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필적 고의
기윤슬 지음 / 한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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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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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는 법률 용어를 인간 심리에 끌어들여
“무심함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결국 이 소설은 ‘살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방관’의 기록,
그리고 우리가 매일 저지르는 작은 미필적 고의에 대한 고백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를 외면하지 않았는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침묵은, 누군가를 죽게 한 건 아닐까?”


현주가 유미에게 건넨 “잘돼야 해”라는 말은
그녀 자신의 주문이자, 우리 모두의 변명입니다.

이 소설은 꼭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전히 인간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필적 고의》는 ‘누가 범인인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가 죄인인가’의 이야기입니다.
현주는 살인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살인자’로 불립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알면서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뒷이야기이자, 동시에 우리 앞에 맞닥뜨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외면한 타인의 고통,
‘나와 상관없다’며 넘긴 순간들이 모여
결국 누군가의 생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차가운 문체로 증명합니다.


기윤슬(奇潤瑟) 작가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와 도덕적 회색지대를 세밀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로 주목받는 신예입니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사회적 약자, 여성의 내면, 도덕적 죄의식과 같은 문제를 꾸준히 다루며 ‘가장 평범한 사람이 가장 깊은 죄를 짓는 순간’을 집요하게 탐구해왔습니다.
《미필적 고의》는 그런 그녀의 작가적 세계가 집약된 작품으로, 2024년 출간 당시 “법과 심리, 도덕이 교차하는 한국형 심리 스릴러의 결정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 Dolus eventualis)’란 범죄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행위를 한 심리 상태를 의미하는 법률 용어입니다.
쉽게 말해,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설마 죽겠어?’ 하며 행동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작가는 이 법률적 개념을 인간의 심리적 죄의식으로 확장합니다.
즉, 🌿“나는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그 결과를 알고도 방관했다면 그것은 과연 무죄인가?”라는 질문이 이 소설의 출발점입니다.


작가는 작품 말미에 이렇게 밝힙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 타인의 인생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의 인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이 소설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즉, 『미필적 고의』는 살인을 다루는 범죄소설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묵인’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초상을 그린 심리 드라마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이렇게 묻습니다.
⁉️“살인을 방관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윤슬 작가의 《미필적 고의》는 법률 용어 하나로 시작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어두운 윤리를 깊숙이 파고드는 심리 스릴러입니다. 제목 그대로 “미필적 고의” ― 즉, 어떤 행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심리 상태 ― 를 중심으로, 작가는 ‘도덕적 무감각’이 만들어낸 비극을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작품은 살인을 직접 저지르지 않은 한 여자가, 자신이 외면하고 방관한 죽음을 다시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핵심은 단순히 ‘죄의 자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일상 속에서 저지르는, 작지만 결코 무고하지 않은 폭력에 대한 고발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결혼을 앞둔 주인공 현주가 정체불명의 메시지를 받는 장면입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행복에 사로잡혀 있던 그때, 메시지 내용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생을 죽인 살인자.’”
단 한 문장이 그녀의 세계를 뒤흔듭니다.

이 메시지는 과거에 묻어두었던 죄, 즉 의붓동생 유미의 죽음을 다시 끌어올립니다.
현주는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방조했고, 심지어 ‘죽어도 상관없다’고 바랐던” 과거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살인’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익명의 스토커가 보낸 메시지는 그녀가 회피해온 죄책감을 다시 불러일으킵니다.

그 순간, ‘미필적 고의’라는 단어는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이 됩니다.


현주는 어릴 적부터 📌“좋은 인생을 타고난 사람은 좋은 인연을 만나고 안전하게 살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못한 인생이라 여겼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 되어야만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신념이 그녀를 파멸로 이끕니다.

의붓동생 유미는 언제나 사랑받으려 애썼지만, 현주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습니다.
📌“나는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내가 무시해도 자꾸 친한 척 굴면 자매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멍청한 유미의 순진한 믿음을 매번 깨뜨려주고 싶었다."

현주는 냉소적으로 유미를 조롱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을 묘하게 즐깁니다. 이 감정은 우월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복잡한 심리이며, 소설의 도덕적 핵심을 구성합니다.

