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교유서가 시집 3
리산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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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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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


서서 글을 쓰는 사람


─ 「발자국은 꽃잎 모양」 中


「헬레네, 아름다운 헬레네」


헬레네는 제우스와 레다의 딸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미녀로 손꼽히는 반신(半神)이다.

헬레네가 가진 그 아름다움은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이 되었다.

많은 남자가 헬레네를 쟁취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은 말을 하는 상태가 아니다.

욕망의 대상이 될 뿐.

헬레네의 구혼자들은 아름다운 헬레네를 갖기 위해 전쟁을 하지만,

트로이 전쟁의 서사를 듣는 이들이 헬레네의 진정한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던가?


지난여름 무렵, 말해지지 못하고 남성 서사 속 장치로만 이용되었던 신화 속 여인의 서사를 새로 쓴 장편소설을 읽었다. 여자의 권위가 남자보다 못했던 그 오래전 스치듯 등장하고 왜곡된 여성 캐릭터에 현대의 시선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한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라는 소설이었다. 『키르케』를 읽으며 신선함과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더 많은 지워진 여성의 목소리는 얼마나 될지, 씁쓸한 마음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책 띠지에 적힌 '전 세계에서 쏟아진 찬사!'라는 문구를 보며 또다시 지워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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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표현할 길 없는 무대


(…)


당신의 언어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 구하러 갈 수 없었습니다


─ 「서서히 (눈)물로 채워진다」


2006년 가을 <시안>으로 등단하고 창비 시선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 등으로 자신만의 시를 써내려왔던 리산 시인이 교유서가 시집을 통해 새 작품을 공개했다.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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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슬픔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우리의 슬픔은 증폭되고 슬픔 외엔 관심이 없었지 우리의 슬픔은 주말이면 무럭무럭 번성하고 우리는 우거진 슬픔 속에서 잠이 들고 음악을 듣고, 이를테면 그 시절 우리는 휴일 저녁 슬픔의 전문가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웠네


─ 「Veinte Años」


이 시집을 받고 읽으며 떠올랐던 것,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대상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거나, 지워진 여성들이었다. 시인은 이러한 페미니즘적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전달이 아닌 우회하는 방식으로 또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각 장에서 언급되는 이름 '헬레네'와 '스스로를 표현할 길 없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 구하러 갈 수 없'는 언어, 그리고 누군가가 건넨 책은 '예전 책에는 없는 부분이고 상위 개념의 문제'라는 표현들. 문자조차 감히 배울 수 없었던 까마득한 과거와 오늘날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란 마치 낯선 나라의 이방인과도 같고, 토해지듯 태어나는 여성들은 영광이 이미 지나간 폐허에서 축제를 하고 숲에서는 노화를 숨기는 가장행렬을 한다.

세상에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도 겨우 물푸레나무로 만든 신발을 끌며 설산을 넘어가는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그럼에도 여성이 가지는 강인함과 희망을 비추고, 몇 년 간의 불면 이후 가하는 고작 거울을 깨는 행위는 물리적 폭력은 되지 않은 여성의 상징적 분노가 서려있다. 여성을 위한 시, 여성을 위한 시집. …아마도.


소설가 김숨과의 산문이 시집 말미에 실려있다. 아직 시 읽기가 어려운 초보 독자로서 늘 시집 뒤에는 해설이 있기를 더 바라지만, 시집의 여운을 좀 더 유예할 수 있도록 노래하는 듯한 두 사람의 이야기 역시 좋았다. 곱씹어 보면 해설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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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틴의 정원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6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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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블루홀식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전주홍 교수의 『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는 의학의 역사를 소상히 다루는 책으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 기원부터 확인할 수 있다. 책에 의하면 과학적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인간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상당 메꾸며 주술이나 종교에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이어 성경만 확인하더라도 예수가 행한 여러 기적적인 치유 능력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며, 질병 치유의 약속은 기독교가 대중적 지지를 얻고 확산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음도 지적한다.

독자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까마득한 과거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수긍하게 되지만, 지금 누군가가 질병의 치료를 위해 병원이 아니라 종교 시설이나 점집에 간다거나 또는 듣도 보도 못한 민간요법을 쓰고자 하면 대체로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종교나 주술, 민간요법으로 누군가가 치유되고, 유명한 인물들이 매스컴을 통해 줄줄이 간증을 하며 순식간에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된다면…….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 드디어 공개되었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는 의학과 경찰 소설을 합친 추리·미스터리 시리즈로 이번에 출간된 『라스푸틴의 정원』은 '사이비 종교의 치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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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타 자매는 우애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언니는 동생을 헌신적으로 보살폈고 동생은 언니를 어머니보다 더 따랐다.

