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재료 교유서가 시집 2
원성은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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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교유당 서포터즈로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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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술도 없이 열에 들뜬 낙서 말고

차갑고 차분하고 건조한 시를 쓸거야 그럴 거야 


─ 「기적 없이」


빨간색 표지만큼

제목만큼

차갑고 차분하고 건조한 시를 쓸 거라는 시 속의 선언만큼

시집은 적적[赤赤]하고 적적[寂寂]다


원성은 시인은 시집 『비극의 재료』에서

피를 흘리며 죽거나, 죽어가거나, 소외된 것들, 지나간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차갑고 차분하고 건조한 시의 언어로 그려지므로 죽음과 고통은 일시적인 소모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잠깐 언급되는 것으로 전락한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던 정현종 시인의 오래된 시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걸까


/

공중에서 정지한 새 한 마리도

대화에서는 오브제다

소비되고 낭비되고 마침내 치워진다


─ 「오브제」


산산조각 난 접시, 도로에서 죽어가는 날개가 부러진 새, 그에 대해 이야기할 뿐인 사람들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인스타그램에서 저마다 대서특필을 한다

단색 배경에 상업적으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폰트로 정보만 간단히 쓴 누군가의 비극

하지만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아래로 쓸기만 하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인터넷이 세상 모든 정보를 가져오고 SNS로 모두가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이 시대에서

그 한 생명의 죽음은 몇 초의 화젯거리밖에 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을 우회해서 그려낸 풍경을 보여준다


/

물에 빠진 사람과

물가를 걷는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은 다르겠지



제3의 풍경을 보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속에 풍덩 뛰어든다

불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소방관처럼


─ 「신비는 물을 좋아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들이나 큰 소리로 다 같이 외쳐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그 고통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그렇구나 물에 빠졌구나 죽었구나 고통스럽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시를 읽어도 그렇구나 하지만 그 그렇구나가 목에 박힌 가시처럼 따갑고 아프다

내 자리가 소방관이나 풍덩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으니까

나는 왜 소방관이 되지 못하는지

손을 잡지 않은 0과 1, 그 사이에 함께 걸으며 서슬 퍼런 칼날에 옆모습을 베이며 걷는 북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고통임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시 속에서 변명만 찾아낼 뿐


+

이런 걸 서평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사실 맨 뒤에 선우은실 문학평론가의 좋은 해설이 담겨있다

그런 관계로 내 감상만 주저리주저리...


책에 워낙 무언가 낙서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살면서 처음 교환 독서란 걸 해봤다

누가 쓰셨는지를 모르겠다

책에 낙서를 하는 걸 싫어했지만 이런 같은 책을 읽고 남긴 흔적은 좋다는 걸 처음 느꼈다


/

재난영화에서는 사랑이 끝나지 않는다

시작하기만 한다 타임머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사랑은 재난이다

산불, 나 아닌 타인이 저지르고 도망간 것



죽지 않고 태어나기만 하는

감정들이 있다

오래 끝나지 않는 건 장르가 된다

이런 장르도 있다


─ 「재난영화」


/

나는 파티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붉은 와인이 가득찬 잔을 들고

그런데 내 그림자만이 화려했다

그림자가 화려해질 수 있는 방법은

구멍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빛이 새는 구멍, 비밀을 함구하지 못하는 구멍,

침묵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구멍


─ 「그림자, 아닙니다」


/

나는 내가 쓴 문장이 무한확장해서

네가 쓴 문장을 안는 모습을 지켜본다

거미줄 모양으로 안간힘으로 뻗어나가는 문장이

네가 한밤중에 적어놓은 문장을 포옹한다 흔들린다

투명한 물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 「안긴 문장과 안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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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 1600년부터 오늘까지, 진보와 반동의 세계사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김종수 옮김 / 부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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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부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혁명[革命]

1. 명사 |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2. 명사 |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3. 명사 |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혁명, 영어로는 레볼루션[Revolution]이라 한다. 주로 오래된 관습을 뒤집는 갑작스럽고 급진적인 변화를 뜻하지만 레볼루션이라는 단어는 원래 과학계에서 고정된 축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도는 물체의 지속적 움직임이나 궤도 운동을 말했다. 왜 한 단어에 거의 정반대의 두 가지 정의가 있을까?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CNN 기자 파리드 자카리아는 이 질문을 시작으로 하나의 책을 여는 글을 썼다. 1600년부터 오늘까지, 진보와 반동의 세계사를 담은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다.


