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mela Sztybel_ Leaning Left, Leaning Right_2006
  

 나쓰메 소세키의 미완성 유작 '명암'(범우사, 2007)은 그 분량도 분량이거니와(소세키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벌써 끝나고도 남았을 분량인데, 이야기상 가장 중요해보이는 메인 사건이 이제 막 숨가쁘게 전개되는 와중이다), 전체 구성이나 서술 템포가 늘어지는 면이 없지 않아, 그야말로 '미완'임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니 '미완성', '미완결'보다는 차라리 '완결불가능'에 가까운 미완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작가가 죽어 연재가 중간에서 단절('중절')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명암'의 이야기와 형식 자체가 작품의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완결불가능(종결불가능)을 전제하고/염두에 두고/의도하고 진행되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 이미 자신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알고 있던 작가의 산만함 내지는 체념의 발로라 보기에는 그 형식의 선택 자체는 너무나 치밀하게 작품 면면에 구현되어 있었다.   

 나는 소세키의 작품 중 '문'과 '마음' 그리고 '노방초(길 위의 생)'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세 작품에 공통된 점은, 이 작품들 모두 그 작품 특유의 독특한 형식을 지녔다는 점, 그 형식이 치밀하게, 작품 면면에 철두철미 구현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형식의 선택이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은 게 아니라 개인적인 상정에 불과하지만, 어쨌건 내가 파악한 소세키의 창작 흐름에서) 당연한 어떤 귀결, 수순처럼 여겨진다는 점, 즉 그 형식 선택의 추이에서 작가 자신의 예술관 내지 인생관을 건 어떤 절박함이 느껴질만큼 형식에의 천착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 작품은 다 읽고 나서 내용이나 주제를 다 차치하고 그 형식만 따로 숙고해보며 작품의 주제를 계속 반추해갈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가령 '문'에서 사계절 절기의 순환에 맞춰진 모든 형식은 그 자체로 주인공 부부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일종의 은유로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문'의 모티프가 이 순환 주기(소설의 전체 구성)에 어떤 기로와 굽이를 만들어내는지를 생각하면, 이 작품만큼 내용=형식의 등식을 절감할 수 있는 작품도 없다.  소세키의 최초의/유일한 자전소설이자, 그가 완결한 최후의 소설인 '노방초(길 위의 생)'는 내가 보기에 작가가 스스로 쓴 묘비명, 자신의 인생을 총괄하며 닫는 마지막 '문' 같은 작품이다. 그야말로 인생의 마지막 문을 닫는 자리에 선 인간이 이 정도 자세와 깨달음과 혜안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 인간의 일생이라는 시간은 대단한 것이 아닌가 싶은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소세키의 진정한 결말, 그의 최후의 말들을 선사받은 느낌이었다. 이런 최종적 수준에 도달해준 그가, 이렇게 완벽한 종장을 맺어 준 그가 고마웠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갖고 있었던 나의 선입견, 즉 "소설가의 최초 소설은 언제나 자전소설일 수밖에 없다"는, 이 작품을 읽은 후 "진정한 자전소설은 가장 마지막에 쓸 수밖에 없다"로 수정되었다. 이 작품은 소설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식의 종장이었다.   

'명암'의 한국어판에 실린 도리히 마사하루의 해설에는 '노방초'의 작자가 도달한 그 종장의 지점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마음' 발표 후 '노방초' 집필 직전에 쓰여진 수필 '유리문 안에서' 최종장의 종지부를 찍는 문장이란다. 그러니까 소세키는 이런 시야를 확립한 이후 '노방초' 집필에 들어갔던 것이다.   

   
  인류전체를 넓은 시야로 조망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찮은 것을 쓴 자신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마치 그 자신이 타인인 듯한 느낌을 품고서 역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명암', 작품론, 541쪽'  
   

 

하지만 인간은, 삶은,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과 달라서 완벽한 형식화가 되려는 찰나, 그 틀의 틈을 비어져 나와 무정형으로 계속되게 마련이다.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은 자살을 택하지만, 그래도 예술보다는 삶을 사는 쪽을 택하는 인간은, "옆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듯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어쩔 수 없는"(노방초, 86장)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살아진다. '명암'은 마지막 문을 '일단 닫은' 소설가 소세키가 그 문틈을 비어져 나온 삶을 계속 이어간 궤적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처음 읽을 때는 어떻게 '노방초(길 위의 생)'같은 작품을 쓴 작가가 다시 이런 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나 싶었다. 이런 지점, 그러니까 어떤 중간 지점, 여전히 모르겠는, 암중모색중인 끔찍한 지점으로 다시.  

