고, 위로를 건네주고, 힐링을 시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이 떠들어대고, 또 그런 행동들이 이미 누구나 따라하는 유행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 하지만, 나는 감히 네게 위로를 건네지 못하겠고, 힐링을 주겠노라고 자신할 수 없었어. 서투른 위로와 거짓된 힐링은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라는 걸, 언젠가 겪었기 때문이랄까. , 정말, 정말로 나는 널 어떻게 위로할지도, 무엇을 해야 힐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난,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해. 이걸로 너를 위로하겠노라는, 그런 얄팍한 마음은 없어. 다만, 네게 말을 건네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편히 읽어주길 바래.


네 이름은 바리. 할머니가 매번 들려줬던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이지. 부모는 아들을 원했으나 끝내 딸로 태어나서 버려지게 된, 그 기구한 운명이 비슷했기에 할머니는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거야. 그래, 넌 버려졌어. 너는 물었을 테지. ‘왜 하필 내가 버려진 것일까? 내 앞의 언니들은 한 명도 버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너는 그 답을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얻지 않았을까 싶어. 언젠가 자신을 버린 부모님이 곤란해질 때가 오고, 그때에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이 얼마나 소중했던 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이야.


그러나 너는 이름이 바리일 뿐, ‘바리공주가 아니었어. 부모님은 네가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었으며, 굳이 너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래서 네가 얼마나 소중한 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너는 연탄이 아니라 고추장을 팔면서 여전히 잘 사는 부모의 집을 뒤로한 채, 널 키운 산파 할머니와 살았던 가난한 시장 한 구석으로 돌아오게 돼. 그곳에선 홍등가에서 일했던 연슬언니가 있었고, 중국에서 엄마를 만나기 위해 참께 자루에서 숨죽이며 온 나나진이 있었고, “꿀맛이야, 바리랑 함께 먹으면, 뭐든지.”라고 말하는 청하가 있었고, 언제나 읽을 책을 가게에 놔두는 토끼 할머니가 있는 곳이었지.


언제부터인가 너도 느꼈을 거야. 삶은 어렸을 적 들었던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걸. 때로는 그 괴리감이 우리를 너무도 슬프게 만들지. 그토록 당당했던 여성이었던 산파는 아기를 못 가진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이후의 삶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고, 몸을 팔아 동생들을 보살핀 연슬언니는 끝내 그 동생들에게 외면 받았고, 나나진의 친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몸을 요구했으며, 너에게 청혼했으며 아이를 함께 만들었던 청하는 무언가 꺼림칙한 사고로 죽게 되었지. 마침내 너는 토끼 할머니에게 쓸 독초와는 다른 독초”, “편안하게 죽음으로 인도하는 절차 따윈 없이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독초를 법제하려고 해. 그리고 반드시 (아마도 그 독초를 쓰기 위해) 돌아오겠노라는 너는 다짐하지.


, 그런 너에게 내가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부모님은 없었지만, 두 할머니가 있지 않았느냐고? 고백을 하고, 결혼을 했던 청하와 함께한 기억이 있지 않았느냐고? 그래도 청하의 아이가 남아있지 않느냐고? 그런 빤한 소리는 하고 싶지도 않고, 네가 듣고 싶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지독한 삶 속에서 너는 위로와 힐링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너의 지독한 삶과 마주한 우리에게 필요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억지로 쥐어 짠 위로와 힐링으로 네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단지,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 치유 될 거라 믿으면서 네 삶을 마주하게 되어 느끼는 우리들의 불편함만을 완화시켜줄 뿐이지.


청하가 세상을 떠나고, 너는 불안해했지. “, 나나진. 나 혼자 청하의 아기 잘 키울 수 있을가? 지켜줄 수 있을까?” 이때 나나진은 이렇게 대답했어. “왜 혼자야. 쌀집 할머니도 있고, 나도 있고, , 빨간 입술 싸가지 할머니도 있잖아맞아. 너는 버려진 아이였지만, 비록 그것은 어떤 행복을 위해 견뎌내야 하는 소명운명사명도 아니었지만, 혼자인 아이는 아니었어. 네가 좋다면, 나도 너와 함께 할게. 너 혼자 청하의 아이를 키우지 않게 할게. 우리, 친구하자. 나는 감히 네 삶을 위로하거나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손은 내밀 수 있어. 내 손을 잡지 않을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남아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이 하나의 명제로 대표된다. 하나같이 살아남지못할까봐, 벌벌 떨고,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댄다. 이제는 그 모든 게 자연스러워, 자신이 공포에 잠겨있는지도 모른 채 살 정도다. 확인될 수 없는 그 지독한 공포와 의심은, 이제 살아남으려는 자에게 필수적 감정이 되었다. 그 정서를 한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다. ‘무서워하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죽는다.’