책은 크게 과거의 혁명을 다루는 1부, 「무엇이 한 시대를 혁명적으로 만들었는가」와 현재의 혁명을 다루는 2부, 「혁명적 힘과 반발이 불러온 현대의 혁명」 이 두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네덜란드에서 최초의 자유주의 혁명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영국의 명예혁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프랑스 혁명은 왜 실패했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1부는 교과서에서 봤다면 파편적이었을 사건들을 잘 엮어내며 설명한다. 2부는 우리에게 많이 익숙할 것이다. 교통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급격하게 이루어진 세계화로 발생하는 다양한 혁명들, 그리고 운동과 지정학적 사건들이 등장한다. 1부가 과거의 혁명들을 다루며 이해하고 끝이 난다면, 2부는 디지털 혁명이나 페미니즘 운동, 반체제 문화 운동 등에 대해 설명하며 같은 시대를 걸치며 살아가는 독자들이 지금 이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러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해한 현실을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을 마음속에 심어준다.


파리드 자카리아의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는 딱딱한 첫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었다. 저자는 역사 속 혁명의 사건을 말하며 그 시대를 담는 문학이 있다면 꾸준히 인용하고, 역사는 반복된다던 서양의 격언처럼 때론 닮아 있는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부분이 나에게 있어 흥미가 생기는 지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책의 기본이겠지만,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어떤 흐름으로 발생했는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등에 대해 충실하고 정확한 설명이 뒷받침해 준다. 알기 쉬우니 당연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재미만 이야기하기에는 책에는 더 큰 의도가 있었으니. 저자는 책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만큼 현재 다시 득세하고 있는 극단적 포퓰리즘의 문제를 알리고, 정보 혁명으로 모두가 고독한 왕이 된 지금 앞으로 우리 사회가 새로운 암흑기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책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재집권하기 전에 집필되었다고 한다. 트럼프 같은 반자유주의적 지도자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지만, 이러한 경고에도 트럼프는 재선되었고, 취임 직후 과격한 반자유주의적 정책을 쏟아냈다. 뒤늦게 뽑은 것을 후회하고 되돌리기엔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던가. 마치 지난 12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던 윤석열 정권처럼 말이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단순 역사 공부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심어주는 역사 교양서적. 책이 읽히지 않는 이 시대에 감히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말해본다.



본 서평은 두 번 읽은 책을 소개하는 북스타그램

@woojoos_story 모집으로 부키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했습니다.
우주클럽 온라인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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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전달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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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블루홀식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 꿈 전달 】

한 출판사의 편집자가

자신이 담당하는 소설가의 메일을 받고

그를 직접 만나러 간다.

메일에는 '더는 글을 못 쓰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고,

편집자는 두터운 팬층을 지닌 소설가를 달래려 하지만

소설가의 입에서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되는데….


사루하시는 몰라보게 야위고 초췌해져 있었다.

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 안도 더 엉망이었다.

"조금 더 일찍 말해야 했는데……."


【 에어 플랜트 】

에어 플랜트[air plant].

흙에 심을 필요 없이 그냥 두기만 해도 잘 자라서

손이 덜 간다는 식물.

입사 동기인 치하루가 에어 플랜트를 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바보 아니야?'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한 달 뒤,

존재 가치 없이 무해하던 치하루가 뭔가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데….


"치하루 씨, 요새 눈빛이 왠지 이상하지 않아?"


【 침하교를 건너자 】

유지는 결혼 1주년 기념일에 퇴근 후

아내 나쓰에와 레스토랑에서 작은 사치를 하기로 했다.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던 나쓰에가 유지를 보고 미소 짓고,

다가오는 아내를 기다리던 그 순간.

나쓰에의 등 뒤에서 비명이 터지고,

그다음 순간 나쓰에에게 누군가가 세게 부딪히며 아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쓰에의 뒤에 서있었던 한 남자의 손에는 칼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서바이벌 나이프가 들려있었고,

그렇게 유지는 나쓰에를 잃었다.


그리고 21년 뒤 유지는 그때 나쓰에를 찔렀던 남자에게 복수를 하는데….


당신 아내를 택한 이유?

아, 맞아.

그때 당신 아내의 등에 말이지. 이상한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어.

별 모양 가운데가 동그랗게 뚫린, 꼭 과녁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 호족[湖族] 】

호족[湖族]은 아주 오래전부터 겟킨 호수의 바닥에 살고 있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생김새는 인간과 거의 똑같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듯 물속을 헤엄친다.

등은 비늘로 빽빽이 덮여 있고, 몸 양옆에는 작은 갈고리 같은 발톱이 몇 개씩 돋아 있다.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물밑에 살기 때문에 피부는 반투명해서 뼈가 보일 정도다.

눈은 심해어처럼 퇴화해 그저 검은 구멍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게 아니야, 에이지.

아케미는 호족 따위가 아니야."

"아케미를 겟킨 호수로 돌려보냈지.

그 여자는 호족이니까."


