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
가브리엘 웨스턴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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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더퀘스트 출판사로부터 [오퀘스트라 4기]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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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해부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들여다보는 일일까.
뼈와 근육, 장기와 혈관, 피부와 신경을 하나씩 살펴보는 일일까.
아니면 그 몸을 가지고 살아온 한 사람의 시간과 기억, 사랑과 상처까지 들여다보는 일일까.

평소 나 자신의 몸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심장이 뛰고, 폐가 숨을 쉬고, 콩팥이 혈액을 걸러내고, 간이 묵묵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바라보았고, 평소에는 ‘나’와 ‘몸’을 거의 하나처럼 생각하지만, 질병이 찾아오는 순간 몸은 낯선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은 바로 그 낯선 몸속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장기 하나하나를 해부하는 대신,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책의 시작부터 인상적이었다. 죽은 몸을 바라보면서 저자는 그 몸을 해부학적 대상이 아니라 한때 분명한 삶을 살아냈던 사람으로 상상한다. 손가락 하나를 보면서 그 손이 어떤 일을 했을지, 누구를 사랑했을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를 떠올린다.

그 장면을 읽으며 해부학이라는 학문이 생각보다 훨씬 인간적인 학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분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한 인간을 다시 조립하는 것.

그래서 책 속의 🔖“죽은 해부학은 거짓 해부학이다.”라는 문장이 오래 남았다.

몸은 죽은 순간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을 품고 있지만, 그 흔적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장기의 위치와 기능만 알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몸을 살아 있는 삶과 연결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질병을 몸의 ‘고장’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현대 의학은 몸의 이상을 발견하고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데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환자에게 질병은 검사 결과에 적힌 수치 하나가 아니다. 투석을 받는 사람에게 질병은 일주일에 몇 번 병원에 가야 하는 일정이 되고, 그 사람의 여행과 직업과 인간관계와 미래의 계획까지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콩팥에 관한 장에서 등장하는 이 문장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시간의 자유는 자신의 일정을 마음대로 짤 수 있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움직이면서 그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유다.”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픈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은 건강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즉 내 인생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시간까지 조금씩 빼앗길 수 있다.

그래서 만성질환을 이해한다는 것은 질병의 증상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깊이 생각하게 만든 것은 피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피부는 내가 끝나고 세상이 시작되는 경계다. 피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나이고, 피부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아니다.”

피부는 몸을 감싸고 있는 조직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피부는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동시에 외부와 접촉하게 만드는 기관이기도 하다. 완전히 닫힌 경계라면 세상과 접촉할 수 없고,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나라는 존재를 지킬 수도 없다.

저자가 피부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관계와 삶의 방식까지 확장된다.
인간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닫기도 하지만, 완전히 닫아버리면 사랑이나 위로 같은 것도 들어올 수 없다. 나를 보호하면서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몸의 구조를 설명하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는 지점들이 흥미로웠다.

🔖“허파는 인생의 책갈피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면 우리는 그 아기를 세상에 맞이한다. 사랑하는 이가 마지막 숨을 내쉬면 우리는 그가 영원히 떠났음을 안다.”

탄생과 죽음을 연결하는 가장 단순한 행위가 ‘숨’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살아 있는 동안 너무 당연하게 숨을 쉬고 있지만, 그 사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숨이 어려워지는 순간, 비로소 평범했던 호흡이 얼마나 큰 생명의 행위였는지를 깨닫는다.

건강하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프지 않고, 숨이 잘 쉬어지고,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잠들 수 있는 평범한 하루. 그 평범함이 사실은 몸이 매 순간 만들어내고 있는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해부학에 사회적·역사적 관점까지 끌어들인다는 점이었다.

성기와 유방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몸을 배우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객관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질문을 던진다. 오랫동안 의학의 언어와 시선이 특정한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왔다면, 그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거나 왜곡되어 이해된 몸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여성을 설명하는 기존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여성이 지금까지 가짜를 강매당했다”고 강하게 표현한다.

이 부분은 해부학적 지식의 수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아는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엇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느냐에 따라 같은 몸도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장 이야기도 흥미롭다.
저자는 과거의 해부학적 설명이 새로운 관찰과 발견에 의해 바뀌어온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의학에서도 ‘언어’와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체에 관한 진실은 해부학의 문제인 것만큼이나 스토리텔링의 문제이기도 하다.”