현주는 유미가 위험한 장소에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녀를 그곳으로 보냅니다.
그곳이 바로 화재로 유미가 죽게 되는 퍼펙트 호프입니다.
📌“어디까지나 바꾸고 싶은 것은 내 인생이지 유미의 인생이 아니었으니까. 유미의 죽음은 내게 하나의 기회였고, 나는 그 기회를 타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유미의 죽음을 통해 사회적 계층 상승의 발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부도덕한 성공이며, 작품은 바로 그 성공이 언젠가 반드시 ‘균열’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작가는 ‘미필적 고의’라는 개념을 통해, 행위의 법적 책임을 넘어선 도덕적 책임을 묻습니다.
현주는 “내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자신을 변명하지만, 법률적으로조차 그것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댓글 한 줄이, 현주가 피하려 했던 자기 고백의 증거가 됩니다.

그녀는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방관했을 뿐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얻은 삶을 ‘성공’이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소설을 ‘사회적 범죄 소설’로 확장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고통 위에 서 있는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누군가의 절망이 누군가의 기회로 바뀌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 속 ‘미필적 고의’입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제는 외로움과 결핍의 윤리입니다.
📌“사람이 제일 두려워해야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그건 바로 외로움이란다. 외로움을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이 나 같은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거란다.”
이 대사는 현주의 내면을 가장 정확히 드러냅니다.
현주는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고, 그래서 사랑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욕망은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절규였습니다.

그녀는 완벽한 남자 석현과의 결혼으로 모든 것을 회복하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가면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석현의 시선도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그 순간 현주는 깨닫습니다
― 아무리 성공해도, 사랑받지 못한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벌레 먹은 사과와 같단다. 겉으로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그 흔적은 반드시 나온단다.”
이 문장은 잔혹하지만 진실입니다.
상처는 덮을 수 있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인간의 위선은 폭로됩니다.


작품 후반부에서 현주는 진실을 마주합니다.
그녀를 괴롭힌 스토커의 정체, 그리고 유미의 죽음에 얽힌 또 다른 반전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작가는 복수나 정의의 실현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을 알게 된 후의 공허함을 강조합니다.
📌“진실이란 건 항상 모르느니만 못하다는 거.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고 사는 게 속 편하다고 하잖아. 사실 우리는 다 속고 사는 게 아닐까? 그걸 깨닫기 전까지 속았다는 걸 모를 뿐이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저는 제 안의 ‘작은 미필적 고의’를 수없이 떠올렸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요청을 외면했던 순간, 불의를 보고도 침묵했던 시간,
그리고 ‘내 일이 아니니까’라며 발을 뺀 적들.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누군가를 조금씩 죽게 한 건 아닐까?

《미필적 고의》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선사하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책의 진짜 가치입니다.
이야기를 덮는 순간, 우리는 현주의 고백을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듣게 됩니다.


이 소설은 묻습니다.
“살인을 방관하는 것은 살인이 아닌가?”
작가는 이 질문을 통해 도덕적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선의는, 때때로 악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미필적 고의》는 단지 한 여자의 추락 서사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도덕적 해부학서입니다.
결국 인간의 가장 큰 죄는, ‘모른 척한 죄’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담담히 말합니다.
📌“사는 일이 누구에게나 때로는 고통스럽겠지만, 모두가 원치 않은 삶의 고통이 안온한 평화로 바뀌는 순간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문장은 현주를 위한 작가의 기도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처럼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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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
시오세 마키 지음 / 그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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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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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는 저승이라는 배경 아래,
‘사랑받지 못한 자’의 슬픔을 다루지만,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그가 남긴 기억과 관계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소설의 진짜 저승사자들은 ‘영혼을 데려가는 자들’이 아니라,
사라진 이들의 존재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잘가”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너는 분명 이 세상에 있었다”고 증명합니다.

시오세 마키의 문장은 섬세하고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인간애가 흐릅니다.
삶의 끝에서조차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 했던 영혼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당신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남아 있었다.”


시오세 마키(汐瀬真暉)는 일본의 신예 작가로, 인간 내면의 상처와 치유, 그리고 생과 사의 경계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야기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본 작품은 그녀의 데뷔작이자, 제29회 전격소설대상 미디어워크스문고상을 수상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시오세 마키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의 증거”라고 말하며, 이를 저승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풀어냈습니다.


