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 이론물리학자가 말하는 마음껏 실패할 자유
김현철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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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올라가면 마치 역병처럼 모두가 부르게 되는 노래가 있었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 어릴 때부터 내 주위의 사람들과 경쟁하길 부추기는 사회에서 이걸 외운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전공이 뭔지도 탐구할 여유도 없이 들어가고 싶은 대학교 타이틀만 따지고 만다. 오래전 일이지만 대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당연히 인서울은 갈 줄 알았고, 2학년이 되며 경기권이라도 가면 다행이라고 했고, 3학년이 되면 지방의 자취방을 알아봐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져댔던 고등학교 시절 말이다.


인터넷에 돌던 웃긴데 슬픈 짤이 있다.


​/

초1류 명문대 나와도 앞길 암담해서 자살하는데

나도 자살해서 사회에 경각심 주고 싶다

└ 너 무슨 대학 다니는데

└└ △△대

└└└ 넌 자살해도 뉴스에 안 나와

└└└└ 그럼? 롤이나 해야지


가벼운 대화처럼 보이지만 사회에 의미 있는 죽음마저 학벌이 중요함을 드러내는 익명 간의 대화. 여기에 뭐라 말이라도 하며 그들의 삶을 긍정하고 싶지만, 나도 서연고는커녕 대학조차 나온 사람이 아니라서…. 1년에 단 한 번뿐인 시험으로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리라 믿는 우리들에게 괜찮다고 해주는 어른은 정녕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지난 10월 30일, 수능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이런 사회가 주입한 경직된 사고에서 해방시켜줄 책을 한 권이 출간되었다. 인하대학교 물리학과에 재직 중인 김현철 교수의 인문 에세이,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이다. 모두가 읽어도 좋은 책이지만 무엇보다도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저자 자신이 대학 입학 과정에서 겪은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들, 그런 순간마다 느낀 감정들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일화들로 시작해, 대학 생활의 우여곡절들, 그리고 자신이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있었던 일들을 따뜻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인하대 출신이라는 타이틀로 동료가 수치심을 안겨줬던 기억도 고등학교 때 시를 쓰느라 성적이 바닥 쳤던 기억도 있었지만, 긴 세월 간 축적해온 지식과 지혜로 그런 순간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모든 학생의 삶을 긍정한다. 공부를 못할 수도 있다. 저자는 본인이 공부를 못했기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이 변수는 당연한 것이니 미적분처럼 잘게 쪼개서 해결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언한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들의 사례도 함께 들며 아직 학생들의 삶에 한껏 힘을 실어준다.


이렇게 다정히 건네는 문장에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죽어버리고 마는 청춘들에 대한 마음이 배경에 있었다. 요즘에야 비교적 덜한다 하더라도 한때 수능 전후로 안 좋은 뉴스가 들리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사회는 좀체 바뀌지 않았다. 좋은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한 이들을 배척하는 우리 사회를 향한 김현철 교수의 뼈아픈 지적은 이미 한 번 그 시기를 지나온 나에게도 꽤 깊숙이 박혀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물리학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듯이

사회의 그릇된 규범과 전통도 깨지면 좋으련만,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개인이 변화하지 않는데 세상이 변할 리가 없다.



전체는 단순히 부분의 합이 아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룬 거대한 복잡계에서는

어느 순간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다.

이걸 창발emergence이라고 한다.

사회가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화는 한 개인에서 시작한다.

세상은 변화를 거부해도 나는 변할 수 있다.

개인이 변하지 않고서 사회가 변할 수는 없다.


─ P.27-28, 「2. 실패할 자유: 시가 인생의 신의 한 수였음을」


살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납작하게 압축된 타이틀 하나만 알고 평생을 건실하게 살았으리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학벌이 인생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좋게 바라봐 주니까. 반짝거리는 타이틀 뒤의 이야기도 자주 들어봐야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마음껏 실패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이 넓은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로 태어난 모두가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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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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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윤석열이 당선된 뒤로 3년이 조금 못 미치는 임기기간 동안, 이게 우리나라 대통령의 자질이 맞나 의심스러웠던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때론 트라우마가 되기도 했다. 비상계엄령 선포 전에는 그저 빨리 끝나길 바라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탄핵까지의 기간 동안은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내내 탈진해 있었다. 내가 뭘 어찌할 수 있으랴, 투표 결과가 그러했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어리석은 인간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내는 동안 한 작가는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지식과 논리로 벼려낸 날카로운 펜촉을 내란 수괴에게 겨누고 있었으니 바로 고명섭 작가님이다. 2022년 3월부터 2025년 9월까지 신문과 잡지에 50여 편의 칼럼을 기고했고, 이 칼럼이 모여 지난 11월 『카이로스 극장』이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역사와 철학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나라, 우리 사회와 연결 짓고,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각 글마다의 맺음말들이 과거 연극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했던 구조와 닮아있다. 제목의 '극장'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걸맞다.


