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었다
이영란 지음 / 바른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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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컬처블룸을 통해 바른북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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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것은 때로 한 사람의 마음속에 조용히 들어가 보는 일과 닮아 있다. 《어른이 되었다》 역시 거창한 이야기보다 삶과 시간, 기억과 사랑처럼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품어본 것들을 시로 풀어낸다.

이 시집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말보다 오래 마음속에 머물렀던 감정을 한 편의 편지처럼 건네는 책이라는 인상을 준다.

특히 목차를 따라가 보면 ‘삶 → 자화상 → 여행 → 사랑’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삶을 지나 자신을 바라보고, 낯선 길을 걷고, 그 끝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 그래서 이 책의 시들은 한 사람이 살아오며 겪었을 마음의 계절들이 차례로 펼쳐지는 듯하다.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문 시는 [청춘예찬]이었다.

🔖“검은 비구름 / 하늘 가득 / 그래도 달린다”

이 문장에서 ‘그래도’라는 말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삶이 언제나 맑은 날만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비가 내리고, 태양이 온몸을 태우고, 때로는 넘어져 상처를 입으면서도 다시 움직여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런 삶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포장하기보다 절룩이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모습 자체를 청춘이라고 말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그대 이름은 / 청춘”이라는 문장은 청춘을 젊은 나이의 다른 이름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계속 걸어가는 마음까지 청춘이라면, 청춘은 특정한 나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이 시가 말하는 청춘처럼 느껴졌다.

[버틴다]도 마음에 남는다.
🔖“숨을 버틴다 / 숨을 참는다 / 몸을 세운다 / 마음을 둔다”

살아가다 보면 무엇인가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를 견뎌야 하는 날도 있다. 그럴 때 ‘버틴다’는 말은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의지가 된다. 무너지고 싶어도 몸을 세우고, 마음을 놓아버리고 싶어도 다시 마음을 붙잡는 것.

🔖“세상이 전장 같고 / 마음이 전쟁터 같을 때” 라는 구절에서는 특히 마음의 피로가 느껴졌다. 세상과 싸우는 일보다 때로는 내 마음과 싸우는 일이 더 힘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런 시간을 ‘버틴다’는 한마디로 받아낸다.
어떤 날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유리 구슬]에서는 조금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동그란 원 구슬 안에 / 우리의 마음이 보인다”

유리 구슬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산과 들, 바다와 별을 담아내는 장면은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넓고 복잡한지를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는 아주 작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기억과 사람, 풍경과 감정이 들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유리 구슬이라는 이미지로 바라본다.

그리고 [솜사탕]에서는 삶의 시간이 조금 더 다정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아빠 머리 위에 / 살포시 자리 잡은 뽀오얀 구름은 / 어릴 적 추억 속의 그 솜사탕”

어릴 때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커다랗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존재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흰 머리카락과 함께 기억된다. 어린 시절의 풍경과 지금의 시간이 한 장면 안에서 포개지는 듯하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부모의 나이 듦을 알아보게 되는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을 다룬 시들에서는 기억과 그리움의 정서가 더욱 선명해진다.
특히 [지우개]는 사랑을 지우고 싶다는 말과 끝내 지워지지 않는 마음 사이의 모순을 담고 있다.

🔖“지울 수 있을까 / 떨쳐낼 수 있을까 / 그대를 향한 그리움"