작품의 주요 배경인 삼도천(三途川)은 일본 불교와 민속신앙에 등장하는 저승으로 가는 강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사람은 죽으면 반드시 이 강을 건너야 저승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의 행위나 머뭇거림은 곧 생전의 미련, 후회, 사랑, 그리고 미완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작가는 이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사이노카와라 주식회사’라는 독특한 조직을 창조합니다.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이 회사는 단순한 사후 세계의 행정 기관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였습니다. 즉, 이 소설은 사랑과 기억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화입니다.


시오세 마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사랑받고 싶은 마음’으로 봅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받지 못한 영혼’은 살아 있으면서도 외면당하고 단절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살아 있었던 증거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은, 고인이 쌓아온 인생이 길고 무거울수록 힘들다.”

이 문장은 작가의 메시지를 압축합니다.
기억한다는 행위가 곧 사랑의 연장이며,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 존재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는 저승이라는 판타지적 공간을 빌려, 사랑받지 못한 삶들이 어떻게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일본 제29회 전격소설대상 미디어워크스문고상 수상작으로, 죽음 이후의 세상을 다루지만 정작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기억의 의미입니다.


소설의 무대는 삼도천 강변, 즉 삶과 죽음의 경계선입니다.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강. 사람들은 이곳을 삼도천 강변이라 불렀다”

이 문장은 저승이라는 초현실적 공간을 묘사하는 동시에, 인간이 느끼는 ‘고독의 깊이’를 상징합니다.

이곳에 존재하는 '사이노카와라 주식회사’는 망자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회사입니다. 그들은 육체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각자의 미련과 후회를 안은 채 누군가의 마지막을 돕습니다. 그들의 일은 📌“사랑받지 못했다고 믿는 존재들의 마지막 인사를 대신 건네는 일”입니다.

이 설정은 판타지적이지만, 실은 현대 사회의 ‘돌봄 노동’ ― 간병인, 장례지도사, 사회복지사 ― 의 은유로 읽힙니다.
세상이 외면한 이들의 마지막 곁에 서서,
📌“당신은 분명 사랑받은 적이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일.
그것이 바로 사이노카와라의 직원들이 하는 일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도모는 부모에게 방임된 채 살아온 여덟 살 소녀입니다.
그녀는 죽어서도 여전히 📌“있지, 나 엄마를 만나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믿는 아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사랑을 갈망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픕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모성 서사가 아닙니다.
도모의 욕망은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버리는 세상에서 왜 아이는 부모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도모의 여정은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이타루가 그녀를 돕는다는 설정은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의 상처를 대신 치유하는 은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화에서는 ‘젠지’와 ‘롄화’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일찌감치 젠지를 포기했고, 본인도 스스로를 포기했다고 했다”

젠지는 언제나 동생에게 밀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필요한 존재다”라는 절망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그는 타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 ‘롄화’를 만나며 처음으로 ‘사랑’을 배웁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사랑마저 허락하지 않습니다.
법적 신분, 언어의 장벽, 경제적 불평등 ― 이 모든 현실적 조건이 그들의 감정을 질식시킵니다.

젠지가 죽은 뒤에도 롄화는 그를 완전히 잊지 못합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을 거예요. 분명 그렇게 다짐했기 때문에 당신이 젠지 씨에 대해 물었을 때 화가 났던 것 같아요”

이 문장은 ‘사랑의 부재’가 남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죽은 자의 로맨스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존재의 무가치함’에 사로잡히는가를 드러냅니다.
이 작품이 판타지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은 사회적 리얼리즘 소설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타루는 형을 잃은 상실의 기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가 영혼을 인도하는 일을 선택한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구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속죄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동료 지카게 역시 과거에 죽은 자이며, 둘은 서로의 상처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이타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또다시 누군가를 빠뜨리면 어떡하지. 그 대상이 지카게라면 더욱 무섭다”

이 문장은 누군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표현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기억의 윤리’를 배웁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해서도 안 돼” ― 이 말은 작품 전체의 결론이자, 인간 존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타루는 망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며,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함으로써 자신도 다시 살아납니다.


