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MacGregor Paxton_The Yellow Jacket

 

"따라서 소설이나 다른 작품의 내용 속으로 들어간 사회적 유의미성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격리된 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회적 범주에 놓인 채, 사회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라는 보상을 받는다. 소설 내용의 요소라는 반영되고 격리된 실재 때문에, 소설이 갖는 이러한 사회적 현실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소설의 현실성, 소설과 현실의 접촉, 소설이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것, 이는 소설이 자신의 내용에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만 귀착되지는 않는다. 아니, 소설은 소설로서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고 그 힘을 발휘하며, 때로는 내용에 반영된 사회 현상 못지않게, 그 자체로 사회 현실에서 매우 큰 지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문학에 그저 반영되었을 뿐인 또 하나의 현실로 인해 문학의 내재적 현실에서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처럼 예술작품에 다른 현실이 실재한다는 점을 부정하거나 유럽의 형식주의처럼 현실이 예술작품에서 행하는 구성적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이 두가지는 예술 외적인(상대적으로 외적인) 일반 방법론적 관심과 사회학적 관심의 시각에서뿐 아니라 예술 자체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유해하다. 왜냐하면 이 두 유파는 예술의 구조적 요소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 가운데 하나를 과소평가함으로써 예술의 구조 전체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기한 모든 문제에 대해 올바른 일반 철학적 방향과 방법론적 정확성을 제시하는 것은 오직 마르크스주의뿐이다.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이 문학의 특수한 현실과 문학의 내용에 반영된 이데올로기적 시야, 즉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모순 없이 완벽하게 조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이 모든 이데올로기적 창조를 완전히 관통하는 사회경제적 합법칙성을 토대로 이 두 가지를 사회생활의 통일체 속에 일치시킬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토대 위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적 현상ㅡ순수한 예술적 디테일과 뉘앙스를 지닌 시적 구조를 포함해ㅡ 전면적인 사회학적 특성을 전제한다면,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처럼 작품을 물신화하여 그것을 의미 없는 사물로 탈바꿈시킨다든지, 예술적 지각을 이 사물에 대한 노골적인 쾌락적 '감지'로 탈바꿈시킬 위험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위험, 즉 문학을 단지 다른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탈바꿈시키고 문학 작품의 예술적 특수성을 제거할 위험도 사라질 것이다. "  

   

                  - 미하일 바흐찐,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ㅡ사회학적 시학을 위한 비판적 서설' (192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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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Segantini_ Les Mauvaises Mères,_1894
   

 

 


Giovanni Segantini _ Il Naviglio a Ponte San Marco_1880
 

   

 

'극단적으로 인간을 혐오했던' 한 이딸리아 화가는 결국 1899년 스위스 남부 지방의 고지에서 세상을 떠난다.    

남유럽의 태양과 그늘을 피해 북유럽의 태양과 그늘을 찾아간 그의 그림은 여전한 혐오의 한기에 질려있다.    

목가적 풍경, 하지만 질식할 것 같은 폐소의 폐허 같은 공기.

'커다란 산이 만드는 그림자는 바람에 날려가는 일 같은 건 없는 무겁고 깊은 그늘'이기에.  

내면에 동상이 걸린 듯 두 그림 사이에 얼어붙어 오도가도 못하는 시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따라다닌 혐오의 그늘이,  풍경 속에서 인간을 그리는 동시에 지워내고자 했던 그의 고투가 지나간 경로를 

읽어내려 애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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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오전, 밀린 빨래를 하고   

 요즘 배수아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니다 추천받은 '다와다 요코'의 책들을  모조리 다 주문하고,   

(와세다에서 노문학을 전공하고 독일과 스위스에서 유학했으며, 현재 독일어권 문학의 번역자이자 독일어/일본어 이언어 작가로 활동중인  여류 소설가이다. )     

   ( 이 책은 그녀의 소설.)

 (서경식 선생님과의 서한교환집이라는 이 책이 가장 기대된다.) 

 

 

 

한겨레 토요일 서평지에서 제일 좋아하는 '고전 오디세이' 칼럼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77895.html을 읽는다.

'고전 오디세이' 칼럼의 필자, 김헌 교수의  번역어들을 언제 한번 다 모아서 정리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750년에 공인된 ‘사도신경’에는 뜻밖의 구절이 있다. 예수가 죽은 뒤,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사자(死者)들의 세계, 즉 ‘음부(陰府)로 내려갔다’(descendit ad inferos)는 것이다.  
   