이야미스[イヤミス]라는 장르 개념이 있다. 읽고 나면 기분이 불쾌해져서 '싫다'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 '이야다[嫌(いや)だ]'와 '미스터리'가 합쳐진 단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이야미스는 불쾌는커녕 곤란한 일조차 생기지 않는 필굿 소설의 대척점에 있는 장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자는 도대체 그런 걸 왜 읽냐고 하겠지만, 이렇게 하나의 장르로 명명되며 여러 작품들이 나오는 걸 보면 그래도 독자의 수요가 꾸준히 있는 듯 보인다. 이야미스로 유명한 작품이라면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 있고, 마리 유키코의 『갱년기 소녀』가 있다. 이야미스를 전부 섭렵한 건 아니지만, 『갱년기 소녀』를 읽고 3일 정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도대체 그런 걸 왜 읽어,

하지만 불쾌하다니까 더 궁금해지는 사람도 분명(!!) 있다.

왜? 글이 어떻게 해야 사람 마음이 그렇게 불편해지는데?

내가 그랬다.


​만약 당신도 나와 같다면 우사미 마코토의 『꿈 전달』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

『꿈 전달』은 표제작 '꿈 전달'을 포함해 총 11편의 단편이 있는 단편 소설집이다. 추리보다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들. 이 단편들은 묘하게 싫은 지점들을 살살 자극한다.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질투와 시기, 욕망, 불안, 비틀린 사랑 등)과 모르는 편이 좋았을 불쾌한 진실들을 펼쳐놓고, 이 이야기들 사이에 현실인지 망상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기이한 환상(꿈, 설화, 이야기)을 한 조각 넣는다. 표지가 주는 인상처럼 『꿈 전달』의 텍스트에는 바다, 호수, 수족관, 침하교, 바다생물 등의 습한 이미지가 적극 활용되는데 이 역시 독자에게 특유의 눅진하고 찝찝한 감정을 형성하는 데에도 한몫한다.


11편 ​저마다의 결말들이 이전의 이야미스 독서 경험처럼 트라우마를 유발하거나 하진 않았다. 옮긴이의 말처럼 '서정적인 여운'으로 끝났기 때문일까. 수수께끼의 진상을 마주하며 마무리되는 순간, 온갖 미묘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오가지만 그럼에도 개운하게 끝나는 부분이 좋았던 단편들. 전작을 탐하고 싶어진다.


앞에서 이야미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듯, 단편들을 읽으며 이야미스의 요소가 어렴풋하게 느껴졌는데, 그 불쾌함의 정도가 강한 편은 아니라 이야미스라는 장르를 새롭게 시도해 보고 싶은 독자에게 그 처음을 이 책으로 하면 어떨까 싶다. 꼭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벗어난 기이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우사미 마코토의 한결같은 색채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역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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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마음 훈련법 - 크리스틴 네프가 전하는 적극적 자기연민의 힘
크리스틴 네프 지음, 서광.덕산.서승희 옮김 / 학지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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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학지사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인간의 삶을 고통과 분리할 수는 없다. 누구나 살면서 힘든 시기를 겪게 된다. 이런 순간이 올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나의 경우에는 늘 스스로를 비판했었다. 남들도 나처럼 힘들 거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입을 꾹 닫고, 더 이상 나의 괴로움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때 나에게 벌어진 일은 스스로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지루해지는 순간마다 재생되며 발작하기도 한다. 속이 쓰려 끊어버린 정신과 약을 다시 찾아야 할까? 하지만 약을 먹는다고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

최근 몇년간 정신질환 진료를 받은 사람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약이 결코 오답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훈련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 분야의 선두를 달리는 출판사 학지사에서 『러브 유어셀프』와 『나를 사랑하기로 했습니다』로 자기연민을 알린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의 신간을 소개한다. 여성을 위한, 적극적인 자기연민의 방법을 담은 『나를 돌보는 마음 훈련법』이 바로 그 책이다. 이전 저서로 이미 자기연민에 대해 다시 배운 독자라면 모를까, 많은 한국인들에게 자기연민은 어쩌면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무한 경쟁 사회에서 스스로의 고통을 돌아보거나 제대로 보듬어 볼 배움의 기회조차 없었을 뿐만 아니라, 힘듦을 이야기했을 때 많이 들어본 대답 중 하나는 '너만 힘든 거 아니다'라는 냉정한 말이었으니.