몸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 언어가 달라지면 몸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질병을 ‘고장’이라고 부르면 환자는 고장 난 사람이 되기 쉽고, 질병을 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일부로 바라보면 그 사람의 경험과 감정까지 함께 보게 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몸을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몸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몸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무엇보다 저자가 자신의 몸과 가족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 책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외과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자신의 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몸을 치료하던 의사도 어느 순간 환자가 될 수 있고, 수술을 집도하던 사람도 수술대 위에 누울 수 있다. 그 사실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를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좁힌다.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의사가 언젠가는 아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는 늙고 병들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몸을 영원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평소 몸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일정한 시간 동안 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죽음과 장기기증을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과 연결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죽은 사람의 심장이나 간, 콩팥이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음과 삶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한 사람에게 끝이 되는 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의학적인 사실을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고 나는 내 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피부밖에 보지 못했고, 몸무게가 늘거나 줄면 숫자를 확인했고,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만 신경 썼다.

하지만 그 몸 안에서는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수많은 장기들이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심장은 하루 종일 뛰고, 폐는 계속 숨을 쉬고, 콩팥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간은 손상된 상황에서도 회복을 시도한다.

나는 몸을 ‘내가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내가 살아가기 위해 잠시 함께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동반자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몸은 완벽하지 않다.
늙고, 상처받고, 병들고,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불완전함을 실패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상처와 질병, 노화와 죽음까지도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안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인생의 해부학》은 해부학 책이면서 동시에 삶에 관한 책이다.

몸을 이해하는 일이 곧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

그리고 아마 이 책을 읽고 나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숨 한 번’이나 ‘심장 한 번의 박동’조차 조금이나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몸 안에 살면서도 몸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 몸이 아픈 순간에야 비로소 얼마나 몸에 의존해 살아왔는지를 깨닫는다.

몸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삶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의 몸과 삶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

언젠가 마지막 숨을 내쉬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의 숨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몸을 해부한다는 것은 사람을 해부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읽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책을 읽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프지 않은 오늘, 숨 쉬는 오늘, 걸을 수 있는 오늘.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하루가 사실은 몸이 온 힘을 다해 나에게 건네고 있는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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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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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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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결국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인가?’
제목만 보면 인간의 행동과 선택, 사랑과 이타심마저 유전자의 생존 전략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이야기를 하는 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1976년에 처음 출간된 《이기적 유전자》가 5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책을 넘어, 인간이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되는 이 부분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의 보존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근본 이유다. […] 지금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으로 생각하지만, 유전자라는 훨씬 오래된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 역시 생명의 역사 속에서 유전 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생존 기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섬뜩하면서도 놀랍다.

그러나 이 책의 매력은 인간을 유전자의 꼭두각시로 결론 내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기억에 남은 문장이 있다.
🔖“우리는 타고난 이기적 유전자와 필요하다면 주입받은 이기적 밈에도 맞설 힘을 지닌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간에 대한 선언은 더욱 인상적이다.
🔖“우리, 지구에서 우리만이 이기적 복제자의 독재에 반역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유전자의 힘을 이해한 인간이 그 힘을 어떻게 바라보고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책으로 읽혔다.

인간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고, 환경의 영향을 받고, 문화와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관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조차 사실은 오랜 진화와 사회적 학습의 영향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 완전히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자유인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인식하고, 그 영향에 그대로 끌려갈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지를 고민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성격이나 도덕적 판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표현은 유전자가 욕심을 부리거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유전자의 복제와 보존을 중심에 놓고 생명의 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설명 방식이다.

오히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타적인 행동도 새롭게 보인다.

왜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가.
왜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서로를 돕는 행동이 나타나는가.
왜 서로 다른 개체들이 협력하는 경우가 존재하는가.

‘모든 생명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유전자와 자연선택이라는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을수록 ‘이기적’이라는 제목보다 생명은 어떻게 협력과 이타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생명의 출발점을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결과로 나타난 인간의 행동은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아마 의식은 뇌의 세계 시뮬레이션이 자기 자신의 모델까지 포함할 만치 너무나 완벽해질 때 생겨나는 듯하다.”

