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밀린 빨래를 하고   

 요즘 배수아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니다 추천받은 '다와다 요코'의 책들을  모조리 다 주문하고,   

(와세다에서 노문학을 전공하고 독일과 스위스에서 유학했으며, 현재 독일어권 문학의 번역자이자 독일어/일본어 이언어 작가로 활동중인  여류 소설가이다. )     

   ( 이 책은 그녀의 소설.)

 (서경식 선생님과의 서한교환집이라는 이 책이 가장 기대된다.) 

 

 

 

한겨레 토요일 서평지에서 제일 좋아하는 '고전 오디세이' 칼럼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77895.html을 읽는다.

'고전 오디세이' 칼럼의 필자, 김헌 교수의  번역어들을 언제 한번 다 모아서 정리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750년에 공인된 ‘사도신경’에는 뜻밖의 구절이 있다. 예수가 죽은 뒤,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사자(死者)들의 세계, 즉 ‘음부(陰府)로 내려갔다’(descendit ad inferos)는 것이다.  
   

   

   
  예수는 죽은 자들의 영(pneuma), 또는 혼(psyche)에게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영원한 삶의 세계로 건져 올리기 위해 저승의 세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기’, 즉 카타바시스(katabasis)다.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죽으면 모든 혼백은 바람 빠지듯이 몸을 빠져나와 하데스의 세계로 간다는 것. 예외는 없다. 어두컴컴한 지하의 세계로, 하늘 아래 땅 위, 태양이 빛나는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 ‘하데스’라는 말 자체가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그려주는 혼백기독교에서 말하는 이나 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맥 빠진 여운, 존재의 희멀건 한 그림자다. 힘과 활기가 없는 허깨비이며, 살아 있던 사람의 죽은 환영이고, 스산한 유령이다. 곧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연기 같은 것. 그런 혼백들이 우울하게 널려 있는 곳, 을씨년스러운 그곳이 죽은 자들의 세계, 하데스의 세계다.

 
   

  

   
 

소크라테스는 도망가지 않고 죽겠단다. 무슨 까닭에? 지금까지 자신의 삶은 결국 잘 죽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평생을 바쳐 갈고닦았던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었으므로. 그는 진심으로 죽고 싶단다. 죽음은 그에게 끝장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자유의 시작이란다.  

제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생각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호메로스의 인간관을 지워야 했다. 아니 호메로스가 그린 혼백에 생기를 불어넣어 불멸하는 실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영혼으로 새롭게 그려내야 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게 되는 것 자체가 영혼의 카타바시스였다. 영혼은 원래 저 높은 이데아의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참모습이 가득한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을 통해 그는 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즉 아나바시스(anabasis)를 꿈꾼다.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사이. 그리스적 사유와 기독교의 신앙 사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가운데에 두고 그려진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 사이에서, 인간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서구인들은 오랫동안 사유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여운이 끝내 남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그 생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는 사유 역시 꾸준하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으니까. 혼백? 영혼? 그런 것은 없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호메로스의 희미한 혼백을 아예 지워버리며,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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