​자기연민이라는 단어의 재정의부터 하자면, 크리스틴 네프가 말하는 '자기연민'은 결코 자신이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과 불완전함을 따뜻하게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친구가 나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때, 가장 좋은 적절한 반응을 나에게도 예외 없이 해주는 것이다. 저자는 들어가기에 앞서 자기연민은 누구에게나 유용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미투 운동을 지나며 성중립적이었던 지난 저서와 달리 여성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믿고 지지했던 남성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여성을 성희롱하고 학대했던 사실을 알게된 것을 계기로, 가부장적 사회에서 불공정한 여성의 위치에 주목하며 이제야 집필하게 된 여성을 위한 자기연민책. 여성은 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부드러운 측면을 억누르고 남성처럼 행동해야 하는지, 성공하고 반감을 사느냐, 호감을 얻고 불공정한 대우를 받느냐 하는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지, 직장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강한 압박을 더 많이 받으면서도,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남성보다 낮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자기연민의 힘으로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텍스트와 실습 등의 활동을 소개하며 돕는다.


나는 그렇기에 이 책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이 책에서 그저 흔한 에세이처럼 따뜻한 말만 했더라면, 읽는 순간에는 잠시 위로가 되었을지 몰라도 덮은 뒤에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을지도 모르니까. 허공을 훑는 피상적인 위로가 아닌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 사회의 문제를 조목조목 하게 지적하는 글들을 보며 하루는 학지사에서 소개했던 『문화 심리학』 속 문장이 연결 지어 떠올랐다.


/

문화와 마음은 분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보편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 맥락 내에서 구성된 상대적인 것이다.


─ 『문화 심리학』 中


​가부장제라는 문화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 여성들의 마음마저 분리하지 못하고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크리스틴 네프의 강렬한 가부장제 비판의 메시지가 책의 첫인상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지점이지만, '모든 여성'에게 따뜻하지 못한 세상에서는 그저 부드러운 메시지보다 사회를 돌아보고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이 더 좋다. 이는 비판의 화살을 오로지 자신에게로 향하지 못하도록 돕는다.


​자신의 힘듦을 인정해 주고, 극복하게 돕는 책. 나는 이 책의 무수히 많은 곳에 플래그를 붙였고, 또 여러 번 읽었다. 읽으며 고통을 느낀 순간도 비록 있었지만, 많은 여성에게 읽혔으면 한다. 이 책을 기반으로 하는 서로에 대한 연대가 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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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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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열린책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1.

검열[檢閱]

매체 | 언론, 출판, 보도, 연극, 영화, 우편물 따위의 내용을 사전에 심사하여 그 발표를 통제하는 일. 사상을 통제하거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단계적으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하고,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 방송사에서 방영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도 있었고, 그 덕분에 어떤 이미지로 선명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그 작품 속의 '퀴어 코드'가 방송사에 의해 수정되었음을 알게 된 건 꽤 최근의 일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바라보며 즐거워했던 세상이 실은 지워지고, 고쳐진, 검열을 거친 이후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검열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30년대의 어떤 연구 결과물도 그러했다. 한 여성 퀴어 사회학자는 3백 명이 넘는 동성애자의 삶과 욕망에 관한 증언들을 수집했다. 여성이라는 성별이 검열당하던 시절, 한 권위 있는 남성 의사의 이름으로 자신의 연구를 세상에 공개하려 했지만, 그들의 욕망이 아닌 오로지 우생학적 욕망만을 가진 남성 의사에 의해 증언들마저 검열당하고, 『성적 변종들』(1946)이라는 두 권짜리 책으로 출간된다.


이 실존 저작물을 기반으로 한 작가는 허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2.

도착[倒錯]

심리 |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異常)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


3.

대담[對談]

명사 | 마주 대하고 말함. 또는 그런 말.


이야기를 하는 건 노인 후안 게이와 후안이 네네라고 부르는 청년이다. 둘은 10년 전, '동성애자'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계기로 알게 된 사이였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후안이 노쇠해지고 죽기 전, 네네를 자신이 살던 팰리스로 부르며 둘의 서사는 시작된다. 후안이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잰 게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완성해달라는 부탁으로 『성적 변종들』이 등장하고, 그 기묘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둘은 이야기한다.


어두웠던 삶에 대해

지워진 기억에 대해

두 권의 책에 대해

미국 의학의 어두운 정신사에 대해

서서히 드러나는 숨겨진 이야기에 대해

기억하고 이야기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지구 반대편에서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당장 앞에 있는 사람이나 자신의 손가락이 아픈 게 더 크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한때는 억압받았던 소수자였지만, 퀴어의 욕망이나 그들이 핍박받던 역사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여기에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음도, 정말 이 책에서 삭제된 텍스트들처럼 지워지고 지워지며 알기 힘듦도 있다.


쓰였다가 다시 지워진 무수히 많은 수수께끼와 타자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고통들을 『암전들』이라는 형식으로 읽으며, 읽어보려 애쓰며, 그러다 다시 이들의 이야기에 대해 감히 쓸 수 없음에 좌절하고 만다.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음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그저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뿐.


4.

경청[傾聽]

명사 | 귀 기울여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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