   

   
  예수는 죽은 자들의 영(pneuma), 또는 혼(psyche)에게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영원한 삶의 세계로 건져 올리기 위해 저승의 세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기’, 즉 카타바시스(katabasis)다.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죽으면 모든 혼백은 바람 빠지듯이 몸을 빠져나와 하데스의 세계로 간다는 것. 예외는 없다. 어두컴컴한 지하의 세계로, 하늘 아래 땅 위, 태양이 빛나는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 ‘하데스’라는 말 자체가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그려주는 혼백기독교에서 말하는 이나 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맥 빠진 여운, 존재의 희멀건 한 그림자다. 힘과 활기가 없는 허깨비이며, 살아 있던 사람의 죽은 환영이고, 스산한 유령이다. 곧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연기 같은 것. 그런 혼백들이 우울하게 널려 있는 곳, 을씨년스러운 그곳이 죽은 자들의 세계, 하데스의 세계다.

 
   

  

   
 

소크라테스는 도망가지 않고 죽겠단다. 무슨 까닭에? 지금까지 자신의 삶은 결국 잘 죽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평생을 바쳐 갈고닦았던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었으므로. 그는 진심으로 죽고 싶단다. 죽음은 그에게 끝장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자유의 시작이란다.  

제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생각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호메로스의 인간관을 지워야 했다. 아니 호메로스가 그린 혼백에 생기를 불어넣어 불멸하는 실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영혼으로 새롭게 그려내야 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게 되는 것 자체가 영혼의 카타바시스였다. 영혼은 원래 저 높은 이데아의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참모습이 가득한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을 통해 그는 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즉 아나바시스(anabasis)를 꿈꾼다.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사이. 그리스적 사유와 기독교의 신앙 사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가운데에 두고 그려진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 사이에서, 인간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서구인들은 오랫동안 사유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여운이 끝내 남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그 생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는 사유 역시 꾸준하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으니까. 혼백? 영혼? 그런 것은 없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호메로스의 희미한 혼백을 아예 지워버리며,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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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mela Sztybel_ Leaning Left, Leaning Right_2006
  

 나쓰메 소세키의 미완성 유작 '명암'(범우사, 2007)은 그 분량도 분량이거니와(소세키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벌써 끝나고도 남았을 분량인데, 이야기상 가장 중요해보이는 메인 사건이 이제 막 숨가쁘게 전개되는 와중이다), 전체 구성이나 서술 템포가 늘어지는 면이 없지 않아, 그야말로 '미완'임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니 '미완성', '미완결'보다는 차라리 '완결불가능'에 가까운 미완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작가가 죽어 연재가 중간에서 단절('중절')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명암'의 이야기와 형식 자체가 작품의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완결불가능(종결불가능)을 전제하고/염두에 두고/의도하고 진행되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 이미 자신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알고 있던 작가의 산만함 내지는 체념의 발로라 보기에는 그 형식의 선택 자체는 너무나 치밀하게 작품 면면에 구현되어 있었다.   

 나는 소세키의 작품 중 '문'과 '마음' 그리고 '노방초(길 위의 생)'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세 작품에 공통된 점은, 이 작품들 모두 그 작품 특유의 독특한 형식을 지녔다는 점, 그 형식이 치밀하게, 작품 면면에 철두철미 구현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형식의 선택이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은 게 아니라 개인적인 상정에 불과하지만, 어쨌건 내가 파악한 소세키의 창작 흐름에서) 당연한 어떤 귀결, 수순처럼 여겨진다는 점, 즉 그 형식 선택의 추이에서 작가 자신의 예술관 내지 인생관을 건 어떤 절박함이 느껴질만큼 형식에의 천착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 작품은 다 읽고 나서 내용이나 주제를 다 차치하고 그 형식만 따로 숙고해보며 작품의 주제를 계속 반추해갈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가령 '문'에서 사계절 절기의 순환에 맞춰진 모든 형식은 그 자체로 주인공 부부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일종의 은유로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문'의 모티프가 이 순환 주기(소설의 전체 구성)에 어떤 기로와 굽이를 만들어내는지를 생각하면, 이 작품만큼 내용=형식의 등식을 절감할 수 있는 작품도 없다.  소세키의 최초의/유일한 자전소설이자, 그가 완결한 최후의 소설인 '노방초(길 위의 생)'는 내가 보기에 작가가 스스로 쓴 묘비명, 자신의 인생을 총괄하며 닫는 마지막 '문' 같은 작품이다. 그야말로 인생의 마지막 문을 닫는 자리에 선 인간이 이 정도 자세와 깨달음과 혜안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 인간의 일생이라는 시간은 대단한 것이 아닌가 싶은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소세키의 진정한 결말, 그의 최후의 말들을 선사받은 느낌이었다. 이런 최종적 수준에 도달해준 그가, 이렇게 완벽한 종장을 맺어 준 그가 고마웠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갖고 있었던 나의 선입견, 즉 "소설가의 최초 소설은 언제나 자전소설일 수밖에 없다"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진정한 자전소설은 가장 마지막에 쓸 수밖에 없다"로 수정되었다. 이 작품은 소설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식의 종장이었다.   

