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의 맛
김사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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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김사과는 여행 에세이를 냈고, 그의 글에는 여행의 표정이 없었다. 여행의 표정은 무엇인가. 흔히 여행기에서 쉽게 느껴지는 것, 여행을 권장하는 이들이 줄곧 지어보이는 것, 그러니까, 페이스북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표정 같은 것. 이를 형용사로 표현하자면, ‘해맑음.’ 이곳의 여행기는 죄다 그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건 마치 페이스북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결국 여행기는 세련된 신파극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김사과의 『설탕의 맛』에는 그게 없다. 으레 여행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표정이 없다. 


 감동과 감탄. 여행의 필수적 감정들. 사람들은 언제나 ‘그곳’은 ‘여기’와 다를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껏 감동했고, 한없이 감탄했다. 그것은 마치, 공간을 통해 시간을 건너뛰는 것 같았다. 지나간 과거를 만나고 감동하거나, 다가올 미래를 꿈꾸며 감탄하거나. 언제나 가장 구질구질 한 것은 바로 ‘현재’였으므로, 자고로 여행이란 과거나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여행을 가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설탕의 맛』은 뉴욕과 포르투와 베를린과 다시 뉴욕을 거쳐 가면서 자꾸만 하나의 도시만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서울이었다.


 익숙함. 익숙했던 것. 곧, 익숙해질 것. 그것은 놀라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름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마치 신상품 같은 다름이었다. 신상품은 예전 상품과 다르다. 하지만, 익숙하다. 아이폰5S는 아이폰4와 다르다. 하지만, 익숙하다. 서울에서 유행하는 상품들은 지방의 상품과 다르다. 하지만 곧 그것은 익숙해질 것이다. 여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해지고야 말 신상품의 최신 유행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것 정도에 불과해졌는지도 모른다는 어떤 불길한 느낌. 김사과의 여행기에는 그런 예감이 짙게 배여 있다. 


 그러니까 보고 있는 것은 뉴욕이라는 서울이고, 포르투라는 서울이며, 베를린이라는 서울이다. 그것은 서울의 신상 버전 혹은 구 버전이거나, 아니면 그저 제품넘버만 다른 같은 회사의 상품 같은 것이다. 『설탕의 맛』에서는 각기 다른 지역의 풍경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기존의 여행기가 내뱉었던 ‘다른 세계’ 따위의 판타지가 아니라, ‘다른 제품’의 설명서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여기는 이렇군. 어, 저기는 그렇군.


 ‘다른 세계’는 사라지고, ‘다른 제품’만 남은 사회, 그것은 불길하지만 달콤하다. 어차피 사람들은 ‘다른 제품’이 주는 달콤함에 적응한지 오래다. 오래전 ‘다른 세계’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제품’에 열광한다.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다른 제품’일거라고 믿는다. 설령, 그것이 가짜 세계일지라도, 가짜 신일지라도, 가짜 구원일지라도, 어떠한가. 어차피, 진짜는 사라졌는데. 하여, 이 여행기에 다른 세계는 없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각기 제품 넘버가 다른 유사 제품에 대한 후기 같은 것에 가깝다.


 여행의 표정이 아닌 제품의 표정. 『설탕의 맛』이 짓는 표정. 그것은 건조하지만, 달콤하다. “샴푸 냄새 나는 죽음” 같은 것. 그것은 정말이지 “나쁘지 않아”보이기에, 기꺼이 빠져 익사당해도 좋을 것만 같다. 아니, 이미 이곳에서는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서울의 풍경이자, 뉴욕의 풍경이며, 포르투와 베를린의 풍경이었다.  



 뉴욕과 포르투와 베를린에 대한 김사과의 글을 보면서, 나는 그가 서울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가,(서울이란 제품에 대한 후기 같은 것.) 아니 어쩌면 서울에 대한 에세이가 바로 이 『설탕의 맛』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분명히, ‘서울 SEOUL 14’ 라는 마지막 장이 추가되었어도 그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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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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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단어에 대한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테다. 서울에 살았든 살지 않았든, 가보았든 그러지 않았든. 누구나 ‘서울’에 대해서, 감정 섞인 기억들이 마음에 남아있다.


