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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었다
이영란 지음 / 바른북스 / 2026년 7월
평점 :
🔻이 게시물은 컬처블룸을 통해 바른북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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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것은 때로 한 사람의 마음속에 조용히 들어가 보는 일과 닮아 있다. 《어른이 되었다》 역시 거창한 이야기보다 삶과 시간, 기억과 사랑처럼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품어본 것들을 시로 풀어낸다.
이 시집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말보다 오래 마음속에 머물렀던 감정을 한 편의 편지처럼 건네는 책이라는 인상을 준다.
특히 목차를 따라가 보면 ‘삶 → 자화상 → 여행 → 사랑’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삶을 지나 자신을 바라보고, 낯선 길을 걷고, 그 끝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 그래서 이 책의 시들은 한 사람이 살아오며 겪었을 마음의 계절들이 차례로 펼쳐지는 듯하다.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문 시는 [청춘예찬]이었다.
🔖“검은 비구름 / 하늘 가득 / 그래도 달린다”
이 문장에서 ‘그래도’라는 말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삶이 언제나 맑은 날만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비가 내리고, 태양이 온몸을 태우고, 때로는 넘어져 상처를 입으면서도 다시 움직여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런 삶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포장하기보다 절룩이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모습 자체를 청춘이라고 말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그대 이름은 / 청춘”이라는 문장은 청춘을 젊은 나이의 다른 이름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계속 걸어가는 마음까지 청춘이라면, 청춘은 특정한 나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이 시가 말하는 청춘처럼 느껴졌다.
[버틴다]도 마음에 남는다.
🔖“숨을 버틴다 / 숨을 참는다 / 몸을 세운다 / 마음을 둔다”
살아가다 보면 무엇인가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를 견뎌야 하는 날도 있다. 그럴 때 ‘버틴다’는 말은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의지가 된다. 무너지고 싶어도 몸을 세우고, 마음을 놓아버리고 싶어도 다시 마음을 붙잡는 것.
🔖“세상이 전장 같고 / 마음이 전쟁터 같을 때” 라는 구절에서는 특히 마음의 피로가 느껴졌다. 세상과 싸우는 일보다 때로는 내 마음과 싸우는 일이 더 힘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런 시간을 ‘버틴다’는 한마디로 받아낸다.
어떤 날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유리 구슬]에서는 조금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동그란 원 구슬 안에 / 우리의 마음이 보인다”
유리 구슬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산과 들, 바다와 별을 담아내는 장면은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넓고 복잡한지를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는 아주 작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기억과 사람, 풍경과 감정이 들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유리 구슬이라는 이미지로 바라본다.
그리고 [솜사탕]에서는 삶의 시간이 조금 더 다정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아빠 머리 위에 / 살포시 자리 잡은 뽀오얀 구름은 / 어릴 적 추억 속의 그 솜사탕”
어릴 때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커다랗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존재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흰 머리카락과 함께 기억된다. 어린 시절의 풍경과 지금의 시간이 한 장면 안에서 포개지는 듯하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부모의 나이 듦을 알아보게 되는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을 다룬 시들에서는 기억과 그리움의 정서가 더욱 선명해진다.
특히 [지우개]는 사랑을 지우고 싶다는 말과 끝내 지워지지 않는 마음 사이의 모순을 담고 있다.
🔖“지울 수 있을까 / 떨쳐낼 수 있을까 / 그대를 향한 그리움"
사람의 기억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흔적과는 다르다. 잊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다. 검은 귀밑머리, 그네 위의 모습, 국화꽃 향기,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손목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등장하면서 그리움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감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지울 수 있을까 /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을” 이라는 물음도 그래서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지우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모습인지, 그 사람을 향했던 자신의 마음인지조차 모호해진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기억의 형태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눈길]에서는 사랑의 방식이 조금 더 조용하다.
🔖“그는 가끔 돌아본다 / 그의 눈길 끝엔 언제나 내가 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 앞서 걷는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 가끔 돌아보는 눈길과 그 눈길 끝에 있는 사람. 아주 짧은 장면인데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사랑을 큰 사건으로 표현하기보다 ‘돌아보는 시선’ 하나로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생각하게 된 것은 제목인 《어른이 되었다》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잘 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픔과 그리움과 후회를 품은 채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청춘예찬]처럼 절룩이며 달리고, [버틴다]처럼 숨을 참으며 하루를 지나고, [솜사탕]처럼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누군가의 나이 듦을 알아차리고, [지우개]처럼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마음 한편에 남겨두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말하는 ‘어른’은 시간을 통과해 온 사람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읽고 난 뒤 남은 것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마음’, ‘시간’, ‘그리움’, ‘버팀’ 같은 단어들이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것을 잊지만, 마음에 남는 것은 아주 사소한 장면일 때가 많다. 눈길 한 번, 흰 머리카락 한 올, 익숙한 향기, 걷던 길, 돌아보던 사람의 모습처럼.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순간들을 시로 붙잡아 놓은 책처럼 느껴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이 있어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비가 와도 달리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억지로 지우려 하기보다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수많은 계절을 품은 채 오늘까지 걸어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아직 걸어가야 할 내일을 조용히 바라보게 하는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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