부모와 자매, 네 명으로 구성된 가족.

가끔은 소소한 말다툼도 있었지만

구미타 가족만큼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집도 드물었다.


─ P.8, 「1. 묵시」 中


하지만 이상한 종교를 믿던 할머니가 동생마저 입교시키려 하자 구짱이 할머니의 이상한 신의 불단을 골프채로 박살낸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아버지가 갑작스레 난치병에 걸리게 된다. 쇼핑도, 외식도 참으며 아버지의 치료에 거의 모든 재산을 쓰지만 결국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하고, 어머니마저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자매는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그들의 분노는 효과 없는 값비싼 약과 첨단 의료를 강요하고, 가진 돈과 삶과 평온과 행복과 부모님을 빼앗은 병원과 의사에 향한다.


신부전 환자인 딸을 둔 형사 이누카이 하야토는 딸의 병문안에서 같은 병실을 쓰던 소년 쇼노 유키와 조우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키는 급작스레 퇴원을 하고 이어 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유키를 특별하게 여긴 딸 사야카는 하야토와 함께 영결식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유키의 목 아래에 이상한 멍이 있다는 사야카의 말에 수상한 낌새를 맡는다.


목 아래로 거의 틈이 없을 정도로 난 온몸의 멍. 그러나 사인은 신부전. 경찰 측에서는 학대를 의심하지만 학대의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고, 이어 공원 벚나무에 목을 맨 여성 시체가 발견된다. 그 여성에게도 똑같은 패턴의 온몸의 멍이 있었고, 하야토는 이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집안을 수사하던 중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내추럴리'라는 자연 치유 단체를.


나카야마 시치리의 모든 작품을 읽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한번 읽은 책은 늘 재미있었다. 나에게 있어 아무리 못해도 읽은 걸 후회하진 않는 믿고 보는 작가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 안정성과는 별개로 이번 『라스푸틴의 정원』은 초반부터 나의 흥미를 강하게 자극했지만.


책은 믿었던 의료시스템으로부터 온갖 좌절을 맛본 두 자매의 이야기로 시작하며 작가는 독자에게 '후더닛'과 '와이더닛'은 슬쩍 던져준다. 하지만 이어 펼쳐지는 '타살은 아닌 두 인물의 죽음'과 '교묘한 방식의 사이비적 치료', 그리고 '유명한 아이돌과 정치인의 간증'은 독자를 깊은 혼란으로 이끈다. 추리소설에서 어떻게 했는가를 뜻하는 '하우더닛'이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치료에 대한 것이라니!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뜻밖의 살인사건은 형사를 진실로 이끄는데….


겨우 70페이지밖에 안 읽은 시점에서 벌써 재미를 느꼈고,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하루 만에 읽게 만드는 필력에 감탄했다. 누군가 그랬던가, 하나의 문장을 쓸 때에는 다음 문장이 궁금해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이 책이 그랬다. 『가시의 집』이나 『카인의 오만』에선 미처 하지 못했던, '다음에 읽을 나카야마 시치리 작품은 무엇으로 할까'라는 고민을 이 책으로 하게 되었다. 너무너무 혼란스럽고, 너무너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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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 이론물리학자가 말하는 마음껏 실패할 자유
김현철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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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올라가면 마치 역병처럼 모두가 부르게 되는 노래가 있었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 어릴 때부터 내 주위의 사람들과 경쟁하길 부추기는 사회에서 이걸 외운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전공이 뭔지도 탐구할 여유도 없이 들어가고 싶은 대학교 타이틀만 따지고 만다. 오래전 일이지만 대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당연히 인서울은 갈 줄 알았고, 2학년이 되며 경기권이라도 가면 다행이라고 했고, 3학년이 되면 지방의 자취방을 알아봐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져댔던 고등학교 시절 말이다.


인터넷에 돌던 웃긴데 슬픈 짤이 있다.