사람의 기억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흔적과는 다르다. 잊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다. 검은 귀밑머리, 그네 위의 모습, 국화꽃 향기,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손목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등장하면서 그리움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감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지울 수 있을까 /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을” 이라는 물음도 그래서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지우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모습인지, 그 사람을 향했던 자신의 마음인지조차 모호해진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기억의 형태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눈길]에서는 사랑의 방식이 조금 더 조용하다.
🔖“그는 가끔 돌아본다 / 그의 눈길 끝엔 언제나 내가 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 앞서 걷는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 가끔 돌아보는 눈길과 그 눈길 끝에 있는 사람. 아주 짧은 장면인데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사랑을 큰 사건으로 표현하기보다 ‘돌아보는 시선’ 하나로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생각하게 된 것은 제목인 《어른이 되었다》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잘 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픔과 그리움과 후회를 품은 채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청춘예찬]처럼 절룩이며 달리고, [버틴다]처럼 숨을 참으며 하루를 지나고, [솜사탕]처럼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누군가의 나이 듦을 알아차리고, [지우개]처럼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마음 한편에 남겨두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말하는 ‘어른’은 시간을 통과해 온 사람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읽고 난 뒤 남은 것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마음’, ‘시간’, ‘그리움’, ‘버팀’ 같은 단어들이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것을 잊지만, 마음에 남는 것은 아주 사소한 장면일 때가 많다. 눈길 한 번, 흰 머리카락 한 올, 익숙한 향기, 걷던 길, 돌아보던 사람의 모습처럼.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순간들을 시로 붙잡아 놓은 책처럼 느껴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이 있어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비가 와도 달리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억지로 지우려 하기보다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수많은 계절을 품은 채 오늘까지 걸어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아직 걸어가야 할 내일을 조용히 바라보게 하는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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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는 도시의 청소부입니다 - 도시의 가장 낮고 뜨거운 일터에서 발견한 인생의 존엄
장샤오만 지음, 허유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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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이면에서 한 사람의 노동과 삶을 900일 동안 따라간 기록을 읽으며 노동이 가진 가치와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듯하여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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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 (선공개 특별판) ㅣ 자음과모음 시집 1
에밀리 정민 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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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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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제목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에서 ‘짐승’이라는 단어는 인간보다 낮은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되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을 다른 생명과 같은 자리로 돌려놓는 말처럼 느껴졌다. 인간만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우리 역시 하나의 생명체이고 욕망하고 사랑하고 상처 입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시인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인간의 다정함만을 아름답게 그리지도 않고, 인간의 잔혹함만을 고발하지도 않는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상처를 주고, 자연을 아끼면서도 자연을 소비하고, 누군가를 기억하면서도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모순적인 존재로 인간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 시집의 ‘짐승’은 인간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우리는 얼마나 소비하는, / 소비된 짐승인가.”라는 문장이 특히 그러했다.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것을 소비한다. 물질뿐 아니라 자연을 소비하고, 다른 생명의 시간을 소비하고, 때로는 타인의 감정과 사랑까지 소비한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 역시 시대와 사회, 자본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소비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소비하는 존재’와 ‘소비되는 존재’가 결국 하나의 인간 안에 겹쳐 있다는 점.

시집을 읽으며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는 느낌도 받았다.
말과 상어와 앵무새와 개, 사슴과 고래가 등장하고, 그들의 생과 죽음이 인간의 삶과 연결된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시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인간과 동물이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모두 살아남으려 하고, 사랑하고, 상실을 경험하고, 자신의 존재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또한 짐승이다”라는 생각은 인간을 조금 더 겸손하게 만드는 말처럼 다가왔다.


특히 오래 시선이 머물렀던 문장은 [진화론]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이었다.
🔖“욕망’은 틀린 단어 같고
‘사랑’은 너무 평범하고 ‘헌신’은 너무 성스럽다고 느낀다.
이 평생을, 당신을 묘사하는 데 쓰겠다.”

사랑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욕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흔하고,
‘헌신’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지나치게 거룩한 마음.
그런데 시인은 결국 그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평생을 쓰겠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어떤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말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많은 단어를 알고 있어도 어떤 사람을 향한 마음 하나를 온전히 옮겨놓기란 어렵다. 그래서 계속 쓰고, 또 쓰게 된다.

사랑이란 완벽하게 설명되는 감정이 아니라 끝내 설명하려는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어디]의 문장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내 마음도 자주 다른 어디에 가 있다.”

이 짧은 문장이 이상할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몸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가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가 있을 때가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도 과거의 누군가를 생각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존재하지 않는 ‘다른 어디’를 상상한다.

특히 이 시에서 죽음과 떠남을 ‘끝’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사랑했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믿고 싶은 마음.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 상실을 견디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아주 다정한 상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 시집의 슬픔은 절망으로만 남지 않는다.
슬픔을 기억으로 바꾸고, 기억을 사랑으로 바꾸며, 사랑을 다시 살아갈 힘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


또 하나 마음에 남은 것은 [Affection]에서 ‘애정’과 ‘병’이라는 두 의미를 가진 단어를 가져온 방식이었다.

🔖“Affection은 ‘애정’이란 뜻, 또 ‘병’이라는 뜻.”

