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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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이 하나의 명제로 대표된다. 하나같이 살아남지못할까봐, 벌벌 떨고,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댄다. 이제는 그 모든 게 자연스러워, 자신이 공포에 잠겨있는지도 모른 채 살 정도다. 확인될 수 없는 그 지독한 공포와 의심은, 이제 살아남으려는 자에게 필수적 감정이 되었다. 그 정서를 한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다. ‘무서워하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죽는다.’


그런데 여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가 있다. 바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다. 이 동화의 이상한 결말은 우리가 굳게 믿는 명제를 혼란스럽게 한다. 동화가 막바지로 치닫는 순간, 암탉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잎싹에게 감정이입이 된 독자는, 이런 기습적인 결말에 충격을 받는다. 언제나 이 시대 이야기의 결말은 끝끝내 살아남았습니다.’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매번 확인하면서 자신 또한 끝끝내 살아남으리라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 죽었습니다.’라니?


이상한 것은 결말뿐이 아니다. 동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잎싹의 삶은 기묘하게 흘러갔다. 그 시작은 한낱, 수많은 양계장 닭 중 하나에 불과했던 닭이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고 스스로 지을 때부터였다. 햇빛과 빗물을 모아 하나의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처럼 살고 싶었던 닭은,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 지었다. 매일매일 무정란만을 낳는 양계장 닭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잎싹은 마당으로 나가고싶었다. 알을 품고싶었다. 아가를 돌보고싶었다. 그것들은 살아남는 것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가만히 양계장 안에 있으면, 언제나 똑같은 시간에 먹이가 나왔다. 먹이를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고, 천적이 올까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다. “살아남아라!” 이 명제는 말한다. ‘얌전히 양계장에서 살면서 주는 것이나 받아먹으며, 안락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 그러나, 잎싹은 끝내 양계장 밖으로 나간다. ‘밖의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서우며 끔찍한지 알려주는 엄마가, 선생이, TV가 잎싹에게는 없었다. 실로 이 시대의 진리인,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을 잎싹은 몰랐던 셈이다. 그리하여 잎싹은 살아남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양계장에서 나오고, 마당에서 쫓겨난 잎싹은 밖의 세상에서 하나의 과 조우한다. 아무도 품지 않는 알이 안타까웠던 잎싹은 그 알을 자신이 품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살아남는 것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돌봄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자신이 직접 낳은 알도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는 한 조각도 남길 수 없으며,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알이니, 자신의 노후를 보장하는 투자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런데도 알을 품을 수 있는가?


역시나, 알을 깨고 나온 것은 닭이 아니라 청둥오리였다. 차츰차츰 아가가 자라면서, 잎싹은 그 아가는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잎싹은 헤엄칠 수도, 날아갈 수도 없었다. 아가와 함께 사는 건, 잎싹이 살아남을확률을 줄이는 거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잎싹은 아가를 키워낸다. 그것도, ‘늠름한 청둥오리. 헤엄도 배우고, 나는 것도 익혔으며, 이제 자기와 같은 청둥오리들 무리에서 사는 법까지 익힌 아가는, 잎싹 곁을 떠난다. 한 마리의 성숙한 청둥오리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잎사귀의 삶을 살고 싶었었던 잎싹. 한낱 양계장 닭이었던 잎싹은 양계장을 나왔고, 알을 품었으며, 아가를 돌보았고, 잎사귀가 아름다운 꽃을 맺듯 한 마리의 늠름한 청둥오리를 길러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잎싹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느라,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잊어버리곤 한다. 산다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가 끊임없이 먹이가 되어주는 것이며, 그 생의 끝에는 자신 또한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생명이라면, 누구나 이 순환의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이라면,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것은 생명의 숙명이다. 잎사귀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때가 되면 땅으로 돌아간다. 잎싹은 정말로 잎사귀처럼 살았다.


잎사귀의 삶. 그것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가는것이다. 다른 무수한 양계장 닭들과 달리, 잎싹은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 살아가는 것은, ‘으로 뛰쳐나오는 것이었고, ‘을 품는 것이었고, ‘키워낸 아가를 떠나보내는 것이었고, 그리고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 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다. 잎싹은 족제비의 아기를 보았고, 족제비의 먹이로 끝맺음한 자신의 생은 그 아기 족제비들에게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그렇게, 생명은 순환된다.


공포와 의심으로 한 치도 양계장 밖을, 마당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우리에게 잎싹의 삶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양계장과 마당 안에서는 잎싹의 삶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러다 결국, 끝이 없는 공포에 질려서 살아남는 것만 갈구하다가, 어느 순간 인생을 끝맺음당할 것이다. 밖의 세상이 무엇인지 모른 채. 알을 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먹이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그리하여 끝끝내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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