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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아주 긴 여운을 남기는 짧은 소설.
책을 읽고 나서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난 듯 하다. 그 사이에 3일, 4일에 거쳐 두 차례의 손님을 맞아 오랫만에 꽤 분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사이 짬짬히 계속 이 글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영화에만 나올 법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된 파키스탄의 한 젊은이가, 그의 고향에서 아마도 미국인일게 분명한 상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소설은 단 한 문장의 예외도 없이 그의 시점에서 말해진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웃이자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 출신의 젊은이 찬게즈가 미국 대학의 산물이 되어 업계 최고의 직장을 얻고 미국 여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러했듯 2001. 9. 11. 이후 그의 인생은 방향을 틀게 된다. 나에게 이 이야기는 거기에서부터 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만, 이 이야기는 끓거나 넘치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데워진다는 편이 맞을 듯.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보고싶은 영화는 예고편도 일부러 피하는 성향을 가진 터라, 책의 리뷰에도 줄거이나 문장 인용은 안 하려고 드는 데, 예외를 두어야 겠다.
....."텔레비전을 켰을 때 처음에는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영화가 아니고 뉴스더라고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 .......(중략)......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허구 인물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움직이죠. 여러 일화를 통해 내게 친숙해진 인물이 죽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 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어요.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거죠." (p.66-67)
고백하건데, 나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도 같았고, 묘한 흥분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온갖 비난을 받아 마땅할지도. 그러나, 그랬다. 빈 라덴의 사망 뉴스를 보았을 때 환호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야기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찬게즈가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 지는 온전히 읽는 사람의 몫이다.
여운이 길게 남는 이유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손꼽을 수 있는 건 이 글의 품위에 있다. 점잖고 너그러우나 단호하고 품위있다. 글을 읽고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아마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있는 그의 태도가 그러하기 때문이겠지. 친근함과 무례함, 친절과 침범의 경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는 때여서 그 점이 더 강하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통용이나 맥락이 어떠하든, 분명히 내가 갖고 있는 '근본주의자'라는 단어에 대한 로망과 합쳐져서 이 소설은 부드러운 동시에 견고하며 사려깊은 동시에 단호하고 솔직한 동시에 당당한 이상적인 신사의 모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