사랑과 병이 하나의 단어 안에 겹쳐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서늘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호하고 싶어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집착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좋은 결과만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연을 자신의 방식대로 소비하거나,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그들의 삶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이용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도 소유와 통제의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서 사랑은 사랑 안에 포함된 모순과 폭력까지 함께 들여다본다. 그것이 이 시집을 더욱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아시아를 떠나 아시안이 되다]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분류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나를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만들어낸다.”

누군가를 하나의 범주로 규정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개인의 경험까지 동일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아시아인’,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이름 안에도 수많은 역사와 문화와 개인의 경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 시는 정체성을 내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어떤 범주 안에 놓이는지를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인간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 하면서 내 인생이 바뀌길 기다린다.”

이 문장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곧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의 비용은 치르고 싶지 않은 마음.
지금의 삶이 달라지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내가 먼저 움직이는 일은 미루는 마음.

이 모순은 환경 문제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를 걱정하면서도 누리는 편리함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북극곰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소비 습관과 생활방식이 그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까지 생각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이 시집의 자연은 인간의 행동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남은 것은 인간에 대한 아주 복잡한 감정이었다.

인간은 잔인하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잔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한다.
하지만 그 파괴를 슬퍼하고 다시 살리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면서도 다시 사랑하고, 기억하고, 애도하고, 곁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아마 이 시집은 바로 그 모순을 포기하지 않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놓인 [다음 생]의 문장이 그래서 더욱 깊게 다가온다.
🔖“이 생에서 나는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
매해 더 다정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실패한다.”

완벽하게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다음에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실패와 노력 사이에 사랑이 놓여 있는 것 같다.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욕망과 폭력, 차별과 무지, 사랑과 연민을 한꺼번에 꺼내 보여준다.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너무 정확해서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그 끝에서 시인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미래는 아찔하다. / 미래는 아찔하지만 당신과 계속 사는 것이 / 기다려져 견딜 수 없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세계는 완벽하지 않다.
살아가는 동안 상처와 실패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계속 살아가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

세상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세계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계속 살아간다.

인간이 모두 완벽하지 않은 생명체라면,
서로의 잔인함만큼 서로의 연약함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서로가 어떤 짐승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사랑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
나는 어떤 짐승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욕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잔인해지기도 하는 존재이면서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가.
완벽하게 다정한 사람이 되는 데 매번 실패하면서도,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시인이 말하는 ‘나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어떤 짐승인지 단번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알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상처와 연약함까지도 외면하지 않고,
끝내 사랑하는 것.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를 읽고 난 뒤 남은 것은
완벽하지 않은 우리를, 그래도 서로 이해해보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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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
오가와 사토시 지음, 박대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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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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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 대부분은 문장이 아름다운지, 이야기가 흥미로운지, 인물이 매력적인지부터 살핀다. 반대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면 좋은 문장을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복선을 깔고 이야기를 구성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오가와 사토시의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는 이런 익숙한 질문의 방향을 조금 비튼다.

처음부터 “만인을 위한 ‘소설 쓰는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출발하는 이 책은, 소설가가 무언가를 쓰기 전에 머릿속에서 어떤 사고를 거치는지를 해부하는 책에 가깝다. 그래서 읽는 동안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지?’라는 질문보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고, 그것을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소설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다.

📌“소설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책띠지 문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아무리 좋은 것을 표현했다고 생각해도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작품은 작가의 머릿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소설은 혼자 하는 독백인 동시에 타인에게 건네는 언어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정보의 순서’도 무척 흥미로웠다.
🔖“정보의 순서는 소설이라는 공간을 구축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나니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긴장감이나 몰입 역시 문장력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정보라도 언제, 어떤 순서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독자가 받아들이는 감정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사실을 처음부터 모두 알려주는 것과 필요한 순간까지 감춰 두는 것, 인물의 감정을 먼저 보여주는 것과 행동을 먼저 보여준 뒤 그 감정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경험으로 만든다.