   
  이 육체는 언제 어떠한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건 고사하고 지금 실제로 어떠한 변화가 이 육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명암>, 2장 14쪽)  
   

 그러나 이 작품이 파고드는 그 지점은 '다시 또 그 지점'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렇게 적나라하고 잔인할 정도로 파고들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소세키는 그 결을 낱낱이 다 헤짚고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며 집요하게 인물들의 내면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파고 들어 모든 걸 다 펼쳐보였다. 가혹할 정도였다. 특히 그가 드러내는 면면이 나의 숨기고 싶은 어떤 치졸함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중을 건드릴 때면, 얼굴이 벌개져 독서를 더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뒤에 실린 이 작품의 해설에서는 이 작품서두에 나오는 의사의 말이 이 작품의 서술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소설가로서 종장을 일단 마친 소세키가 다시 살아가기 시작한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정위하는 서두로도 읽힌다.  '명암'은 이렇게 시작한다.  

   
 

의사는 진찰 기구를 넣은 뒤에 수술대 위에서 츠다를 내려봤다. 

"역시 구멍이 장까지 이어져 있었군요. 일전에 진찰했을 때는 도중에 흉터의 돌기가 있어서 무심코 거기가 막다른 곳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는데, 오늘 소통이 잘 되게 하기 위해 그 부분을 득득 긁어내 보니까 아직도 드러나지 않는 속이 있네요."  

 
   

 

 그래도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던 것은 이 작품의 서사 템포였다. 순간 순간 빛이 반짝이고, 깊어졌다 다시 펼쳐지고, 죄어졌다 풀어지곤 했지만, 계속 고여있는 채 흐르지 못하는, 아니 흐르긴 흐르는데 정처없이 목적지 없이 그저 흐르기만 하는 것 같은 템포.  이러다 길을 잃을 것만 같은, 페이지는 점점 줄어드는데, 이 작품이 미완으로 끝나는 걸 알기에 조금 더 조금 더 앞으로 빨리 나가 조금만 더 멀리 나갔으면 하는 나의 초조함이 그 템포를 더 완만하게 만드는 듯도 했다. 상황을 묘사하는 서술의 압축과 단정함, 모든 비밀이 밝혀지려는 순간에 단칼에 베인듯 중지된 장들, 이런 소세키 특유의 서술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자꾸 미뤄지고 간섭되고 지연되고 제자리에 맴도는 정도가 거의 그 지연 자체를 즐기게 되는 수준이었다. 곪기 시작한 상처를 자꾸 들여다보고 만져서 결국 그 곪에서 오는 아픔을 유희하듯이 말이다.  

내가 소세키를 이런 식으로 읽은 적이 거의 없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나는 항상 소세키를 무척 빠른 속도로, 극도로 몰입하여, 마치 꼼짝 없이 주어진 시공간 안에 갇혀 영화나 연극을 보듯이 읽곤 했다. 소세키는 언제나 내게 '일독의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운 작가였다. 재독, 삼독에도 질리지 않은 작가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일독을 내달릴 때의 그 떨림, 가슴철렁함은 일독의 시간만이 줄 수 있기에. 그런데, '명암'의 일독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빨리 읽어버릴 마음이 들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다 읽고자 하는 동기를 잊은 채, 읽었던 페이지를 다시 음미하고 다른 각도로 이해해보기 위해 부러 다시 앞으로 돌아오곤 했다.  전체 독서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졌지만 독서하는 그 순간 순간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대목을 음미하고 곱씹게 되는 몰입도가 커서 다음 장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명연음'에서 필립 글래스의 'The Hours' 음악을 피아노로 편곡한 앨범 전곡을 듣게 되었다. 차갑고 맑은 토요일 오후였는데, 나는 번역 원고를 끼적이며 외출 준비를 하는 와중이라, 처음부터 그 곡을 집중해서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무 것도 아무 생각도 안 한 채 그저 멍하니 음악을 '응시'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무늬가 계속 만들어졌다 풀어졌다, 깊어졌다 얕아졌다 하며 나의 시선과 온 정신을 사로잡았다. 마치 나를 둘러싸고 있던 시공간의 결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속에서 안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라,  제발 이 상태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 순간 만큼은 바라기만 하면, 내가 라디오를 끄지 않으면 정말 끊임 없이 음악도 그 시간도 그 무늬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은 왠지 내가 삶의 어떤 순간을 차분하게 관조하면서 오롯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57분에 걸친 긴 음악 감상이 끝난 후 이 음악을 틀었던 정만섭 씨는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 속에, 삶을 반추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음영 속에서 인생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뭔가 멍하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감상을 표했다.   

 '명암'의 서사가 작동하는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와 음영 속에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시간, 고여서 끊임없이 무늬를 만들어낼 뿐 흐르지 않는 시간,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무시간".

 이 시간이 가진 사태의 지연성과 시간의 진행을 무화시키는 무시간성이라는 속성이 극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장면은, 물론 그 '츠다의 온천장 헤매기' 장면일 것이다. 츠다는 드디어 문제의 옛 연인을 만나러 온천장에 도착해(전체가 188장인데 172장이 되어서야 츠다는 그 온천장에 도착한다. 젠장.) 목욕을 마치고 다시 방에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지만, 이 온천장의 복잡한 미로와 같은 구조(그 묘사를 보면 마치 꿈 속에 나올 법한, 모든 통로와 계단이 미로의 일부인 집 같다) 때문에 길을 잃는다. 독자도 그도 이러다가 곧 그녀를 마주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는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고 있는 대야 앞에 멈춘다.  

