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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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제목은 ‘변방을 찾아서’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쓴이가 딛고 있는 곳은 ‘변방’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써, 변방을 ‘찾아’가야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신영복 교수를 ‘변방의 인물’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감이 있다. 단적으로, 그의 퇴임식이 열렸던 2006년, 그 자리에는 당시의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참석했다. 또한 조정래 소설가와 고(古) 김근태 의원도 함께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바로, 나 같은 사람) 얼굴조차 보기 힘들 사람들이 그의 퇴임식을 축하하기 위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그뿐인가. 그는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 인문공부’라는 이름의 강의를 하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는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과 이인영 국회의원, 신헌철 SK 에너지 부회장, 김연배 한화 부회장이 참석했다. (사실, 그들과 나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기업인의 경우는 이름조차 생소하다.) 확실히, 지금의 신영복 교수를 보고 변방의 인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는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애써 변방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지금도 ‘중심’에 있는 인물이 변방에 다가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시대의 주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으리으리하고 삐까번쩍한 후광을 지닌 채로, ‘그렇게 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가면서 ‘중심에 도달하는 비법’을 전달하는 이를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니까, 바로 ‘중심의 전도사들’ 말이다. 신영복 교수의 삶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서사를 지녔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감자에서 재벌 총재가 퇴임을 축하해주는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그 어떤 성공기보다도 극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중심의 전도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신영복 교수는 이제 더는 변방에 있다고 말하기가 어색하게 되었지만, 그의 서체는 여전히 변방에 있었다. ‘학군의 정점’ 서울과는 한참 동떨어진 지역의 ‘초등학교 분교’에 있었고, 사람이 붐비는 율곡 이이와 심사임당의 강릉 오죽헌과는 달리 한적한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에 있었고, 당시엔 패배자에 불과했던 ‘동학농민혁명의 김개남 장군 추모비’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들을 찾아가는 일종의 여행기가 바로, 『변방을 찾아서』인 셈이다. 아직, 우리는 그가 왜 그런 변방을 찾아 나섰는지 답을 내리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의 문장에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성(城)을 벗어나는 해방감이 생명이다. 부딪치는 모든 것들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면 여행은 자기 생각을 재확인하는 것이 된다.” 12p



이것을 그의 여행론으로 본다면, 그는 ‘중심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벗어나는 것’이 변방을 찾아 나선 이유가 된다. 어느 지방의 초등학교 분교에 21세기 서울식 교육문화(얼마 전, 서울의 국제영어학부를 운영하는 모 유치원은 사립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자랑스레 내걸었다.)를 전파하려 했던 게 아니었고, 역사의 패배자가 된 장군 앞에서 자신은 끝끝내 승리자가 되었노라고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뜻이다. 오히려, 무언가를 ‘배우려’고 찾아간 거라 할 수 있다. 도대체 변방에서 배우면, 얼마나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건가? 그런데, 그가 찾아간 변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변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뭔가?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亞流)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141p



 즉, 그가 찾아 나섰던 변방은 ‘중심의 아류’가 아니었고, 중심과는 또 다른 ‘창조 공간’이었다. 사립유치원-사립초-특목중·고 이어지는 서울의 교육과 다른 것을 창조하고 있었던 곳이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였고, 조선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으로 자신을 마냥 구겨 넣지 않으면서 놀라운 시를 창조한 이가 허난설헌이었고(그 시대에 여성은 시를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결코 주연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그리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창조한 것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었다. 이곳들은 중심이 되지 못해 우울한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이 알지 못하는 재미를 창조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책을 덮은 후, 내가 있는 곳을 잠시 생각해본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로 넘쳐난다.(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우리네 삶은 짝퉁이 되거나 꽝이 되어버린다. 중심이라는 ‘명품 원본’에 최대한 닮아가려고 애쓰면서, 끝끝내 ‘일치’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짝퉁’이라 매도하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꽝’이라고 적힌 복권처럼 여겨버리기 일쑤다. 동시에 어떤 망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열심히 모방할수록 자신의 삶이 명품에 가까워진다는 믿음과,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디에선가 ‘꽝’이 아닌 다른 삶이 존재하리라는 믿음 말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삶은 위계적으로 전시된 상품이 아니다. 특정 브랜드의 삶을 열심히 모방해서 삶의 위계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한 것은, 사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역시 믿을 수 없겠지만, 지금 이곳 말고 어디에선가 ‘당첨’된 너머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제비뽑기에는 ‘꽝’이란 없다는 뜻이다. 당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당신의 삶’이다.


 어쩌면 변방을 찾아야 하는 이는 ‘변두리’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닐까? 자신의 삶을 짝퉁으로 매도당하고, ‘꽝’이 적힌 복권처럼 내다버리도록 타인과 자신에게 강요당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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