이 회사의 직원들은 망자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일은 ‘망각에 저항하는 노동’입니다.
이것은 장례지도사나 사회복지사, 혹은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윤리적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사람은 죽으면 끝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끊임없이 증명합니다.
죽음이 삶의 종결이 아니라, 관계의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는 믿음입니다.

삼도천 강변은 🌿“사랑과 원망, 망각과 기억, 단절과 연결의 경계선”입니다.
이타루는 그 경계 위에서 배웁니다
―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 짧은 행동이 한 존재를 다시 ‘살리는 일’임을.


책의 제목이자 핵심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

이 문장은
사랑받지 못했던 존재가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사랑을 전해받는 장면입니다.
그 인사를 건네는 이타루는 결국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건네는 셈입니다.
📌“너 역시 누군가에게는 사랑이었다.”


이 책은 죽음의 세계를 그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현대 사회의 결핍된 관계, 고립, 무연(無緣)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사이노카와라의 세계는 ‘죽은 자의 사회’가 아니라, 관계를 잃은 자들의 사회입니다.

이타루와 도모, 젠지와 롄화, 지카게는 모두 “사랑받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다만 너무 늦게, 너무 조용히, 그 사랑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결국 ‘기억의 복원’이자 ‘사랑의 복기(復棋)’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를 다시 세상에 존재하게 만듭니다.
이타루가 삼도천 강변에서 한 일은 그저 그뿐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행위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구원이었습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기억의 다른 이름이다.”

《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는 죽음의 세계에서 오히려 ‘삶의 윤리’를 배워가는 소설입니다.
이타루의 노 젓는 소리가 잦아드는 순간, 독자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한
― 그 사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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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아즈텍 신화 - 국내 최초 나우아틀어 원전 기반 아즈텍 제국의 신화와 전설 드디어 시리즈 9
카밀라 타운센드 지음, 진정성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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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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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아즈텍 신화》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생의 순환”이라는 철학서입니다.
카밀라 타운센드는 정복자의 왜곡된 기록 너머에서
아즈텍인들의 시적 사유, 그들의 ‘시간의 감각’을 되살려냅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이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우리는 영원에서 시간을 빌려 쓰는 중이다.”

⁉️아즈텍 신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순간은 몇 번째 태양의 시대인가?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당신은 어떤 빛으로 타오르고 있는가?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

이 문장은 아즈텍 신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사상입니다.
그들은 태양이 매일 죽었다가 다시 떠오른다고 믿었고,
그 주기를 “삶의 은유”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또한 언젠가 사라질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이지만,
그렇기에 지금을 더 열렬히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화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거부합니다.
죽음은 “없어짐”이 아니라 “변형”입니다.
픽사의 <코코>가 보여준 “죽은 자들이 웃으며 노래하는 장면”이
바로 이 사유의 시각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카밀라 타운센드(Camilla Townsend)는
미국 럿거스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특히 아즈텍 문명과 나우아틀어(Nahuatl, 아즈텍의 고유 언어) 원문 연구를 20년 넘게 이어왔으며, 정복자의 시선이 아닌 원주민의 언어로 쓴 진짜 아즈텍의 역사를 복원해 왔습니다.

그녀의 저서 《Fifth Sun(다섯 번째 태양)》은 2020년 쿤딜 역사상(Cundill History Prize)을 수상하며, “서구의 편견을 걷어낸 새로운 역사 서술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번 한국어판 《드디어 만나는 아즈텍 신화》는 그 연구의 결정판으로, 우리가 몰랐던 아즈텍 신화의 시적이고 철학적인 세계관을 현대적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Coco) 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의 날(Día de los Muertos)”은 바로 이 아즈텍 문명의 유산입니다.
아즈텍인들은 죽음을 단절이 아닌 순환의 한 과정, 즉 “삶의 또 다른 단계”로 여겼습니다. 이 세계관은 “네 번의 멸망 후 다섯 번째 태양이 떠올라 새 세계가 시작된다”는 ‘다섯 번째 태양 신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죽은 자들의 날’은 죽음을 애도하는 날이 아니라,
죽은 자와 산 자가 다시 만나는 시간,
삶의 유한함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작가는 서구가 왜곡한 “피의 제국 아즈텍” 이미지를 벗기고, 그들이 지닌 우주론적 통찰과 시적 인간관을 드러냅니다.