​/

초1류 명문대 나와도 앞길 암담해서 자살하는데

나도 자살해서 사회에 경각심 주고 싶다

└ 너 무슨 대학 다니는데

└└ △△대

└└└ 넌 자살해도 뉴스에 안 나와

└└└└ 그럼? 롤이나 해야지


가벼운 대화처럼 보이지만 사회에 의미 있는 죽음마저 학벌이 중요함을 드러내는 익명 간의 대화. 여기에 뭐라 말이라도 하며 그들의 삶을 긍정하고 싶지만, 나도 서연고는커녕 대학조차 나온 사람이 아니라서…. 1년에 단 한 번뿐인 시험으로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리라 믿는 우리들에게 괜찮다고 해주는 어른은 정녕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지난 10월 30일, 수능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이런 사회가 주입한 경직된 사고에서 해방시켜줄 책을 한 권이 출간되었다. 인하대학교 물리학과에 재직 중인 김현철 교수의 인문 에세이,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이다. 모두가 읽어도 좋은 책이지만 무엇보다도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저자 자신이 대학 입학 과정에서 겪은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들, 그런 순간마다 느낀 감정들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일화들로 시작해, 대학 생활의 우여곡절들, 그리고 자신이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있었던 일들을 따뜻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인하대 출신이라는 타이틀로 동료가 수치심을 안겨줬던 기억도 고등학교 때 시를 쓰느라 성적이 바닥 쳤던 기억도 있었지만, 긴 세월 간 축적해온 지식과 지혜로 그런 순간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모든 학생의 삶을 긍정한다. 공부를 못할 수도 있다. 저자는 본인이 공부를 못했기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이 변수는 당연한 것이니 미적분처럼 잘게 쪼개서 해결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언한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들의 사례도 함께 들며 아직 학생들의 삶에 한껏 힘을 실어준다.


이렇게 다정히 건네는 문장에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죽어버리고 마는 청춘들에 대한 마음이 배경에 있었다. 요즘에야 비교적 덜한다 하더라도 한때 수능 전후로 안 좋은 뉴스가 들리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사회는 좀체 바뀌지 않았다. 좋은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한 이들을 배척하는 우리 사회를 향한 김현철 교수의 뼈아픈 지적은 이미 한 번 그 시기를 지나온 나에게도 꽤 깊숙이 박혀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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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듯이

사회의 그릇된 규범과 전통도 깨지면 좋으련만,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개인이 변화하지 않는데 세상이 변할 리가 없다.



전체는 단순히 부분의 합이 아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룬 거대한 복잡계에서는

어느 순간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다.

이걸 창발emergence이라고 한다.

사회가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화는 한 개인에서 시작한다.

세상은 변화를 거부해도 나는 변할 수 있다.

개인이 변하지 않고서 사회가 변할 수는 없다.


─ P.27-28, 「2. 실패할 자유: 시가 인생의 신의 한 수였음을」


살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납작하게 압축된 타이틀 하나만 알고 평생을 건실하게 살았으리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학벌이 인생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좋게 바라봐 주니까. 반짝거리는 타이틀 뒤의 이야기도 자주 들어봐야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마음껏 실패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이 넓은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로 태어난 모두가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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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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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윤석열이 당선된 뒤로 3년이 조금 못 미치는 임기기간 동안, 이게 우리나라 대통령의 자질이 맞나 의심스러웠던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때론 트라우마가 되기도 했다. 비상계엄령 선포 전에는 그저 빨리 끝나길 바라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탄핵까지의 기간 동안은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내내 탈진해 있었다. 내가 뭘 어찌할 수 있으랴, 투표 결과가 그러했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어리석은 인간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내는 동안 한 작가는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지식과 논리로 벼려낸 날카로운 펜촉을 내란 수괴에게 겨누고 있었으니 바로 고명섭 작가님이다. 2022년 3월부터 2025년 9월까지 신문과 잡지에 50여 편의 칼럼을 기고했고, 이 칼럼이 모여 지난 11월 『카이로스 극장』이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역사와 철학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나라, 우리 사회와 연결 짓고,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각 글마다의 맺음말들이 과거 연극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했던 구조와 닮아있다. 제목의 '극장'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걸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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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작동 원리대로 놔두면,

타인의 인격이 오로지 수단이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수단으로 쓰더라도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대한다는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목적의 나라는 인간의 수단화가 아예 없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는 나라,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서로를 존엄한 자율적 인격체로 대하는 나라다.


─ 제 1부,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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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억이 무수한 '나'를 관통해 전체를 이루면 집단의 기억이 된다.

그 집단의 기억이 역사다.

역사, 곧 집단적 기억이 없다면 집단을 지탱해주는 정체성이 생겨날 수 없고

정체성이 없으면 집단은 집단으로서 존속할 수 없다.