그런데 여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가 있다. 바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다. 이 동화의 이상한 결말은 우리가 굳게 믿는 명제를 혼란스럽게 한다. 동화가 막바지로 치닫는 순간, 암탉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잎싹에게 감정이입이 된 독자는, 이런 기습적인 결말에 충격을 받는다. 언제나 이 시대 이야기의 결말은 끝끝내 살아남았습니다.’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매번 확인하면서 자신 또한 끝끝내 살아남으리라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 죽었습니다.’라니?


이상한 것은 결말뿐이 아니다. 동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잎싹의 삶은 기묘하게 흘러갔다. 그 시작은 한낱, 수많은 양계장 닭 중 하나에 불과했던 닭이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고 스스로 지을 때부터였다. 햇빛과 빗물을 모아 하나의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처럼 살고 싶었던 닭은,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 지었다. 매일매일 무정란만을 낳는 양계장 닭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잎싹은 마당으로 나가고싶었다. 알을 품고싶었다. 아가를 돌보고싶었다. 그것들은 살아남는 것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가만히 양계장 안에 있으면, 언제나 똑같은 시간에 먹이가 나왔다. 먹이를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고, 천적이 올까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다. “살아남아라!” 이 명제는 말한다. ‘얌전히 양계장에서 살면서 주는 것이나 받아먹으며, 안락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 그러나, 잎싹은 끝내 양계장 밖으로 나간다. ‘밖의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서우며 끔찍한지 알려주는 엄마가, 선생이, TV가 잎싹에게는 없었다. 실로 이 시대의 진리인,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을 잎싹은 몰랐던 셈이다. 그리하여 잎싹은 살아남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양계장에서 나오고, 마당에서 쫓겨난 잎싹은 밖의 세상에서 하나의 과 조우한다. 아무도 품지 않는 알이 안타까웠던 잎싹은 그 알을 자신이 품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살아남는 것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돌봄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자신이 직접 낳은 알도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는 한 조각도 남길 수 없으며,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알이니, 자신의 노후를 보장하는 투자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런데도 알을 품을 수 있는가?


역시나, 알을 깨고 나온 것은 닭이 아니라 청둥오리였다. 차츰차츰 아가가 자라면서, 잎싹은 그 아가는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잎싹은 헤엄칠 수도, 날아갈 수도 없었다. 아가와 함께 사는 건, 잎싹이 살아남을확률을 줄이는 거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잎싹은 아가를 키워낸다. 그것도, ‘늠름한 청둥오리. 헤엄도 배우고, 나는 것도 익혔으며, 이제 자기와 같은 청둥오리들 무리에서 사는 법까지 익힌 아가는, 잎싹 곁을 떠난다. 한 마리의 성숙한 청둥오리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잎사귀의 삶을 살고 싶었었던 잎싹. 한낱 양계장 닭이었던 잎싹은 양계장을 나왔고, 알을 품었으며, 아가를 돌보았고, 잎사귀가 아름다운 꽃을 맺듯 한 마리의 늠름한 청둥오리를 길러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느라,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잊어버리곤 한다. 산다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가 끊임없이 먹이가 되어주는 것이며, 그 생의 끝에는 자신 또한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생명이라면, 누구나 이 순환의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이라면,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것은 생명의 숙명이다. 잎사귀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때가 되면 땅으로 돌아간다. 잎싹은 정말로 잎사귀처럼 살았다.


잎사귀의 삶. 그것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가는것이다. 다른 무수한 양계장 닭들과 달리, 잎싹은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 살아가는 것은, ‘으로 뛰쳐나오는 것이었고, ‘을 품는 것이었고, ‘키워낸 아가를 떠나보내는 것이었고, 그리고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 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다. 잎싹은 족제비의 아기를 보았고, 족제비의 먹이로 끝맺음한 자신의 생은 그 아기 족제비들에게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그렇게, 생명은 순환된다.


공포와 의심으로 한 치도 양계장 밖을, 마당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우리에게 잎싹의 삶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양계장과 마당 안에서는 잎싹의 삶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러다 결국, 끝이 없는 공포에 질려서 살아남는 것만 갈구하다가, 어느 순간 인생을 끝맺음당할 것이다. 밖의 세상이 무엇인지 모른 채. 알을 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먹이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그리하여 끝끝내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