'명암'의 한국어판에 실린 도리히 마사하루의 해설에는 '노방초'의 작자가 도달한 그 종장의 지점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마음' 발표 후 '노방초' 집필 직전에 쓰여진 수필 '유리문 안에서' 최종장의 종지부를 찍는 문장이란다. 그러니까 소세키는 이런 시야를 확립한 이후 '노방초' 집필에 들어갔던 것이다.   

   
  인류전체를 넓은 시야로 조망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찮은 것을 쓴 자신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마치 그 자신이 타인인 듯한 느낌을 품고서 역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명암', 작품론, 541쪽'  
   

 

하지만 인간은, 삶은,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과 달라서 완벽한 형식화가 되려는 찰나, 그 틀의 틈을 비어져 나와 무정형으로 계속되게 마련이다.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은 자살을 택하지만, 그래도 예술보다는 삶을 사는 쪽을 택하는 인간은, "옆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듯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어쩔 수 없는"(노방초, 86장)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살아진다. '명암'은 마지막 문을 '일단 닫은' 소설가 소세키가 그 문틈을 비어져 나온 삶을 계속 이어간 궤적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처음 읽을 때는 어떻게 '노방초(길 위의 생)'같은 작품을 쓴 작가가 다시 이런 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나 싶었다. 이런 지점, 그러니까 어떤 중간 지점, 여전히 모르겠는, 암중모색중인 끔찍한 지점으로 다시.  

   
  이 육체는 언제 어떠한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건 고사하고 지금 실제로 어떠한 변화가 이 육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명암>, 2장 14쪽)  
   

 그러나 이 작품이 파고드는 그 지점은 '다시 또 그 지점'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렇게 적나라하고 잔인할 정도로 파고들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소세키는 그 결을 낱낱이 다 헤짚고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며 집요하게 인물들의 내면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파고 들어 모든 걸 다 펼쳐보였다. 가혹할 정도였다. 특히 그가 드러내는 면면이 나의 숨기고 싶은 어떤 치졸함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중을 건드릴 때면, 얼굴이 벌개져 독서를 더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뒤에 실린 이 작품의 해설에서는 이 작품서두에 나오는 의사의 말이 이 작품의 서술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소설가로서 종장을 일단 마친 소세키가 다시 살아가기 시작한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정위하는 서두로도 읽힌다.  '명암'은 이렇게 시작한다.  

   
 

의사는 진찰 기구를 넣은 뒤에 수술대 위에서 츠다를 내려봤다. 

"역시 구멍이 장까지 이어져 있었군요. 일전에 진찰했을 때는 도중에 흉터의 돌기가 있어서 무심코 거기가 막다른 곳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는데, 오늘 소통이 잘 되게 하기 위해 그 부분을 득득 긁어내 보니까 아직도 드러나지 않는 속이 있네요."  