/

칸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작동 원리대로 놔두면,

타인의 인격이 오로지 수단이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수단으로 쓰더라도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대한다는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목적의 나라는 인간의 수단화가 아예 없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는 나라,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서로를 존엄한 자율적 인격체로 대하는 나라다.


─ 제 1부,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억이 무수한 '나'를 관통해 전체를 이루면 집단의 기억이 된다.

그 집단의 기억이 역사다.

역사, 곧 집단적 기억이 없다면 집단을 지탱해주는 정체성이 생겨날 수 없고

정체성이 없으면 집단은 집단으로서 존속할 수 없다.

역사가 집단을 집단으로 만들어준다.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 항일독립군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 제 2부, 「26. '항일독립군인가 간도특설대인가' 역사의식과 집단기억」

/

우리를 놀라게 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익숙한 삶의 문법을 깨뜨리는 반역적 행위에서 나온다. 시대를 거역하는 창조적 정신은 기성의 질서를 흔들기에

그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반감과 적대를 부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신을 둘러싼 적대적 문화의 압박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영감이 번개처럼 들이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을 두고

'진리 사건'이라고 불렀다.

'진리 사건'이란 '참된 것의 출현'이다.

정치에서도 참된 것은 일어난다.

창조적 영감은 우리를 묶어두고 있던 관습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 사건이 역사를 바꾸는 큰 전환의 출발점이 되느냐 마느냐는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비전과 결의가 얼마나 뚜렷하고 굳세냐에 달렸다.


─ 제 3부, 「33. 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


알고리즘이 편집한 세계를 사는 시대, 저마다 자기만의 반향실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벽을 허물어주는 도끼 같은 책. 정치의 의미도 퇴색되어가고 대화도 공론장도 점점 사라져 가는 지금, 고명섭 작가님의 『카이로스 극장』은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독서력이 턱없이 부족할 무렵, 고명섭 작가님의 『광기와 천재』를 읽고 막연하게 좋았다는 감상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저서 역시 좋다는 이야기만 하염없이 하게 된다. 역사, 철학, 정치에 공부가 될 뿐만 아니라 비판적 글쓰기의 좋은 사례라고 봐도 무방한 필력. 공감은 물론이고 배울 점도 많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면 1인분의 책임감을 위해 꼭 읽어야 할 인문교양서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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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3
로버트 시걸 지음, 이용주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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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신화의 힘, …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모든 초등학생이 빠짐없이 읽었던 만화책이 있었다. 바로 홍은영 작가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비록 출판사의 불공정한 관계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던 작품이기도 하지만 내 또래에 이 책 안 읽으면 간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신화 읽기'를 모르던, 더 나아가 책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모르던 어린아이에게 그때의 독서 경험은 그야말로 오락 본위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기는 읽었는데, 그 상태가 다시 읽기의 걸림돌이 되었고, 그러면서도 딱히 신화에 대해 할 말은 없는 그런 상태로 꽤 오랜 기간 머물러 있었다. 그런 내가 다시 읽어볼 결심을 하게 된 건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을 접하면서부터였고, 그 이후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나 신화학자 양승욱의 『처음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보다 깊이 있는 독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는 추상명사·관념의 시운전장[試運轉場]이다"라는 고 이윤기 선생님의 문장으로 겨우 오락 본위의, 그리고 문자주의적 신화 읽기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잘하지는 않았으므로 여전히 신화는 어려웠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단 하나의 타이틀 아래에 왜 이렇게 버전은 다양한 건지, 이 오래된 이야기에서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나는 어떤 해석을 끄집어내면 좋을지 그런 고민들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를 우리말로 옮겨 출간하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에서 ─ 늘 궁금한 제목의 책은 많았지만 ─ 내가 신화에 대해 가졌던 이런 고민을 어느 정도 덜어줄 책을 발견했다. 프린스턴대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신화와 종교 이론을 강의하며 『조지프 캠벨』, 『신화를 이론화하다』 등의 저술을 펴낸 로버트 시걸 교수의 『신화』라는 책이다.