‘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뿐 아니라,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화를 내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지?’라고 물을 수 있고,
어떤 욕망이 생겼을 때도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라고 되물을 수 있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의 본능이나 욕망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이기적 유전자》가 말하는 인간의 특별함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유전자의 영향을 받지만 그 영향을 관찰할 수 있고, 본능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그 행동을 반성할 수 있으며, 현재의 욕망을 넘어 미래의 결과를 상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위대함은 유전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움직이는 힘을 인식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50주년 기념판에서 특히 흥미롭게 와닿은 부분은 AI와 진화에 관한 이야기다.

1976년의 독자라면 ‘유전자 중심으로 생명을 바라본다’는 발상 자체가 상당히 급진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 도킨스의 시선은 생물학적 진화에서 문화와 기술, 그리고 인공지능으로까지 확장된다.

특히 인간이 언어와 문화를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은 중요하게 느껴졌다.

유전자는 DNA라는 물질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지만 인간은 언어와 지식, 문화와 기술을 통해 정보를 훨씬 빠르게 퍼뜨린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생물학적 유전자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전 세대가 축적한 지식과 가치관과 기술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과정에 인공지능까지 들어왔다.
AI는 인간이 축적한 방대한 정보를 학습하고, 다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간과 AI 사이에서 정보와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복제되고 변형될까.

50주년 기념판에서 이 질문을 만나는 순간 50년 전 던져진 질문이 오늘날 AI라는 새로운 환경을 만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조금 서늘한 상상도 하게 된다.
만약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정보를 복제하고 변형하며 발전한다면, 미래의 ‘복제자’는 반드시 DNA여야 할까?

도킨스가 던지는 미래에 대한 상상은 이런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책을 읽은 뒤 떠오른 생각은
'인간은 어디까지 자신의 본능과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가'이었다.

앞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책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의 행동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할 수도 있다. 바로 그 능력이 인간에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기적 유전자》가 50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의 답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계속 뒤집어놓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문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기적 유전자』, 또는 적어도 세세한 내용을 뺀 그 주요 내용은 생명이 있는 우주의 어느 행성에서든 출판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문장은 곱씹을수록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게 됐다.

생명이 존재하고, 복제가 일어나고, 선택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진화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은 DNA에만 머물지 않는다. 문화가 되고, 언어가 되고, 기술이 되고, 인공지능이 된다.

1976년에 시작된 하나의 질문이 50년 뒤 AI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가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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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김유진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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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컬처블룸 리뷰단을 통해 북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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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아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가?


기억을 되살리는 의사와 기억을 지우는 의사.
서로 정반대의 의술을 가진 두 사람이 한 사람의 과거를 사이에 두고 맞붙는다는 설정부터 흥미로웠다. 특히 기억은 과거를 저장하는 기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관계, 죄책감과 복수심까지 좌우하는 하나의 힘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만약 내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잘려 나가고, 덧붙여지고, 조작된 것이라면 어떨까.

내가 믿어온 과거가 무너지는 순간 과연 지금의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인공 김수오는 브레인 임상연구센터의 레지던트 4년 차로, 교수들 몰래 엄마 김소희에게 기억 회복술을 시행한다. 그런데 수술을 통해 엄마의 기억을 되돌리는 일이 오히려 새로운 고통을 불러온다. 잊고 있던 남편의 존재가 되살아나면서 엄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기억이라는 것이 언제나 되찾아야 할 대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기억을 잃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 사랑했던 순간, 지나온 삶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잊고 싶은 것도 있다.

그렇다면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정말 선한 일일까.
반대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주는 것이 정말 누군가를 위한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작품은 어느 한쪽에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다. 기억 회복과 기억 제거 모두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선의라고 믿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 것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 정말 자비일까.

자비라는 이름으로 죄를 감싸줄 수 있지만, 그 자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돈과 권력,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용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은폐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자비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의를 내세운다고 해서 그 행동까지 반드시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타인의 기억과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용한다면, 선의조차 권력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주경재라는 인물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자신의 능력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수오 역시 복수와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립은 서로 다른 욕망과 가치관이 충돌하는 두뇌 싸움처럼 느껴졌다.

특히 김수오가 주경재의 의술을 동경하면서도 그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감정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상대를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인정하고, 닮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의 능력에 끌리는 감정은 인간관계에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이기도 하다.