그래서 좋은 글을 쓰는 일이란 아름다운 문장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독자가 어떤 정보를 어떤 순간에 만나게 할 것인지 설계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생각하게 만든 부분은 소설가가 ‘잘 모르는 세계’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소설가는 잘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는,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조금 역설적으로 들린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인데, 왜 굳이 잘 모르는 사람과 세계를 써야 할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소설의 세계는 바로 여기에서 넓어지는 것 같다.
자기 경험만 반복해서 이야기한다면 글은 안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계가 좁아질 수 있다. 반면 내가 직접 살아보지 않은 삶을 상상하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순간 인간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소설을 쓰는 일은 나라는 하나의 경험에서 출발해 수많은 인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소설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상에서도 자신이 경험한 것만으로 타인을 판단하기 쉽다. ‘나는 이랬으니까 너도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타인의 세계는 사라진다. 내가 모르는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책에서 날카롭게 다가온 부분은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라’는 도발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저자는 정말 자신의 가치관을 모두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에서 잠시 벗어나야 새로운 소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특히 이런 질문이 오래 남았다.
🔖“독자보다 나자신을 중요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꽤 아픈 질문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쓰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독자도 당연히 중요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질문은 소설뿐 아니라 서평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그대로 돌아왔다.
책을 읽고 느낀 것을 글로 옮길 때도 나의 감상만 늘어놓으면 그것은 ‘나를 위한 기록’에 머물 수 있다. 내가 왜 이 문장을 인상 깊게 읽었는지, 그 감정이 읽는 이에게도 닿을 수 있도록 어떤 맥락으로 풀어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작법서이면서 동시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담은 책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개념은 ‘오독’이었다.
🔖“소설이 종종 ‘오독’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소설의 ‘오독’은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탄생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에 내놓지만, 그 순간부터 작품은 더 이상 작가만의 것이 아니다. 독자는 자신의 기억과 경험, 상처와 기쁨을 가지고 작품을 읽는다. 그러니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좋은 소설은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 넣을 공간을 남겨 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의미를 작가가 친절하게 설명해 버리면 작품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삶과 연결할 여지는 줄어든다. 반대로 조금의 빈틈이 있는 이야기는 독자가 자신의 경험으로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읽고 나서 ‘작가가 이런 뜻으로 썼을까?’보다 ‘나는 왜 이 장면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될 때가 있다.

작가가 건넨 이야기가 독자의 삶을 통과하면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순간.
그것이 문학이 가진 놀라운 힘일지도 모르겠다.


목차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제목이 있다.
📌‘복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한 문장부터 이 책이 얼마나 기존의 작법 상식을 뒤집으려 하는지 느껴졌다.
이야기를 잘 만든 작품에는 치밀한 복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복선을 얼마나 많이 심었는가’가 아니라, 독자가 작품 전체를 경험한 뒤 앞선 정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구조 자체일 것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여기에 복선을 심어야지’라고 계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정보가 독자의 인식 속에서 어떻게 다시 연결되는가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익숙하게 알고 있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뒤집어 보게 한다. 그리고 그 뒤집힌 자리에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AI가 소설과 글쓰기까지 빠르게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지금, 이 책의 문제의식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저자는 소설을 인간의 인지를 언어로 압축하는 활동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독자는 그 압축된 언어를 자신의 인지와 경험을 통해 다시 풀어낸다.

🔖“소설의 재미는, 애초에 표현하고자 했던 ‘어떤 인간의 인지’의 깊이와, 그것을 압축하는 기술이 더해져 결정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문장을 잘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그 문장 뒤에 어떤 인간의 인식과 경험이 존재하는가라는 점이다. AI가 인간처럼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될수록 오히려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가’가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창작에서 가장 쉽게 복제하기 어려운 것은 문장을 만들어낸 삶과 인식의 깊이일 테니까.

책을 읽은 뒤 특히 ‘나를 위한 문장’이라는 표현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글을 쓸 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작 독자가 무엇을 받아들일지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같지 않다.

그리고 어쩌면 그 차이 때문에 문학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면 독자는 자신의 삶으로 그것을 다시 읽는다. 그 과정에서 원래 작가가 생각하지 않았던 의미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통제된 작품보다 독자가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올 수 있는 작품이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은 아닐까.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를 읽으며 느낀 것은 글쓰기가 ‘생각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문장을 잘 쓰는 기술은 연습할 수 있다. 구조도 공부할 수 있고, 다양한 작품을 읽으며 표현법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왜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소설가 지망생에게만 필요한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평을 쓰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말로 잘 표현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누군가와 제대로 소통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꽤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내가 가진 생각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압축하고, 그 언어가 다시 타인의 경험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살아나도록 만드는 것.

그렇다면 소설은 한 인간의 인지를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아주 정교한 커뮤니케이션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지막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진심으로 소설을 찾으려고 하는가?”