 
   

 

 그래도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던 것은 이 작품의 서사 템포였다. 순간 순간 빛이 반짝이고, 깊어졌다 다시 펼쳐지고, 죄어졌다 풀어지곤 했지만, 계속 고여있는 채 흐르지 못하는, 아니 흐르긴 흐르는데 정처없이 목적지 없이 그저 흐르기만 하는 것 같은 템포.  이러다 길을 잃을 것만 같은, 페이지는 점점 줄어드는데, 이 작품이 미완으로 끝나는 걸 알기에 조금 더 조금 더 앞으로 빨리 나가 조금만 더 멀리 나갔으면 하는 나의 초조함이 그 템포를 더 완만하게 만드는 듯도 했다. 상황을 묘사하는 서술의 압축과 단정함, 모든 비밀이 밝혀지려는 순간에 단칼에 베인듯 중지된 장들, 이런 소세키 특유의 서술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자꾸 미뤄지고 간섭되고 지연되고 제자리에 맴도는 정도가 거의 그 지연 자체를 즐기게 되는 수준이었다. 곪기 시작한 상처를 자꾸 들여다보고 만져서 결국 그 곪에서 오는 아픔을 유희하듯이 말이다.  

내가 소세키를 이런 식으로 읽은 적이 거의 없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나는 항상 소세키를 무척 빠른 속도로, 극도로 몰입하여, 마치 꼼짝 없이 주어진 시공간 안에 갇혀 영화나 연극을 보듯이 읽곤 했다. 소세키는 언제나 내게 '일독의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운 작가였다. 재독, 삼독에도 질리지 않은 작가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일독을 내달릴 때의 그 떨림, 가슴철렁함은 일독의 시간만이 줄 수 있기에. 그런데, '명암'의 일독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빨리 읽어버릴 마음이 들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다 읽고자 하는 동기를 잊은 채, 읽었던 페이지를 다시 음미하고 다른 각도로 이해해보기 위해 부러 다시 앞으로 돌아오곤 했다.  전체 독서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졌지만 독서하는 그 순간 순간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대목을 음미하고 곱씹게 되는 몰입도가 커서 다음 장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명연음'에서 필립 글래스의 'The Hours' 음악을 피아노로 편곡한 앨범 전곡을 듣게 되었다. 차갑고 맑은 토요일 오후였는데, 나는 번역 원고를 끼적이며 외출 준비를 하는 와중이라, 처음부터 그 곡을 집중해서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무 것도 아무 생각도 안 한 채 그저 멍하니 음악을 '응시'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무늬가 계속 만들어졌다 풀어졌다, 깊어졌다 얕아졌다 하며 나의 시선과 온 정신을 사로잡았다. 마치 나를 둘러싸고 있던 시공간의 결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속에서 안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라,  제발 이 상태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 순간 만큼은 바라기만 하면, 내가 라디오를 끄지 않으면 정말 끊임 없이 음악도 그 시간도 그 무늬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은 왠지 내가 삶의 어떤 순간을 차분하게 관조하면서 오롯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57분에 걸친 긴 음악 감상이 끝난 후 이 음악을 틀었던 정만섭 씨는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 속에, 삶을 반추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음영 속에서 인생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뭔가 멍하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감상을 표했다.   

 '명암'의 서사가 작동하는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와 음영 속에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시간, 고여서 끊임없이 무늬를 만들어낼 뿐 흐르지 않는 시간,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무시간".

 이 시간이 가진 사태의 지연성과 시간의 진행을 무화시키는 무시간성이라는 속성이 극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장면은, 물론 그 '츠다의 온천장 헤매기' 장면일 것이다. 츠다는 드디어 문제의 옛 연인을 만나러 온천장에 도착해(전체가 188장인데 172장이 되어서야 츠다는 그 온천장에 도착한다. 젠장.) 목욕을 마치고 다시 방에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지만, 이 온천장의 복잡한 미로와 같은 구조(그 묘사를 보면 마치 꿈 속에 나올 법한, 모든 통로와 계단이 미로의 일부인 집 같다) 때문에 길을 잃는다. 독자도 그도 이러다가 곧 그녀를 마주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는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고 있는 대야 앞에 멈춘다.  

   
 

반짝거리는 흰 금속제 대야가 네 개쯤 늘어 놓여 있는 가운데 니켈의 마개 꼭지 주둥이에서 흐르는 산수인지 청수인지 알 수 없는 물이 끊임없이 주르륵 떨어져서 금속제 대야는 네 개가 다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둘레를 넘치는 수정과 같은 얇은 물의 막이 아름답게 미끄러져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금속제 대야 속의 물은 뒤에서 밀리고 위에서 떨어져 양쪽에서 그것이 조용한 순간에 미세한 진동을 느끼는 듯 흔들렸다.  