 그것은 욕망이란 이름의 기억일 수 있다. 아름답고, 자부심이 넘치며, 문화적이고, 럭셔리한 공간. 어쩌면 TV 광고에 나오는 환상적이고 자연적인 하나의 성(城)과 다를 바 없는 아파트의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언젠간 가야할 공간이거나, 앞으로 영영 갈 수 없는 공간이거나, 이미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욕망의 끝에 놓인 공간이라는 점에선 똑같다.


 또한 서울은 ‘가난한 과거’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점을 찍어야 하는 단어는 ‘과거’다. 세상이 팍팍할수록,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는 폭풍 리트윗 당한 것처럼 퍼져나가고, 그들은 언제나 ‘가난했던 과거’였던 ‘서울 살이’를 이야기하곤 한다. 미국에 아메리카드림이 있다면, 한국에는 서울드림이 있다. 서울드림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조미료는 ‘가난했던 과거 서울 살이’다. 참고, 참고, ‘가난한 시절’을 참으라. 그리하면 진정한 ‘서울 사람’이 될 수 있으리니. ‘성과 같은 이름을 지니며, 성처럼 높고, 성처럼 화려한 곳에서 사는 사람’ 말이다.


 이제 서울은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것은 ‘과거’에 불과해졌다. 혹시 당신이 가난하다면, 당신은 ‘서울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 ‘성공’해서 서울 사람으로 입성하던가, 아니면 ‘도태’해서 서울에서 쫓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서울은 ‘가난’을 품지 않고 ‘과거’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것은 구질구질한 것이고, 구질구질한 것이 서울 안에 있는 걸, ‘서울 사람’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뜨겁게 안녕』에서 김현진이 기억하는 서울은, 위의 기억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서문에서 “나는 기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썼다. 그녀가 기억하려고 하는 것, 그건, 21세기 서울이 지우려고 하는 기억이다. 선진화의 첨병(尖兵)인 서울에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하고, 품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 


 언젠가부터 서울은 그 구차한 기억들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뉴타운과 재개발이란 이름하에, 기억을 ‘정화’(淨化)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났다. 자신들을 지우려는 서울의 ‘단호하며,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태도 속에서 버림받은 기억들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쫓겨났다. 김현진 또한 버림받은 기억들 중 하나였으니, 그녀도 언제나 밀려나고 또 밀려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녀는, 밀려나고, 쫓겨나고, 버림받은 기억들을 낱낱이 담을 수 있었다.


 가난은 아름답지 않다. 더더욱 그것이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 놓인 가난이라면, ‘절대로’ 아름다울 수 없다. 차라리 그건, 구질구질하고, 구차하며, 강퍅하고, 황당하고, 억울하며, 무서우며, 한스럽다. 김현진도 이를 모르진 않는다. “그때 내가 그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걸었더라도, 그녀의 인생에서 달라지는 거라곤 없었겠지. 이곳은, 이웃을 생각하기엔 참 고독하고도 난해한 도시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기묘하게도, 신비하게도. 그녀가 책 속에 풀어낸 기억들은 ‘구질구질’이라는 한마디로 매도할 수 없다. 그녀는, 서울에게 버림받은 기억들 중 하나인 그녀는, 가난한 기억들 하나하나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그 기억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직업이 뭐건 나이가 몇 살이건 어떻게 생겼건 온몸에서 풀풀 풍기는 ‘살겠다, 살고야 말겠다’하는 에너지야 말로 아름다움의 정수였던 거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의 글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위로가 된다. ‘찬란한 욕망’도 아니고, ‘지나간 극복기’도 아닌, 희망이 메마른 곳에서도 끝끝내 버텨내는 ‘의지’와 같은 위로를. 


 오늘도 서울의 어느 뒷골목에선, 가난한 기억들은 밀려나고, 쫓겨나며, 깔끔하게 지워지고 있다.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은 그들을 위한 진혼곡(鎭魂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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