읽고 난 뒤 남은 것은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겠다는 조심스러움,
그리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생각을 끝까지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무언가를 표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한 번 더 의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읽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언어화’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정말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
이 책이 내게 남겨 준 물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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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언어화를위한소설사고 #오가와사토시
#소설 #창작론 #글쓰기 #작법 #커뮤니케이션 #A시대
#책추천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서평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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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알러지 ㅣ 10대가 10대에게
황서현 지음 / 이지북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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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자음과모음 (@jamobook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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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서현의 《첫사랑 알러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열일곱의 교실 창가, 몰래 적어 내려간 이름, 함께했던 여름, 쉽게 꺼내지 못했던 마음과 편지…… 책 속에 등장하는 첫사랑의 풍경이 꼭 내 기억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만큼은 어딘가 익숙했다.

나에게도 사랑을 처음 알게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 마음을 크게 흔드는 일인지 처음 알았고, 함께 있는 평범한 하루가 특별해지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잠시 스쳐 지나간 풋풋한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삶의 많은 장면을 지나온 사람으로 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첫사랑’은 내게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첫사랑은 꼭 가장 오래 사랑한 사람일 필요도, 가장 아름답게 끝난 사랑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몸으로 알게 된 사람, 그리고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나로 데려온 사람이 첫사랑인지도 모른다.

황서현의 《첫사랑 알러지》는 그런 첫사랑의 시작과 열병, 상처와 이별,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까지 55편의 시를 통해 따라간다.

책을 읽으며 오래전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스무 살의 나와, 그때의 그 사람.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만들어 갔던 시간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시집의 사랑이 ‘열일곱의 풋사랑’으로만 읽히지 않았던 이유가.

누군가에게 첫사랑은 교실 창가 맨 뒷자리의 사람이겠지만,
나에게 첫사랑은 어느 순간 인생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오래된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사랑이 끝났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내 안에 무엇을 남겼는가일지도 모른다고.

이 책에서 첫사랑은 교실 창가의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일기장에 반복해서 적어 보는 이름, 함께 마시는 음료, 빌려 읽은 시집, 한쪽씩 나누어 끼었던 이어폰처럼 아주 작은 순간에서 사랑은 자라난다. 그래서 이 시집의 사랑은 평범한 순간 하나하나가 사랑 때문에 특별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남는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달콤하게 느껴진다. 아직 삶의 쓴맛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나이에 찾아온 사랑은 그 자체로 세계의 전부가 된다. 그래서 《첫사랑 알러지》 속 사랑에는 서툼과 충동이 함께 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그 마음을 숨기기보다 일기장에 적고, 편지를 쓰고, 시를 쓴다.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조금 부끄럽거나 지나치게 솔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서툼이 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느꼈다.

사랑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밤새 고민하고, 말 한마디를 수십 번 되뇌고, 전하지 못한 마음을 글로 남긴다. 《첫사랑 알러지》는 바로 그 시절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일기장]에 담긴 정서는 첫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잘 보여 준다. 누군가의 이름을 일기장에 계속 적는다는 것은 말로 고백하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마음속에만 담아 두기에는 너무 벅찬 감정을 글자 속에 붙잡아 두는 행위에 가깝다.

이 부분에서 첫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첫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보다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과 오래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그 이름만큼은 오래 간직하고 싶고, 그때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잊고 싶지 않아서 기록한다. 그래서 일기장은 사랑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지나가 버릴 시간을 붙잡아 두는 작은 저장소가 된다.

이 시집에서 여름이라는 계절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여름은 모든 것을 크게 만든다. 햇빛도 뜨겁고, 비도 갑작스럽고, 감정도 쉽게 달아오른다. 《첫사랑 알러지》에서 여름은 사랑의 온도를 보여 주는 계절처럼 느껴진다.

[그해 여름]에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바라보면서도 그 계절의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사랑은 끝났는데 여름은 기억 속에서 계속된다. 그래서 사랑이 끝난 뒤에도 특정한 계절만 되면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르는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우리의 여름은 허구였다]에 이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완벽해 보였던 사랑의 장면에서 어느 순간 작은 균열을 발견한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상대도, 나도, 함께 있는 시간도 모두 특별하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그때의 사랑이 진짜였더라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했던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정말 행복했고, 정말 간절했고, 정말 오래갈 것이라고 믿었다. 다만 사람의 마음과 관계는 계속 변한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을 '허구'라고 부르는 마음에는 사랑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그 시간을 놓아주려는 성장이 함께 들어 있다고 느꼈다.