피가 섞인 관계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니까,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 사람의 마음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세계까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 하나만 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을 단정할 수도 없고, 내가 알고 있는 기억만으로 그 사람의 과거 전체를 판단할 수도 없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기억은 바로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실제로는 전혀 다른 기억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믿었던 관계가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즉, 타인의 기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떨까.
내가 기억하는 나의 과거 역시 정말 온전한 것일까.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이런 생각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기억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는 재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특정 장면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까지 바꿀 수 있는 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기억 조작이라는 설정은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제목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의미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뒤집히고, 하나의 단서가 또 다른 의문을 만들어내면서 제목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작품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김수오가 어머니의 잃어버린 기억을 추적하면서 점점 자신이 알고 있던 가족의 모습과 실제 과거 사이에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문득 영화 [인셉션]이 떠오르기도 했다.
두 작품은 소재는 다르지만, ‘내가 믿고 있는 기억과 생각이 나를 만든다면 그것이 조작되었을 때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인셉션]이 꿈을 통해 인간의 인식과 현실의 경계를 흔들었다면, 이 작품은 기억을 되살리고 지우는 기술을 통해 과거와 정체성의 경계를 흔든다.

두 작품 모두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엄마에게 기억을 되찾아주고 싶었던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복수와 욕망, 능력에 대한 집착까지 뒤섞인다.

그래서 김수오 그 역시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복수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특히 프롤로그에서 마음에 남았던 또 하나의 문장은 이것이다.

🔖“산 자들은 기억이라는 형벌을 안고 눈을 뜬다.”

기억은 행복했던 순간을 붙잡아주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울 수 없는 고통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게 만드는 형벌이기도 하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과 기억하고 싶어도 사라져버린 기억.

그 사이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기억이란 진실 그 자체라기보다 내가 누구인지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는 일이 언제나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진실을 아는 것이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마주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 작품은 이 생각이 머무는 지점에서 복수극과 SF라는 장르를 넘어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혈연'에 대한 생각이었다.
피가 섞였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혈연 안에서도 서로 다른 욕망과 상처, 가치관이 존재한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그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무엇을 했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으며, 무엇을 선택했는지가 아닐까.


《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는 기억을 되살리고 지우는 미래 기술을 이야기하지만, 읽고 난 뒤 남는 생각은 의외로 아주 인간적인 것이었다.

내가 가진 기억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정말 얼마나 알고 있을까.

뇌를 다루는 두 의사의 치열한 두뇌싸움과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을 따라가는 재미도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무리 가까워도 완전히 건너갈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은 더 행복해질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기억까지도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순간 지금의 나 역시 조금씩 사라지는 것일까.


기억은 때로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어쩌면 그 아픔까지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안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용서한다는 것.

미래의 기술을 빌려 이 세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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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골 전시관
마타요시 에이키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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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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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한 구의 인골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인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류큐의 신녀였다고 말하는 사람,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외지인이라고 보는 사람, 전쟁의 기억과 연결하는 사람까지 저마다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를 인골 위에 덧씌운다.

마타요시 에이키의 《인골 전시관》은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 죽음에 부여하는 의미를 바라보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을 짚어낸 문장이었다.
🔖“조상을 알고 싶고,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고 메이테쓰는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한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고, 내가 속한 가족과 공동체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과거가 자랑스러운 것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를 기억하는 일에는 언제나 약간의 욕망이 섞이는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인 과거를 알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믿고 싶은 과거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골 전시관》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이런 부분들을 무겁게 설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만,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그 모습이 어딘가 우습기도 하다. 사랑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고, 자신의 혈통과 자존심에 집착하고, 돈과 명예 앞에서 흔들린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들이 이 작품을 오히려 생생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질문은 ‘인골은 누구의 것인가?’였다.

고고학자에게 인골은 연구해야 할 자료일 수 있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조상이나 신성한 존재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관광과 전시를 위한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중 무엇이 진짜일까.

🔖“보통 사람에겐 전혀 보통이 아니죠. 인골은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에요.”
“연구라 해도 상대는 인간이니까 어느 정도는.”
“뼈는 뼈일 뿐이죠, 물리적으로 보면.”

과학과 신앙, 역사와 기억 사이의 간극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물리적으로 보면 뼈는 뼈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사람이었고, 누군가의 조상이었으며, 누군가가 살아온 시대의 흔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사람의 유해 앞에서 물질 이상의 것을 보게 된다. 동시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은 사람을 이용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책 속에서 특히 눈에 들어온 부분은 ‘층’에 관한 이야기였다.
🔖“‘층’이라는 건 다양한 삶의 흔적이 쌓인 ‘시대의 카펫’ 같은 거니까 그 변화를 판별하는 건 매우 중요하거든요.”