또한 “아즈텍을 야만으로 단정했던 서구 중심적 시선을 넘어,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신화를 듣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즉, 정복자 코르테스의 기록이 아닌, 아즈텍인들이 직접 남긴 노래, 이야기, 설화, 제의문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타운센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즈텍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단지 과거를 탐구하는 일이 아니라,
죽음과 삶을 동시에 끌어안았던 인간의 사유 방식을 되찾는 일이다.”

작가는 ‘신화 읽기’를 세계관의 확장으로 봅니다.
그리스 신화가 인간의 욕망을, 북유럽 신화가 영웅의 운명을 노래했다면,
아즈텍 신화는 “순환과 변신의 세계관”, 즉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서양의 역사 속에서 아즈텍은 늘 ‘피의 제국’이었습니다.
인간의 심장을 바치는 의식으로 대표되는 문명. 그러나 타운센드는 말합니다. 📌“그들의 희생 제의는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 문화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문화였다”

이 문장은 이 책의 핵심을 응축홉니다.
아즈텍의 제의는 살인이 아니라 ‘우주와의 계약’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심장을 바치는 행위는 신에게 생명을 돌려주는 순환의 의식이었습니다. 태양은 인간의 피를 먹고 매일 아침 다시 떠올랐습니다.
즉, 아즈텍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을 유지하는 윤리적 행위였습니다.

이 시선의 전환은 우리가 아즈텍을 단순히 ‘정복당한 야만인’으로 읽어왔던 방식에 근본적인 균열을 냅니다.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신화를, 그들의 관점에서” 듣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책의 중심에는 ‘다섯 번째 태양의 신화’가 있습니다.
아즈텍은 네 번의 세계가 멸망하고 다섯 번째 태양이 떠오른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도래하기 전에 네 세계가 있었다. 재규어의 시대, 바람의 시대, 비의 시대, 물의 시대였다”

각 시대는 인간의 교만과 자연의 균열로 종말을 맞이했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이 신화는 단순한 창세 설화가 아닙니다. 아즈텍은 세계의 ‘순환성’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것은 생겨나고, 무너지고,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현재’란 영원의 시간에서 잠시 빌려온 찰나일 뿐입니다.

📌“아즈텍인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한 우주로부터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귀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이 인식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현대 사회가 불멸과 성장만을 추구하는 동안,
아즈텍은 ‘소멸의 아름다움’을 가르쳤습니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음 세상의 서곡입니다.


그리스 신들이 인간의 욕망을, 북유럽 신들이 전사의 명예를 상징했다면, 아즈텍 신들은 ‘균형과 변환’을 상징합니다.
태양신 토날리와 불 속으로 몸을 던져 빛이 된 나나우아친, 회개와 재탄생의 상징인 케찰코아틀의 이야기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신들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수를 하고, 스스로의 결함을 끌어안으며 변화합니다.
이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수직적 예속이 아니라, 상호 순환의 관계로 바꿉니다.
‘신의 뜻’이 곧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함께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공존의 의무’인 셈입니다.


아즈텍 문명의 수도 테노츠티틀란은
📌“물 한가운데 있는 선인장의 곡장, 독수리가 활공하고 뱀이 머무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이 도시는 단순한 정치 중심지가 아니라, 신화의 구현체였습니다.
선인장 위의 독수리는 오늘날 멕시코 국기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도시의 ‘구조’였습니다.
구불구불한 유럽 도시와 달리, 테노츠티틀란은 철저히 계획된 수상 도시였습니다.
피라미드와 수로, 시장과 제단이 하나의 우주적 질서로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질서 있는 우주(cosmos)’를 지상의 공간으로 구현하려는 시도였고, 아즈텍의 문명은 그 자체가 거대한 신화적 상징이었습니다.