수도만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온 츠다의 눈은 바로 자신이 있는 장소를 잊게 만들었다. 그는 단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손을 내밀어 꼭지를 잠가두려고 생각했을 때 간신히 자신의 우활함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희고 좁은 해협을 닮은 형태 속에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일정하지 않은 소용돌이가 묘하게 그를 자극했다.  

(....) 

그냥 그의 눈앞에 보이는 물만이 움직였다. 소용돌이 같은 형태를 그렸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늘어나기도 하고 움츠리기도 했다.                                                                                             

                                                                                                                           -<명암> 175장 492쪽.

 
   

   

 '명암'의 주인공 츠다가 드디어 문제의 그 연인과 마주칠지도 모를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 소설에서는 그야말로 절정, '키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순간에 우리의 주인공은 멍하니 대야의 물 속을 보고 있다. 그런 다음 그가 고개가 들어 보게 되는 것은 거울 속 자신이다. 그 형상이 "자신이라고 인정하기 전에 그는 그것이 자신의 유령이라는 느낌이 먼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소설 첫 장에서 병 진단을 받았던 츠다를 떠올렸다. 그는 사실 수술을 받고 회복 겸 옛 애인도 만날 겸 이 온천장에 온 것이지만, 나는 첫 장에서 의사의 병 진단을 츠다의 '사망 진단'이라 읽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죽음까지 짧지만 지리멸렬 이어진 그의 남은 시간으로, 그리고 온천 장면을 츠다의 사후 이야기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병(사망) 진단 이후의 삶, 연장된, 유예된 삶을 받아들이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종말은 유예됐다, 하지만 언젠가 닥친다. 그것도 머지 않은 때에. 하지만 그때까지 어쨌든 나는 살아가야 한다. 아픈 몸을 비척거리며 끔찍하지만 그래도 현존하는 삶을. After the event, something still happ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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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냐하면 나에게 이 소설은 소세키가 사후(작가로서의 예술적 종결에 일단 도달한 다음)에 쓴, 사후로 연장됨을 전제하고  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사후를 미리 선취해 글을 쓰고 있다. 이미 죽음에 압도된 상태에서 삶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사는 매순간 미리 죽어본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도리히 마사하루는 해설에서 이 작품이 "펼치면 펼친 곳이 각각 흥미롭게 느껴지는 작품"이며, "펼치면 펼친 곳의 어느 장에도 인간 통찰의 깊은 우물과 같은 심의를 내포하고 있다"며,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소세키가 보낸 한 서간을 인용한다.  

   
 

나는 계속 '명암'을 오전 중에 쓰고 있습니다. 기분은 고통, 쾌락, 기계적 반복감, 이 상태를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 

오늘부터 쓰르라미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가을이 다가온 것일 테죠.  

나는 이렇게 긴 편지를 그냥 씁니다. 긴 해가 계속 이어지고 아무래도 해가 저물지 않는다고 하는 증거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분 속에 잠겨 있는 자신을 군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분에 젖어 있는 상태를 스스로 음미해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해는 깁니다. 주위는 매미소리에 묻혀 있습니다.

 
   

 

"긴 해가 계속 이어지고 아무래도 해가 저물지 않는다고 하는 증거로 쓰는 것입니다."  

죽지 않았음의 증거로 살아가는 삶, 그리고 그 상태를 스스로 음미하는 글쓰기. 그의 글에서 삶/죽음은, 마치 물에 반사된 빛의 명암이 서로 반전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무늬를 만들어내듯, 서로 반전을 거듭하며 서사의 순간순간을 조직하고 그 서사의 순간은 중첩되며 시간을, 삶을  직조한다.      

 그 서사의 진정한 종결은, 소세키 자신이 아닌 후세의 해석과 재창조로 맺어질 것이다. "소세키가 썼을 법한 바로 그 형식과 문체로 소세키의 세계를 연장했다."는 일본문단의 격찬을 받은 미즈무라 미나에의 '속 명암' 같은 작품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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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ris Review 의  '소설 속 대화'에 대한 기사  

  나는 왜 소설 속 인물들처럼 말하지 못할까, 헤어진 뒤에 했어야 할 말들을 주억거리며 가슴을 치고,  

  문학을 좋아하는 너와 나의 대화는 왜 문학적이지 못한 것인지, 관계 자체를 폄훼하곤 했는데...  

