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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ㅣ 교유서가 시집 3
리산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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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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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
서서 글을 쓰는 사람
─ 「발자국은 꽃잎 모양」 中
「헬레네, 아름다운 헬레네」
헬레네는 제우스와 레다의 딸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미녀로 손꼽히는 반신(半神)이다.
헬레네가 가진 그 아름다움은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이 되었다.
많은 남자가 헬레네를 쟁취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은 말을 하는 상태가 아니다.
욕망의 대상이 될 뿐.
헬레네의 구혼자들은 아름다운 헬레네를 갖기 위해 전쟁을 하지만,
트로이 전쟁의 서사를 듣는 이들이 헬레네의 진정한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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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무렵, 말해지지 못하고 남성 서사 속 장치로만 이용되었던 신화 속 여인의 서사를 새로 쓴 장편소설을 읽었다. 여자의 권위가 남자보다 못했던 그 오래전 스치듯 등장하고 왜곡된 여성 캐릭터에 현대의 시선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한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라는 소설이었다. 『키르케』를 읽으며 신선함과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더 많은 지워진 여성의 목소리는 얼마나 될지, 씁쓸한 마음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책 띠지에 적힌 '전 세계에서 쏟아진 찬사!'라는 문구를 보며 또다시 지워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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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표현할 길 없는 무대
(…)
당신의 언어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 구하러 갈 수 없었습니다
─ 「서서히 (눈)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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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가을 <시안>으로 등단하고 창비 시선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 등으로 자신만의 시를 써내려왔던 리산 시인이 교유서가 시집을 통해 새 작품을 공개했다.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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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슬픔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우리의 슬픔은 증폭되고 슬픔 외엔 관심이 없었지 우리의 슬픔은 주말이면 무럭무럭 번성하고 우리는 우거진 슬픔 속에서 잠이 들고 음악을 듣고, 이를테면 그 시절 우리는 휴일 저녁 슬픔의 전문가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웠네
─ 「Veinte Años」
이 시집을 받고 읽으며 떠올랐던 것,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대상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거나, 지워진 여성들이었다. 시인은 이러한 페미니즘적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전달이 아닌 우회하는 방식으로 또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각 장에서 언급되는 이름 '헬레네'와 '스스로를 표현할 길 없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 구하러 갈 수 없'는 언어, 그리고 누군가가 건넨 책은 '예전 책에는 없는 부분이고 상위 개념의 문제'라는 표현들. 문자조차 감히 배울 수 없었던 까마득한 과거와 오늘날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란 마치 낯선 나라의 이방인과도 같고, 토해지듯 태어나는 여성들은 영광이 이미 지나간 폐허에서 축제를 하고 숲에서는 노화를 숨기는 가장행렬을 한다.
세상에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도 겨우 물푸레나무로 만든 신발을 끌며 설산을 넘어가는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그럼에도 여성이 가지는 강인함과 희망을 비추고, 몇 년 간의 불면 이후 가하는 고작 거울을 깨는 행위는 물리적 폭력은 되지 않은 여성의 상징적 분노가 서려있다. 여성을 위한 시, 여성을 위한 시집. …아마도.
소설가 김숨과의 산문이 시집 말미에 실려있다. 아직 시 읽기가 어려운 초보 독자로서 늘 시집 뒤에는 해설이 있기를 더 바라지만, 시집의 여운을 좀 더 유예할 수 있도록 노래하는 듯한 두 사람의 이야기 역시 좋았다. 곱씹어 보면 해설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