1519년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상륙했을 때, 아즈텍은 이미 세계관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복자들의 기록은 그들을 “미개한 피의 제국”으로 왜곡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이 코르테스를 케찰코아틀 신으로 오해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서구 중심적인 시선에서 본 잘못된 이야기였다"

타운센드는 이런 오랜 오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아즈텍의 몰락은 ‘신앙적 오해’가 아니라, 철과 화약의 불균형한 충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죽은 자들의 날’로 이어지는 축제는, 그들의 신화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합니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전통을 보존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이다”

멕시코 사람들에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재회이며, 슬픔이 아니라 축제입니다.
그들은 무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춥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 죽은 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유는 오늘날 죽음을 ‘종말’로만 인식하는 현대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대신, 그 둘을 하나의 연속된 고리로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즈텍 문명이 남긴 궁극의 철학입니다.


책을 덮고 난 후, ‘죽음’을 처음으로 다른 언어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늘 영속과 불멸을 추구하지만, 아즈텍은 “변화와 소멸” 속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
이 단순한 명제가, 다섯 번의 세계가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이해된 것입니다.

타운센드의 글은 학문적이지만, 문학처럼 읽힙니다.
그녀는 ‘정복자의 기록’ 대신 ‘정복당한 자의 목소리’를 복원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사라진 문명의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의 질문 ― ⁉️“나는 왜 살아 있는가?” ― 에 대한 대답을 듣습니다.


《드디어 만나는 아즈텍 신화》는 신화를 ‘역사’로, 역사를 ‘철학’으로 확장시킵니다.
이 책은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복원이자, 살아 있는 인간의 성찰입니다.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 시작과 끝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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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고요한 것은 걷는사람 소설집 18
홍명진 지음 / 걷는사람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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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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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고요한 것은》은 화려한 서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독자는 더 많은 것을 듣고, 봅니다. 분홍 여사의 고독사, 미조의 부재, 장귀자의 아카이빙…
이 모든 서사는 ‘사라지는 존재들’의 무게를 감각하게 합니다. 홍명진 작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삶은 결국 무대이고, 우리는 그 무대 위에서 고요히 서로를 응시하며 살아간다.”


홍명진은 오랫동안 소설과 비평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의 가장자리에 있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담아온 작가입니다. 일상의 틈과 균열에서 포착되는 불안, 죽음과 고독,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응시를 주제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왔습니다. 이번 소설집은 그가 수년간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첫 소설집으로, “죽음의 서사를 통해 결국 삶을 이야기하는” 그의 일관된 문제의식을 집약합니다.


《밤이 고요한 것은》은 “응시의 윤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집입니다.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되거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존재들 ― 돌발성 난청을 앓는 인물, 노년의 간병자, 이름 없는 여성, 고립된 중년 ― 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화려한 사건보다 말의 여백, 침묵의 결, 사라짐의 무게를 통해 드러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평소라면 지나쳤을 타인의 그림자를 섬세하게 감각하게 됩니다.


홍명진은 <작가의 말>에서 📌“죽음의 서사가 깔려 있지만 결국은 삶의 이야기”라고 밝힙니다. 죽은 자는 말할 수 없고, 죽음을 겪는 자는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죽음을 응시하는 삶’이며, 동시에 ‘삶을 떠받치는 고요한 윤리’를 탐색하는 시도입니다. 작가는 화려한 극적 장면 대신, 누구나 맞닥뜨리는 부고 메시지, 소멸의 순간을 통해 우리 존재의 본질을 직면하게 합니다.


《밤이 고요한 것은》은 크게 소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요와 침묵 속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삶의 결을 포착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사회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채, 타인의 눈길조차 쉽게 닿지 않는 곳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을 응시합니다. 응시는 관찰이나 관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과 고요를 함께 감각하는 윤리적 행위입니다. 이 소설집이 전하는 힘은 바로 그 조용한 응시에 있습니다.


여덟 편의 단편은 모두 죽음, 상실, 고독과 같은 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창한 서사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 불현듯 들려오는 부고 메시지처럼 불쑥 찾아옵니다. <마지막 산책>에서 병든 아내를 간병하던 노년 남성은 결국 아내와 함께 ‘마지막 잠’을 선택합니다.
📌“그의 몸은 아내의 몸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죽음은 파국이라기보다, 함께 고요히 들어가는 또 다른 동반 행위로 그려집니다.