역사를 하나의 층층이 쌓인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이 소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한 시대 위에 또 다른 시대가 놓이고, 그 위에 새로운 기억이 쌓인다. 류큐 왕국의 역사, 일본의 통합 과정, 전쟁의 기억, 미군기지 문제, 민속과 신앙, 오늘날의 오키나와가 모두 하나의 장소 안에 포개져 있다.

그래서 오래된 인골 하나를 파내는 일은 유골 하나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아래에 무엇이 더 있었는지를 묻게 만든다.


작가가 자신의 원풍경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오키나와의 깊은 시간을 소설 속에 끌어들였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개인의 기억과 지역의 역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한다고 생각했던 풍경에도 나보다 훨씬 오래된 시간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어릴 때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보았던 돌담이나 바다, 오래된 건물, 낡은 골목에도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겹겹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씁쓸하면서도 재미있었던 부분은 인골 하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조상을 찾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혈통을 증명하고 싶어 하며, 누군가는 신앙을 이야기한다. 또 누군가는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누군가는 전시와 돈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모두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인간적인 욕망이 들어 있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이군요. 사람을 그렇게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사랑이니까.”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메이테쓰가 인골과 전시관에 마음을 쏟는 과정 역시 역사적 관심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과 자신의 과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은 마음이 뒤섞이면서 전시관은 점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 자체만 보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안에 자기 자신의 욕망과 기억을 함께 비춰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오히려 그 마음이 더 깊어지는 법이라던데요.”
“사랑은,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언제나 이겨요.”

처음에는 조금 냉정하게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바꿀 수도, 기억을 수정할 수도,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없다.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 계속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인골이 갖는 의미와도 연결되는 것 같았다.

인골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골을 바라보는 사람은 계속 변한다.
그 사람이 변할 때마다 인골의 의미도 달라진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중요한 질문은 ‘그 여인이 누구인가’에서 ‘나는 왜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가’로 바뀌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인골 속에서 오키나와인의 깊은 내면 풍경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인골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려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공부하는 일도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알고 싶어서 역사를 바라보지만, 과거를 통해 현재의 나를 이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은 누구였을까?’라는 질문은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질문이 되고,

‘이 땅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나는 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인골 전시관》의 인골은 기억과 정체성, 역사와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오래 남은 생각은 사람은 왜 자신의 믿음에 맞는 과거를 만들고 싶어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은 현재에도 계속 만들어진다.
같은 유골을 두고도 누군가는 조상을 보고, 누군가는 연구 자료를 보고, 누군가는 역사적 상징을 보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 역시 완전히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인골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인골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다.

말하는 것은 언제나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가족의 역사도, 한 사람의 기억도, 한 사회의 역사도 어쩌면 비슷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실 위에 기억이 쌓이고, 기억 위에 해석이 쌓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니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골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과거를 바라볼 때 얼마나 많은 ‘나’를 그 위에 겹쳐 놓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정말 그 사람의 역사인가,
아니면 당신이 믿고 싶은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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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퀘렌시아
온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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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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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면서 수없이 많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진다.

누군가에게는 집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여행지일 수도 있으며,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낯선 곳일 수도 있다. 너무 지쳐버린 날에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퀘렌시아》를 읽으며 계속 마음에 남았던 단어가 바로 ‘퀘렌시아’였다.

투우장에서 지친 소가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자신만의 안전한 장소. 아무리 거칠게 싸우고 상처를 입었어도 그곳에 들어가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자리.


연우에게는 딸의 죽음이 있고, 아내의 병이 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원망과 죄책감이 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과거의 어느 한 장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건은 끝났지만 기억은 끝나지 않고, 사람은 떠났지만 그 사람과 관련된 감정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우가 청연재로 향하는 것은 자신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삶으로부터 잠시라도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연재에서 연우가 만나는 것은 극적인 구원이나 단번에 모든 상처를 없애주는 해답이 아니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의 춤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기억을 다시 들여다보는 아주 느린 시간이다.

이 부분이 좋았다.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 “이제 잊어”, “용서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또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다.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실패처럼 느끼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변화는 꽤 현실적이었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그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 시선이 머물렀던 문장이 있다.