  말하는 언어와 읽는 언어의 낙차에서 오는 현기증,  

   일상언어와 문학적 언설의 간극은 이렇게 절감되는데,  

   왜 슈젯 없는 일상과 슈젯에 지배되는 문학의 간극에 대해선 쉽게 타협이 될까.    

      

http://www.theparisreview.org/blog/2011/01/14/excellent-dialogue-a-dubious-seduction-strategy/ 

 

Excellent Dialogue; A Dubious Seduction Strategy


January 14, 2011 | by Lorin Stein


I

   
 

Good dialogue has never saved anyone from either head banging or self-abuse, as far as I know. If anything, I think, good dialogue tends to teach us how little it resembles real speech. Real speech deals with whole-wheat crackers. That’s what it’s for. Dialogue deals with whole-wheat crackers only if those crackers tell a secret—if they reveal something about the character speaking. In this sense, dialogue is closer to lyric poetry than it is to expository prose. It does more work in less space, and it tends to deal in repressed or unconscious knowledge.  

 
   

 

   
 

Since readers of “Ask The Paris Review” are probably tired of seeing me recommend the novels of Henry Green, I suggest Philip Roth’s Deception, anything by Richard Price or Virginia Woolf or the great pioneer of dialogue, Jane Austen (yes, she depresses me, but she uncovered the possibilities of the form), or Ivy Compton-Burnett or Don DeLillo or Ann Beattie or Raymond Carver or Elmore Leonard or Eudora Welty ... The fact is, most great writers have great ears. We may not think of Henry James as a master of dialogue, but his novels nearly always turn on the ambiguities of invented speech. And this tends to be the case.
Are there any circumstances under which it might be a successful seduction strategy to quote poetry for a girl? —Anonymous 
 

I once knew a man who claimed to have seduced several women by reciting Algernon Charles Swinburne’s “Sapphics.” I never entirely believed him, and even he never pretended they were sober.

 
   

 

음...  내가 보기에 최고의 대화(대화의 모든 역학관계와 본질을 보여주는)를 쓰는 소설가는 ... 역시  나쓰메 소세키!!   

 특히 '명암'!! 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       

 도스또예프스끼보다도 체홉보다도 소세키.     

 

2. John Banville on Franz Kafka  (가디언)

 http://www.guardian.co.uk/books/2011/jan/15/john-banville-kafka-trial-rereading?CMP=twt_fd 

 카프카는 작가들이 쓴 작가론이 재밌는 작가.   (체홉도 작가들의 작가라 할 만한데, 그 어떤 체홉론을 읽어도, 나의 체홉은 그게 다가 아니야, 하는 반감이... )  좋아는 하지만, 잘 모르겠는 작가라 그런가.   

 

3. 번역가들의 책상 위에는 지금.....?  

  http://www.granta.com/Online-Only/Translations-in-the-Making  

   
  Natasha Wimmer

I’ve just finished the translation of the latest posthumous work by Roberto Bolaño, a novel called The Third Reich. The book was a joy to translate, mostly because Bolaño seems to have had such fun writing it. It’s a buoyant novel, ominous at moments but mostly just funny. I am, however, left with one lingering translation problem. One of the main characters, a South American pedal boat attendant on the Costa Brava beach where the novel is set, is covered with burn scars. Everyone calls him El Quemado, which literally means The Burned One. I’ve tried all kinds of solutions from the near literal (Burned Man) to the derivative (Scarface – OK, OK, I know I can’t use it) to the silly (El Scorcho) to the catchy-but-wrong (Scabs). My clever editor suggested Burn Victim, and that’s the placeholder for now, but I’m still not satisfied. Names are so tough. And so critical.
 
   

스페인 문학 얘기라 특별히 얻은 정보는 없지만, '번역가들의 책상'하니까 괜히 반가워서.  

사실 나는 번역가의 책상보다는, 번역가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이 더 궁금하다.  

번역하고 있는 책은 아무리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도(그 작품이 설사 볼라뇨, 나보꼬프의 작품이라 해도^^;;) 그 자체로 괴로운 독. 일상의 모든 순간을 압도하고 좀먹는다.  

그 독을 자기 직전에 겨우 붙잡은 책으로 해독해야, 다음 날 다시 책상에 앉을 기운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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