표제작 <밤이 고요한 것은>에서는 돌발성 난청을 앓는 주인공 모연이 분홍 여사의 죽음을 마주합니다. 📌“분홍 여사가 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홀로 죽어간 사람”.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요약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요히 사라지는 이웃들을 곁에 두고 살지만, 그들의 죽음조차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모자>에서 ‘나’는 과거 인연의 부고를 접하지만, 집을 나서지 못합니다. 소야 씨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나는 밤의 메뚜기 떼들 속에서도 당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이기도 하고, 내가 당신이기도 할 테니까요”.
여기서 죽은 자와 산 자, 타자와 자아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고립된 ‘나’는 부재한 타자를 통해 오히려 자기 존재를 직면합니다.

이 작품집의 인물들은 대체로 ‘중심’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무대에 서기보다, 무대 뒤편에서 다른 존재의 흔적을 기록하거나 기억합니다.
<장귀자 아카이빙>이 대표적입니다.
주인공 기란은 사라져가는 한 여성의 삶을 아카이빙합니다. 📌“낡은 흑백 필름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과 펄럭이는 깃발… 그 시간의 어딘가엔 기란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기록은 완벽한 복원이 아니라, 닿을 수 없음을 감각하는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홍명진의 인물들은 병, 갱년기, 불면, 불안과 같은 감각의 파열 속에 놓입니다.
<불면> 속 여성은 대낮에 울린 화재경보음으로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녀가 방관하고 있는 사이에도 곰팡이는 증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일상의 균열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은유합니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도 삶은, 아니 오히려 고요 속에서 삶은 더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이 작품집은 절망만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마술이 필요한 순간>에서 중년 여성은 연극을 시작한 딸을 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목적이 분명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대단한 성공을 위한 계획이 아닙니다. 때론 ‘내일 무엇을 먹을까’라는 소소한 목적조차 삶을 버티게 합니다. 소설은 독자에게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웅장한 목표가 아니라 작은 희망들임을 일깨웁니다.


<불면>의 화자는 📌“누구에게나 삶은 시연을 펼쳐 볼 수 있는 무대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삶 자체가 무대고 무대가 곧 삶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밤이 고요한 것은》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입니다. 삶은 리허설 없는 본공연입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흔들리며, 무대 뒤로 숨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요한 무대 위에서조차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감각하며, 흔적을 남깁니다.


이 책을 읽으며, ‘응시의 윤리’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작가는 인물들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사라짐을 지켜봅니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죽음과 상실을 잊거나, 외면하거나, 지나간 뉴스처럼 소비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끝내 외면하지 않고 그 곁을 머뭅니다. 그 태도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응답입니다.

또한 이 소설집은 독자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분홍 여사를 놓쳐왔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타인의 침묵을 외면하지 않고 감각하는 일, 그것이 이 책이 건네는 가장 깊은 울림이었습니다.


《밤이 고요한 것은》은 화려한 플롯이나 강렬한 사건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균열 속에서 고요를 감각하고 싶은 독자, 타인의 부재를 곁에 두고 사는 우리의 현실을 되새기고 싶은 독자에게는 깊은 울림을 줄 것입니다.

《밤이 고요한 것은》은 고요히 사라져가는 존재들의 숨결을 기록하는 책이었습니다. 응시의 윤리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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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
이훈 지음 / 오늘산책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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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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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는 신체의 절반을 잃고도 음악을 통해 삶을 회복한 한 사람의 기록입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기꺼이 살아내려는 의지, 그리고 왼손으로 건반을 채우며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모습은 독자에게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이 책은 삶을 다시 연주하고 싶은 모든 이들의 교향곡입니다.


《나는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는 역경이 불행이 아니라, 삶의 다른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저자가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된 과정은 ‘결핍이 오히려 새로운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좌절 앞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며 주저앉을 때가 있었는데, 이 책은 그 질문을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바꾸게 했습니다.


