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서평은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윤석열이 당선된 뒤로 3년이 조금 못 미치는 임기기간 동안, 이게 우리나라 대통령의 자질이 맞나 의심스러웠던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때론 트라우마가 되기도 했다. 비상계엄령 선포 전에는 그저 빨리 끝나길 바라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탄핵까지의 기간 동안은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내내 탈진해 있었다. 내가 뭘 어찌할 수 있으랴, 투표 결과가 그러했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어리석은 인간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내는 동안 한 작가는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지식과 논리로 벼려낸 날카로운 펜촉을 내란 수괴에게 겨누고 있었으니 바로 고명섭 작가님이다. 2022년 3월부터 2025년 9월까지 신문과 잡지에 50여 편의 칼럼을 기고했고, 이 칼럼이 모여 지난 11월 『카이로스 극장』이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역사와 철학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나라, 우리 사회와 연결 짓고,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각 글마다의 맺음말들이 과거 연극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했던 구조와 닮아있다. 제목의 '극장'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걸맞다.


/

칸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작동 원리대로 놔두면,

타인의 인격이 오로지 수단이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수단으로 쓰더라도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대한다는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목적의 나라는 인간의 수단화가 아예 없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는 나라,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서로를 존엄한 자율적 인격체로 대하는 나라다.


─ 제 1부,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억이 무수한 '나'를 관통해 전체를 이루면 집단의 기억이 된다.

그 집단의 기억이 역사다.

역사, 곧 집단적 기억이 없다면 집단을 지탱해주는 정체성이 생겨날 수 없고

정체성이 없으면 집단은 집단으로서 존속할 수 없다.

역사가 집단을 집단으로 만들어준다.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 항일독립군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 제 2부, 「26. '항일독립군인가 간도특설대인가' 역사의식과 집단기억」

/

우리를 놀라게 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익숙한 삶의 문법을 깨뜨리는 반역적 행위에서 나온다. 시대를 거역하는 창조적 정신은 기성의 질서를 흔들기에

그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반감과 적대를 부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신을 둘러싼 적대적 문화의 압박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영감이 번개처럼 들이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을 두고

'진리 사건'이라고 불렀다.

'진리 사건'이란 '참된 것의 출현'이다.

정치에서도 참된 것은 일어난다.

창조적 영감은 우리를 묶어두고 있던 관습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 사건이 역사를 바꾸는 큰 전환의 출발점이 되느냐 마느냐는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비전과 결의가 얼마나 뚜렷하고 굳세냐에 달렸다.


─ 제 3부, 「33. 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


알고리즘이 편집한 세계를 사는 시대, 저마다 자기만의 반향실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벽을 허물어주는 도끼 같은 책. 정치의 의미도 퇴색되어가고 대화도 공론장도 점점 사라져 가는 지금, 고명섭 작가님의 『카이로스 극장』은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독서력이 턱없이 부족할 무렵, 고명섭 작가님의 『광기와 천재』를 읽고 막연하게 좋았다는 감상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저서 역시 좋다는 이야기만 하염없이 하게 된다. 역사, 철학, 정치에 공부가 될 뿐만 아니라 비판적 글쓰기의 좋은 사례라고 봐도 무방한 필력. 공감은 물론이고 배울 점도 많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면 1인분의 책임감을 위해 꼭 읽어야 할 인문교양서적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