역사가 집단을 집단으로 만들어준다.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 항일독립군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 제 2부, 「26. '항일독립군인가 간도특설대인가' 역사의식과 집단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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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놀라게 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익숙한 삶의 문법을 깨뜨리는 반역적 행위에서 나온다. 시대를 거역하는 창조적 정신은 기성의 질서를 흔들기에

그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반감과 적대를 부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신을 둘러싼 적대적 문화의 압박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영감이 번개처럼 들이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을 두고

'진리 사건'이라고 불렀다.

'진리 사건'이란 '참된 것의 출현'이다.

정치에서도 참된 것은 일어난다.

창조적 영감은 우리를 묶어두고 있던 관습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 사건이 역사를 바꾸는 큰 전환의 출발점이 되느냐 마느냐는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비전과 결의가 얼마나 뚜렷하고 굳세냐에 달렸다.


─ 제 3부, 「33. 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


알고리즘이 편집한 세계를 사는 시대, 저마다 자기만의 반향실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벽을 허물어주는 도끼 같은 책. 정치의 의미도 퇴색되어가고 대화도 공론장도 점점 사라져 가는 지금, 고명섭 작가님의 『카이로스 극장』은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독서력이 턱없이 부족할 무렵, 고명섭 작가님의 『광기와 천재』를 읽고 막연하게 좋았다는 감상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저서 역시 좋다는 이야기만 하염없이 하게 된다. 역사, 철학, 정치에 공부가 될 뿐만 아니라 비판적 글쓰기의 좋은 사례라고 봐도 무방한 필력. 공감은 물론이고 배울 점도 많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면 1인분의 책임감을 위해 꼭 읽어야 할 인문교양서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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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3
로버트 시걸 지음, 이용주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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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신화의 힘, …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모든 초등학생이 빠짐없이 읽었던 만화책이 있었다. 바로 홍은영 작가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비록 출판사의 불공정한 관계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던 작품이기도 하지만 내 또래에 이 책 안 읽으면 간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신화 읽기'를 모르던, 더 나아가 책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모르던 어린아이에게 그때의 독서 경험은 그야말로 오락 본위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기는 읽었는데, 그 상태가 다시 읽기의 걸림돌이 되었고, 그러면서도 딱히 신화에 대해 할 말은 없는 그런 상태로 꽤 오랜 기간 머물러 있었다. 그런 내가 다시 읽어볼 결심을 하게 된 건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을 접하면서부터였고, 그 이후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나 신화학자 양승욱의 『처음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보다 깊이 있는 독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는 추상명사·관념의 시운전장[試運轉場]이다"라는 고 이윤기 선생님의 문장으로 겨우 오락 본위의, 그리고 문자주의적 신화 읽기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잘하지는 않았으므로 여전히 신화는 어려웠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단 하나의 타이틀 아래에 왜 이렇게 버전은 다양한 건지, 이 오래된 이야기에서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나는 어떤 해석을 끄집어내면 좋을지 그런 고민들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를 우리말로 옮겨 출간하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에서 ─ 늘 궁금한 제목의 책은 많았지만 ─ 내가 신화에 대해 가졌던 이런 고민을 어느 정도 덜어줄 책을 발견했다. 프린스턴대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신화와 종교 이론을 강의하며 『조지프 캠벨』, 『신화를 이론화하다』 등의 저술을 펴낸 로버트 시걸 교수의 『신화』라는 책이다.


아폴로도로스의 아도니스 신화와 오비디우스의 아도니스 신화 두 편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뉘는 이 신화의 해석을 통해 신화에서 파생되는 여러 이론들을 비교한다. 기원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이야기를 학자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여러 학자들은 신화에서 과학, 철학, 종교, 의례, 문학, 심리학, 그리고 구조와 정치까지 바라보았고 책의 각 장마다 이 분야들을 다루고 있다.


신화와 대립된다고 여겨지는 과학은 어떻게 신화와 연계되었을까? 온갖 의례와 종교는 신화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신화는 설명일까 이야기일까? 신화가 가지는 내재적 의미는 한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인간 보편적 심리를 가질 수 있을까?


/

신화가 이론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이론도 신화가 필요하다.

이론이 신화를 해명한다면, 신화는 이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이론을 신화에 완전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그 이론의 진리성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이론은 이론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확립되기 때문이다.


─ P.23, 「서론, 신화에 관한 이론들」


책은 '신화'에 대한 안내서가 아닌, 신화를 해석하는 틀, 즉 '신화 이론'에 대한 안내서이며, 근현대 이론에 한정된다는 한계를 서론에서 밝히지만, 상당히 유익했다.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개론서로 신화를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입문서라는 한계야 있겠지만, 이 책이 신화를 폭넓게 읽을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끄는 역할로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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