이훈은 대한민국 출신 피아니스트로, 미국 신시내티 음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응급 수술로 좌뇌의 60%를 절제하며 생명을 건졌지만, 오른쪽 신체와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을 끝내지 않고, ‘왼손 피아니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후 병원 로비에서의 첫 연주를 시작으로, 여러 무대에서 청중에게 감동과 위로를 전하며 음악가로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왼손 피아니스트의 역사는 깁니다. 레오폴드 고도프스키(Leopold Godowsky),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 등 여러 음악가가 신체적 한계를 넘어 한 손 연주를 새로운 예술의 장르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뒤 수많은 작곡가들에게 왼손을 위한 작품을 위촉해 지금까지 1천 곡이 넘는 레퍼토리가 전해집니다. 이훈은 바로 이 전통을 이어받아, 개인적 비극을 예술적 도전으로 바꿔낸 한국의 대표적인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고통은 징벌이 아니라, 삶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말하며, 좌절을 새로운 시작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전하고자 함입니다.
즉,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는 청중뿐 아니라, 삶의 무게 앞에서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살아내는 것’의 의미와 희망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지녔습니다.


이 책은 ‘인생을 다시 조율하는 법’에 관한 실제 사례 보고서입니다. 뇌졸중, 좌뇌 60% 절제, 우측마비와 실어증. 악몽 같은 진단명 뒤에 남은 건 “피아니스트”라는 정체성의 붕괴였습니다. 그런데 이훈은 무너진 자리에서 직업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먼저 삶의 태도를 회복합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살고, 기쁘게 살아야 했다”는 문장처럼.


이훈의 회복서사는 흔히 말하는 ‘멘탈 갑’의 낙관이 아닙니다.
📌“그때의 내가 할 일은… 인내하고 인정하는 것뿐”.
인정은 체념이 아니라 기준선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분명히 긋고,
그 위에서 하루 단위의 과제를 올려놓습니다.
인사 한마디조차 📌“안. 녕. 하. 세. 요.”로 쪼개어 연습하며, 언어의 복귀를 복수의 템포로 분절해 되찾아갑니다. 독자는 ‘기적’이 어느 날 성큼 오지 않고, 작은 성공의 루프로 축적된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왼손을 위한 연주곡이 1천 개가 넘는다는 걸 알고 있니?” 스승의 이 제안은, 잃어버린 기능을 덮는 응급조치가 아니라 정체성의 재작곡이었습니다. 왼손만으로 페달까지 밟아 몸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물리적 난제, 좌뇌 절제로 인한 암보(暗譜)의 어려움 등, 기술적 장벽은 높았습니다.

그는 📌“악보가 외워지지 않았고… 손가락도 마음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라고 담담히 씁니다. 그럼에도 건반 앞에 다시 앉았을 때, 그를 채운 감정은 환호가 아니라 📌“함부로 나를 뒤흔들지 못하는 고요”였습니다.
이 지점이 이 책의 백미입니다.

예전엔 “어떻게 하면 화려한 기교로 관객을 매료시킬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내 진심이 어떻게 닿을지”를 묻습니다. 기교에서 진심으로의 초점 이동—장애를 ‘결핍’이 아니라 해석의 전환점으로 만듭니다.


병원 로비에서의 첫 연주, 관객의 눈물, 그리고 가족의 헌신. 특히 어머니 대목이 오래 남습니다. 📌“어머니는 절망하지 않으셨다”. ‘돌봄의 피로’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애틋함을 빚어내는 문장이 절제되어 있어 더 먹먹합니다. 또한 레온 플라이셔 등 선배 왼손 피아니스트들로부터 받은 통찰—📌“연민을 호소하지 말고, 더 아름다운 연주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그의 음악적 윤리로 정착합니다. 위로를 주고받는 상호성이 책 전반을 이끕니다.


이훈의 언어에는 신앙이 깔려 있지만, 선포나 훈계로 흐르지 않습니다.
📌“묵묵히, 성실하게 살았다 해도… 고통은 징벌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을 섣불리 설명하지 않는 태도는, 믿음의 단단함을 오히려 설득력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의 감사는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자세의 지속에 가깝습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사했고… 왼쪽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라는 고백처럼.


이훈의 이야기는 장애와 직업의 특수성 너머로 열립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계획의 환상을 내려놓고, 가능한 범위에서 기꺼이 살겠다는 선언.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윤리를 매일 갱신하겠다는 다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왼손으로, 각자의 템포로 살아갑니다.
이 책은 그 템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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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왼손피아니스트입니다
#이훈 #오늘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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