이 지점에서 《첫사랑 알러지》는 풋풋한 첫사랑을 예쁘게 기록한 시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부에서 사랑이 시작되고, 2부에서 사랑을 앓고,
3부에서 사랑의 흔적을 되짚고, 4부에서 그 사랑을 편지처럼 봉인한다.

목차만 보아도 감정의 방향이 선명하다.
처음에는 마음이 앞으로 달려간다. 그러다 사랑 때문에 아파한다.
이후에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
마지막에는 그 마음을 품은 채 다음 계절로 넘어간다.

이 흐름이 첫사랑의 기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은 끝나는 순간보다 끝난 뒤에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실제 관계는 끝났는데 기억 속에서는 계속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 사람도 나를 좋아했을까', '조금만 달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질문이 뒤늦게 생겨난다. 그래서 첫사랑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바라보는 방식 속에서도 계속 만들어진다.

특히 [시인]과 [시집을 빌리던 내가]가 오래 남는다.

한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결국 자신이 직접 시를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랑이 사람에게 남기는 흔적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 준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와 함께하는 것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한 사람을 사랑한 경험이 한 사람의 취향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누군가 때문에 시를 읽기 시작했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면, 그 사랑은 관계가 끝난 뒤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내 안에 남긴 변화까지 함께 떠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부분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첫사랑은 반드시 첫 번째로 사랑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처음 깊이 사랑했던 경험, 처음으로 누군가 때문에 내가 달라졌던 경험, 처음으로 내 마음을 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경험까지 모두 첫사랑의 일부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사랑은 더 이상 '너와 나의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성장의 기록이기도 하다.

[다정한 사람]에 담긴 생각도 인상적이다.
사랑을 특별한 사건이나 거창한 고백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따뜻한 말 한마디와 안부를 묻는 행동처럼 작고 일상적인 다정함에서 사랑을 발견한다는 점이 좋았다.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은 의외로 거대한 사건이 아닐 때가 많다. 잘 지내느냐고 물어봐 주었던 순간, 말을 기억해 주었던 순간, 힘들 때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주었던 순간처럼 아주 작은 친절이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말하는 사랑은 처음에는 뜨겁지만 마지막에는 조금 따뜻해진다. 처음의 사랑이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이었다면, 마지막의 사랑은 한 사람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마음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이 시집의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첫사랑 알러지》라는 제목도 그래서 재미있다.

알러지는 몸이 특정한 물질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현상인데, 이 책에서 첫사랑 역시 처음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하게 몸과 마음을 흔드는 감정처럼 그려진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동시에 아프고, 가까워지고 싶은데 가까워질수록 더 불안해지는 감정.

하지만 알러지가 시간이 지나며 가라앉듯 사랑의 열병도 언젠가는 잦아든다.
그렇다고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랑을 '이겨 낸다'는 것은 사랑을 완전하게 잊는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에서 드러나는 '조금 덜 아파하겠다'는 마음도 그런 의미로 읽혔다. 사랑을 다시 만나더라도 이전처럼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아픔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사랑 알러지》는 첫사랑에 관한 시집이면서 동시에 처음 사랑한 뒤 조금 달라진 나에 관한 시집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의 첫사랑을 훔쳐본 듯한 느낌보다 내 기억 속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나에게도 한때 유난히 자주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는지,
그 사람의 이름을 몰래 적어 본 적이 있었는지, 함께했던 계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끝난 관계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끝내지 못한 적은 없는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나간 사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이제는 그저 '그때의 나를 만들어 준 한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까지도.

《첫사랑 알러지》가 남긴 여운은 아마 그 지점에 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로 찾아오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교실 창가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여름날의 바다였을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오래 주고받은 편지 한 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비슷할 것 같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사람은 내 인생의 한 장면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 장면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 그것이 첫사랑의 힘일 것이다.

사람은 떠나도 계절은 남고, 계절이 지나도 기억은 남고,
기억이 희미해져도 그때의 나는 내 안에 남는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고 나서 남는 것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서툴고, 얼마나 솔직했으며, 그 마음 때문에 얼마나 조금씩 자라났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첫사랑은 끝났지만, 첫사랑을 하던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의 설렘도, 서툼도, 상처도, 쓰다 만 편지도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한 문장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 그 문장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픈 기억이라서가 아니라, 한때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삶의 기록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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