아폴로도로스의 아도니스 신화와 오비디우스의 아도니스 신화 두 편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뉘는 이 신화의 해석을 통해 신화에서 파생되는 여러 이론들을 비교한다. 기원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이야기를 학자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여러 학자들은 신화에서 과학, 철학, 종교, 의례, 문학, 심리학, 그리고 구조와 정치까지 바라보았고 책의 각 장마다 이 분야들을 다루고 있다.


신화와 대립된다고 여겨지는 과학은 어떻게 신화와 연계되었을까? 온갖 의례와 종교는 신화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신화는 설명일까 이야기일까? 신화가 가지는 내재적 의미는 한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인간 보편적 심리를 가질 수 있을까?


/

신화가 이론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이론도 신화가 필요하다.

이론이 신화를 해명한다면, 신화는 이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이론을 신화에 완전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그 이론의 진리성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이론은 이론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확립되기 때문이다.


─ P.23, 「서론, 신화에 관한 이론들」


책은 '신화'에 대한 안내서가 아닌, 신화를 해석하는 틀, 즉 '신화 이론'에 대한 안내서이며, 근현대 이론에 한정된다는 한계를 서론에서 밝히지만, 상당히 유익했다.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개론서로 신화를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입문서라는 한계야 있겠지만, 이 책이 신화를 폭넓게 읽을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끄는 역할로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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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재료 교유서가 시집 2
원성은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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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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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술도 없이 열에 들뜬 낙서 말고

차갑고 차분하고 건조한 시를 쓸거야 그럴 거야 


─ 「기적 없이」


빨간색 표지만큼

제목만큼

차갑고 차분하고 건조한 시를 쓸 거라는 시 속의 선언만큼

시집은 적적[赤赤]하고 적적[寂寂]다


원성은 시인은 시집 『비극의 재료』에서

피를 흘리며 죽거나, 죽어가거나, 소외된 것들, 지나간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차갑고 차분하고 건조한 시의 언어로 그려지므로 죽음과 고통은 일시적인 소모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잠깐 언급되는 것으로 전락한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던 정현종 시인의 오래된 시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걸까


/

공중에서 정지한 새 한 마리도

대화에서는 오브제다

소비되고 낭비되고 마침내 치워진다


─ 「오브제」


산산조각 난 접시, 도로에서 죽어가는 날개가 부러진 새, 그에 대해 이야기할 뿐인 사람들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인스타그램에서 저마다 대서특필을 한다

단색 배경에 상업적으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폰트로 정보만 간단히 쓴 누군가의 비극

하지만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아래로 쓸기만 하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인터넷이 세상 모든 정보를 가져오고 SNS로 모두가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이 시대에서

그 한 생명의 죽음은 몇 초의 화젯거리밖에 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을 우회해서 그려낸 풍경을 보여준다


/

물에 빠진 사람과

물가를 걷는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은 다르겠지



제3의 풍경을 보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속에 풍덩 뛰어든다

불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소방관처럼


─ 「신비는 물을 좋아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들이나 큰 소리로 다 같이 외쳐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그 고통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그렇구나 물에 빠졌구나 죽었구나 고통스럽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시를 읽어도 그렇구나 하지만 그 그렇구나가 목에 박힌 가시처럼 따갑고 아프다

내 자리가 소방관이나 풍덩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으니까

나는 왜 소방관이 되지 못하는지

손을 잡지 않은 0과 1, 그 사이에 함께 걸으며 서슬 퍼런 칼날에 옆모습을 베이며 걷는 북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고통임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시 속에서 변명만 찾아낼 뿐


+

이런 걸 서평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사실 맨 뒤에 선우은실 문학평론가의 좋은 해설이 담겨있다

그런 관계로 내 감상만 주저리주저리...