   
 

반짝거리는 흰 금속제 대야가 네 개쯤 늘어 놓여 있는 가운데 니켈의 마개 꼭지 주둥이에서 흐르는 산수인지 청수인지 알 수 없는 물이 끊임없이 주르륵 떨어져서 금속제 대야는 네 개가 다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둘레를 넘치는 수정과 같은 얇은 물의 막이 아름답게 미끄러져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금속제 대야 속의 물은 뒤에서 밀리고 위에서 떨어져 양쪽에서 그것이 조용한 순간에 미세한 진동을 느끼는 듯 흔들렸다.  

수도만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온 츠다의 눈은 바로 자신이 있는 장소를 잊게 만들었다. 그는 단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손을 내밀어 꼭지를 잠가두려고 생각했을 때 간신히 자신의 우활함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희고 좁은 해협을 닮은 형태 속에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일정하지 않은 소용돌이가 묘하게 그를 자극했다.  

(....) 

그냥 그의 눈앞에 보이는 물만이 움직였다. 소용돌이 같은 형태를 그렸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늘어나기도 하고 움츠리기도 했다.                                                                                             

                                                                                                                           -<명암> 175장 492쪽.

 
   

   

 '명암'의 주인공 츠다가 드디어 문제의 그 연인과 마주칠지도 모를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 소설에서는 그야말로 절정, '키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순간에 우리의 주인공은 멍하니 대야의 물 속을 보고 있다. 그런 다음 그가 고개가 들어 보게 되는 것은 거울 속 자신이다. 그 형상이 "자신이라고 인정하기 전에 그는 그것이 자신의 유령이라는 느낌이 먼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소설 첫 장에서 병 진단을 받았던 츠다를 떠올렸다. 그는 사실 수술을 받고 회복 겸 옛 애인도 만날 겸 이 온천장에 온 것이지만, 나는 첫 장에서 의사의 병 진단을 츠다의 '사망 진단'이라 읽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죽음까지 짧지만 지리멸렬 이어진 그의 남은 시간으로, 그리고 온천 장면을 츠다의 사후 이야기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병(사망) 진단 이후의 삶, 연장된, 유예된 삶을 받아들이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종말은 유예됐다, 하지만 언젠가 닥친다. 그것도 머지 않은 때에. 하지만 그때까지 어쨌든 나는 살아가야 한다. 아픈 몸을 비척거리며 끔찍하지만 그래도 현존하는 삶을. After the event, something still happens.  

>> 접힌 부분 펼치기 >>

 

  왜냐하면 나에게 이 소설은 소세키가 사후(작가로서의 예술적 종결에 일단 도달한 다음)에 쓴, 사후로 연장됨을 전제하고  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사후를 미리 선취해 글을 쓰고 있다. 이미 죽음에 압도된 상태에서 삶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사는 매순간 미리 죽어본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도리히 마사하루는 해설에서 이 작품이 "펼치면 펼친 곳이 각각 흥미롭게 느껴지는 작품"이며, "펼치면 펼친 곳의 어느 장에도 인간 통찰의 깊은 우물과 같은 심의를 내포하고 있다"며,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소세키가 보낸 한 서간을 인용한다.  

   
 

나는 계속 '명암'을 오전 중에 쓰고 있습니다. 기분은 고통, 쾌락, 기계적 반복감, 이 상태를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 

오늘부터 쓰르라미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가을이 다가온 것일 테죠.  

나는 이렇게 긴 편지를 그냥 씁니다. 긴 해가 계속 이어지고 아무래도 해가 저물지 않는다고 하는 증거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분 속에 잠겨 있는 자신을 군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분에 젖어 있는 상태를 스스로 음미해보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해는 깁니다. 주위는 매미소리에 묻혀 있습니다.

 
   

 

"긴 해가 계속 이어지고 아무래도 해가 저물지 않는다고 하는 증거로 쓰는 것입니다."  

죽지 않았음의 증거로 살아가는 삶, 그리고 그 상태를 스스로 음미하는 글쓰기. 그의 글에서 삶/죽음은, 마치 물에 반사된 빛의 명암이 서로 반전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무늬를 만들어내듯, 서로 반전을 거듭하며 서사의 순간순간을 조직하고 그 서사의 순간은 중첩되며 시간을, 삶을  직조한다.      

 그 서사의 진정한 종결은, 소세키 자신이 아닌 후세의 해석과 재창조로 맺어질 것이다. "소세키가 썼을 법한 바로 그 형식과 문체로 소세키의 세계를 연장했다."는 일본문단의 격찬을 받은 미즈무라 미나에의 '속 명암' 같은 작품을 통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