🔖“타인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만큼만 보일 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남과 싸운 적이 없다.
……늘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우리는 타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가진 기억과 경험, 기대와 두려움을 통해 상대를 해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날에는 아무렇지 않은데 어떤 날에는 상처가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상대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늘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는 문장은 생각은 오래하게 만든다.

사람과의 갈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내 안의 기준과 싸우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왜 싫을까.
저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왜 자유롭지 못할까.

질문의 끝에는 ‘타인’보다 ‘나’가 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철학적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너무 오래 들어서 익숙한 질문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진지하게 바라보면 상당히 낯설다.


《이미, 퀘렌시아》는 불교의 무아와 연기, 인드라망과 현존이라는 사유를 통해 이 질문을 계속 밀어붙인다.

특히 ‘무아’를 “나는 없다”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굉장히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의 사유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정된 ‘나’라는 틀에 모든 것을 가두지 않을 때 오히려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내가 나를 하나의 단단한 실체로 붙잡고 있을수록 상처도, 분노도, 자존심도 단단해진다. 반대로 그것들이 계속 변하고 흘러가는 것임을 바라볼 수 있다면 마음에도 틈이 생긴다. 그 틈이 어쩌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보석은 제빛을 품고 있어도 마주한 빛이 있어야 드러나잖아요.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 서로를 비추기 위해서 아닐까요.”

사람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관계 속에서 얼마나 많이 드러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도 내 안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을 수 있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준 사람을 통해서야 비로소 내가 가진 좋은 면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함께했던 시간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일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드라망’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나는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내가 먹는 음식부터 내가 사용하는 물건, 내가 나누는 말과 관계까지 수많은 존재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 사람의 삶 역시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섬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연우의 상처 역시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의 변화 또한 혼자 이루어지지 않는다. 청연재에서 만난 사람들, 함께한 시간, 사소한 음식과 풍경, 대화와 침묵이 조금씩 연우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치유’는 누군가가 나를 고쳐주는 행위라기보다 내가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치유’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상처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경험은 더욱 그렇다.
그 사람을 잊는 것이 치유라면, 잊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치유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애도는 망각과 다르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면서도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상태.
슬픔이 존재하지만 슬픔만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닌 상태.

이 책이 말하는 회복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 속에서 연우가 마주하는 것은 과거를 삭제하는 방법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법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이 오늘의 나를 영원히 규정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퀘렌시아에 대한 설명도 인상 깊었다.
🔖“힘들고 지쳤을 때 쉬어 가는 곳. 칼이 등에 박혀 피가 흘러도 그곳에서는 안심하는 거죠. 거기 있으면 소는 두려워하거나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안식처’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 보였다.

안식처는 반드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어야 할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더라도 잠시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곳,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무너진 채로 있어도 괜찮은 곳이 진짜 안식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방향 전환을 한다.
퀘렌시아를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자리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제목의 ‘이미’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곳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곳.
찾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생각과 기억과 두려움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었던 곳.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지만 이 고요는 떠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잃고 무너져도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세상이 함께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한 부분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자리를 이야기한다.

사람은 떠나고, 관계는 변하고, 몸은 늙고,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기억마저 언젠가는 흐려진다. 그런데 그 모든 변화를 경험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자리는 남아 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소설에서는 ‘현존’과 ‘무아’라는 사유를 통해 접근한다.

그것을 반드시 어떤 초월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의 나’에게 잠시 돌아오는 것.

과거의 한 장면에 붙잡혀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아주 잠깐 삶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이미, 퀘렌시아》는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인간을 오래 바라보는 소설에 가까웠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도 ‘무엇을 깨달았다’는 느낌보다 몇 개의 질문이 남는다.

지금 무엇으로 나를 규정하고 있을까.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과거는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퀘렌시아는 어디일까.


삶이 무너졌을 때 다시 살게 하는 것은 때때로 거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오늘 한 끼를 먹고, 한 번 숨을 쉬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다시 잠드는 아주 평범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괜찮아지는 것’도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 퀘렌시아》의 마지막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보다 ‘어디에 이미 있었는가’를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평화를 찾아 먼 곳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오래 바깥만 바라보느라 이미 내 안에 있었던 고요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안전한 곳이 어쩌면 아주 멀리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이미 열려 있는 자리일 수도 있다는 것.

퀘렌시아는 도착해야 할 곳이 아니라,
뒤늦게 알아보게 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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