책에 워낙 무언가 낙서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살면서 처음 교환 독서란 걸 해봤다

누가 쓰셨는지를 모르겠다

책에 낙서를 하는 걸 싫어했지만 이런 같은 책을 읽고 남긴 흔적은 좋다는 걸 처음 느꼈다


/

재난영화에서는 사랑이 끝나지 않는다

시작하기만 한다 타임머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사랑은 재난이다

산불, 나 아닌 타인이 저지르고 도망간 것



죽지 않고 태어나기만 하는

감정들이 있다

오래 끝나지 않는 건 장르가 된다

이런 장르도 있다


─ 「재난영화」


/

나는 파티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붉은 와인이 가득찬 잔을 들고

그런데 내 그림자만이 화려했다

그림자가 화려해질 수 있는 방법은

구멍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빛이 새는 구멍, 비밀을 함구하지 못하는 구멍,

침묵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구멍


─ 「그림자, 아닙니다」


/

나는 내가 쓴 문장이 무한확장해서

네가 쓴 문장을 안는 모습을 지켜본다

거미줄 모양으로 안간힘으로 뻗어나가는 문장이

네가 한밤중에 적어놓은 문장을 포옹한다 흔들린다

투명한 물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 「안긴 문장과 안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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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 1600년부터 오늘까지, 진보와 반동의 세계사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김종수 옮김 / 부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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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부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혁명[革命]

1. 명사 |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2. 명사 |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3. 명사 |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혁명, 영어로는 레볼루션[Revolution]이라 한다. 주로 오래된 관습을 뒤집는 갑작스럽고 급진적인 변화를 뜻하지만 레볼루션이라는 단어는 원래 과학계에서 고정된 축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도는 물체의 지속적 움직임이나 궤도 운동을 말했다. 왜 한 단어에 거의 정반대의 두 가지 정의가 있을까?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CNN 기자 파리드 자카리아는 이 질문을 시작으로 하나의 책을 여는 글을 썼다. 1600년부터 오늘까지, 진보와 반동의 세계사를 담은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다.


책은 크게 과거의 혁명을 다루는 1부, 「무엇이 한 시대를 혁명적으로 만들었는가」와 현재의 혁명을 다루는 2부, 「혁명적 힘과 반발이 불러온 현대의 혁명」 이 두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네덜란드에서 최초의 자유주의 혁명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영국의 명예혁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프랑스 혁명은 왜 실패했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1부는 교과서에서 봤다면 파편적이었을 사건들을 잘 엮어내며 설명한다. 2부는 우리에게 많이 익숙할 것이다. 교통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급격하게 이루어진 세계화로 발생하는 다양한 혁명들, 그리고 운동과 지정학적 사건들이 등장한다. 1부가 과거의 혁명들을 다루며 이해하고 끝이 난다면, 2부는 디지털 혁명이나 페미니즘 운동, 반체제 문화 운동 등에 대해 설명하며 같은 시대를 걸치며 살아가는 독자들이 지금 이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러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해한 현실을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을 마음속에 심어준다.


파리드 자카리아의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는 딱딱한 첫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었다. 저자는 역사 속 혁명의 사건을 말하며 그 시대를 담는 문학이 있다면 꾸준히 인용하고, 역사는 반복된다던 서양의 격언처럼 때론 닮아 있는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부분이 나에게 있어 흥미가 생기는 지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책의 기본이겠지만,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어떤 흐름으로 발생했는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등에 대해 충실하고 정확한 설명이 뒷받침해 준다. 알기 쉬우니 당연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재미만 이야기하기에는 책에는 더 큰 의도가 있었으니. 저자는 책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만큼 현재 다시 득세하고 있는 극단적 포퓰리즘의 문제를 알리고, 정보 혁명으로 모두가 고독한 왕이 된 지금 앞으로 우리 사회가 새로운 암흑기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책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재집권하기 전에 집필되었다고 한다. 트럼프 같은 반자유주의적 지도자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지만, 이러한 경고에도 트럼프는 재선되었고, 취임 직후 과격한 반자유주의적 정책을 쏟아냈다. 뒤늦게 뽑은 것을 후회하고 되돌리기엔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던가. 마치 지난 12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던 윤석열 정권처럼 말이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단순 역사 공부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심어주는 역사 교양서적. 책이 읽히지 않는 이 시대에 감히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말해본다.



본 서평은 두 번 읽은 책을 소개하는 북스타그램

@woojoos_story 모집으로 부키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했습니다.
우주클럽 온라인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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